소설리스트

259화 (259/615)

259화 학살의 밤 (2)

사방에서 경고음이 들렸다.

시끄럽게 울려 대는 상황에서, 병사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찾고자 눈에 불을 켰다.

“로만 드미트리다!”

“저기 있다!”

순식간에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라스칼에 1만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만큼, 찰나의 시간만으로도 수백의 병력이 로만 드미트리 주변을 둘러쌌다.

위협적인 광경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마치 로만 드미트리를 토끼몰이하는 것처럼 압박하는 형세였지만, 실제로 맞닥트렸을 때의 결과는 달랐다.

콰직!

“크악.”

선두의 병사가 단번에 찢겨 나갔다.

엄청난 충격에 그가 눈을 부릅뜨자, 로만 드미트리는 검을 회수하며 뒤이어 달려드는 병사들의 몸을 베었다.

검의 움직임에 따라 진득한 피가 딸려 왔다.

처음 베어진 병사의 육체가 땅에 쓰러지기도 전에, 로만 드미트리의 검은 어느새 세 명의 머리를 하늘에 날려 버렸다.

동시에.

콰르르르르르릉.

오라가 들끓었다.

병사들로 득실거리는 공간으로 파고들더니, 마주치는 족족 적들을 베어 버렸다.

병사들의 반격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반응할 만큼의 공간에 있는 존재들은 몸에서 번져 나가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기 바빴고,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을 향해 마력을 폭발했다.

‘혈류(血流).’

파바바박-

가시로 변한 핏방울이 적들의 몸을 관통했다.

끔찍한 비명이 일었다.

수십의 병사들이 동시에 나가떨어지자, 그 뒤에서 달려들려던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였다.

이건 토끼몰이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전혀 도망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적들을 찾아다니며 학살하는 것처럼 보였다.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는 간부들로서는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파블로 백작의 명령을 받았기에 병력을 물릴 수는 없는데, 이대로라면 병사들이 다 죽을 것만 같았다.

삑.

“이곳은 1구역, 이곳은 1구역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를 도저히 막을 수 없습니다. 빠르게 지원 부탁드립니다!”

다급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정면을 바라보는 순간.

번뜩.

목이 날아갔다.

뜨거운 열기가 일렁인다고 느끼는 순간,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목을 갈랐다.

명령의 체계가 붕괴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적진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간부로 추정되는 이들의 목숨은 확실하게 취했다.

일만의 병력이라 할지라도.

명령권자들이 죽어서 병력을 즉각적으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그때부터는 숫자의 의미는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단 5분.

로만 드미트리가 학살을 벌인 시간이었다.

1구역이라고 불린 이 장소로 많은 병력이 몰려들자, 로만 드미트리는 망설임 없이 불길에 몸을 던졌다.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쫓아가!”

“불길 때문에 쫓아갈 수가 없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분노가 폭발하는 상황이었다.

제국의 검사들이 도착하면서 분위기를 반전시키려고 했건만,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추격의 의지를 꺾었다.

그들로서는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불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조금만 다가가도 빨갛게 달아오르는 피부는 불길 속에서의 추격전을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몇 분 뒤.

“크악!”

“로, 로만 드미트리다!”

다른 장소에서 다시 나타났다.

불길을 뚫고 나타난 로만 드미트리는, 병사들의 허리를 끊으며 다시 한번 학살을 벌였다.

완벽한 게릴라(guerrilla) 작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일방적인 학살을 벌이다가도 예민한 감각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면 곧바로 불길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의 존재는 바로 크로노스 제국의 7기사단이었다.

그들이 성난 기세로 달려오자, 이번에도 적당히 싸우다가 불길 속으로 물러났다.

화륵.

화르르르륵.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성난 얼굴의 적들을 바라보며, 그대로 불길에 휩싸였다.

* * *

7기사단의 단장.

기사단장 벤토는, 일련의 상황에 분노가 폭발했다.

[이곳은 1구역, 이곳은 1구역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를 도저히 막을 수 없습니다. 빠르게 지원 부탁드립니다!]

지원 신호.

로만 드미트리의 위치를 파악하자마자 1구역이라고 불리는 장소로 뛰어갔다.

상대는 독 안에 든 쥐였다.

꼬리를 붙잡는 순간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벤토를 따라 7기사단의 오라 검사들이 빠른 속도로 따라붙었다.

현 위치에서 1구역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5분을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고, 정말 빠르게 도착했다고 생각했건만 현장에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산더미 같은 시체들.

고통에 신음하는 병사들.

패잔병(敗殘兵)의 모습이었다.

이를 악물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찾을 방법은 없었다.

그때였다.

[2구역에, 2구역에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 크악!]

마법 통신기 너머로.

병사들의 비명이 들렸다.

벤토는 황급히 걸음을 돌렸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2구역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주변에서 불길이 넘실거리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동하는 시간을 줄일 수만 있다면, 오라로 몸을 보호하면서 작은 불길은 몸으로 뚫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당한 흔적만 있을 뿐, 살육을 벌인 장본인은 찾을 수 없었다.

[3구역에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습니다!]

[4구역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으아아아악!]

사방에서 보고가 밀려들었다.

상대의 움직임은 신출귀몰(神出鬼沒)했고, 꼬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구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 불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라스칼 전체가 활활 타오르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추격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폭발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은, 살의로 번들거렸다.

빠드드득.

“로만 드미트리, 이 개새끼야!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한판 붙자!”

발악해도 의미가 없었다.

벤토는 바닥에 널브러진 부상자의 멱살을 잡아채더니, 애꿎은 그를 향해 분노를 토해 냈다.

“네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말해! 로만 드미트리는 어디로 갔지? 그리고, 그를 따르는 다른 병사는 없었나? 말해,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병사는 공포에 바들바들 떨면서, 힘겨운 얼굴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어, 어디로 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화, 확실한 것은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였습니다.”

혼자.

공통된 증언이었다.

현장에 도착할 때마다, 병사들은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의 존재를 언급했다.

‘잠깐.’

이상했다.

라스칼.

크로노스의 전초 기지로써, 이곳에 상당한 전력이 있다는 사실은 로만 드미트리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공격하는 게릴라 작전에 정말 로만 드미트리 혼자서 나섰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질 않았다.

너무나도 위험한 작전이었고,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는 호전적인 존재다.

이렇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자신을 유혹하듯 도망칠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다.

‘설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길한 가능성.

벤토가 벌떡 일어났다.

마법 통신기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성문으로 간다! 어서!”

* * *

그 시각.

블루 아일랜드의 마법사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추격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화재 진압에 나섰다.

화륵.

화르르르륵.

“어후. 뜨겁네, 뜨거워.”

블루 아일랜드 소속.

마법사 예일이었다.

무려 5서클의 마법사인 그는,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린 화마를 마주하고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블루 아일랜드는 원소 마법 중에서도 ‘물’을 다루는 학파다.

로만 드미트리가 나름대로 그럴듯한 계획을 세웠지만, 하필이면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악재였다.

화마.

단숨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예일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마력을 일으키자, 주변에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휘날리며 파랗게 물들었다.

“아쿠아 필드(Aqua Field).”

화악.

마나가 일었다.

마치 해일(海溢)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물이 폭발하면서 주변을 그대로 휩쓸어 버렸다.

기름에 의한 화재라 해도 문제없었다.

마법으로 생겨난 물은 강력한 억제력을 보유하고 있고, 불이 강력한 폭발을 일으킬지라도 그것을 단번에 집어삼켜 버릴 것이다.

동시에.

블루 아일랜드의 마법사들이 힘을 보탰다.

“아쿠아 실드(aqua shield).”

“아쿠아 실드.”

“아쿠아 실드.”

화마가 일렁이는 공간에 물의 장막을 형성했다.

불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산소가 필요하기에, 아쿠아 실드로 주변에 산소가 들어오는 것을 차단해 버렸다.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아쿠아 실드 자체에도 냉각(冷却)의 효과가 있기에, 이대로라면 아쿠아 필드에 의해 단번에 화마가 정리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폭발이 일었다.

화마가 격렬하게 타오르며, 자신을 뒤덮으려는 물의 힘에 대항했다.

경악스러운 장면이었다.

일반적인 불길이라면 분명히 사그라지고도 남았을 상황에, 화마는 아쿠아 필드의 수분을 모두 집어삼켜 버렸다.

그냥 마법도 아니고 무려 5서클의 마법이다.

블루 아일랜드의 마법사로서 이와 같은 상황을 수도 없이 경험한 예일이었지만, 눈앞의 광경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넋을 잃었다.

활화산이 터져 나가듯 존재감을 분출하는 화마의 모습에, 예일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5서클의 마법이, 단번에 증발했다.

파스스스슥.

“확실해. 이건 일반적인 불이 아니야.”

파블로 백작은 말했다.

기름에 의한 화재가 발생했다고.

처음에는 예일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물의 마법에 대항하는 화마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시작은 파블로 백작의 말처럼 기름에 의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엄청난 불길의 주체는, 마법과 같은 특수한 힘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확실했다.

고로.

이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꺼트릴 수 없는 불길이었다.

* * *

벤토는 미친 듯이 뛰었다.

방금.

예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그가 말한 내용은, 불길한 상상에 확신을 더했다.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물의 마법으로도 화재를 진압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분명히 화마의 주체가 있다는 것이고, 그 존재를 제압하지 않는 이상 불을 꺼트릴 방법은 없습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화마의 불길을 제압할 만큼 강력한 힘을 발현하든가, 아니면 불의 주체를 죽여 버리든가.

전자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불의 주체가 그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에 ‘강력한 저항력’을 보이는 그의 모습을 생각했을 때, 화마의 불길은 그로부터 비롯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일단.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었다.

라스칼의 성문 중 남문(南門)에 도착한 벤토는, 창백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화륵.

화르르르르륵.

성문이 타올랐다.

일부는 무너져서 도망칠 길을 완벽하게 차단했고, 성벽을 기준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불길함은 현실이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동이 왠지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서 시간을 번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벤토로서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때.

수하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북문(北門)이 막혔습니다!]

[서문(西門)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이 너무 세서, 이곳을 통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동문(東門)이 화마에 휩싸였습니다! 아무래도 의도적으로 누군가 방화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동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모두 죽었으며, 성문을 조작하는 레버 또한 파괴되었습니다.]

“……이 새끼가 설마.”

화륵.

화르르르르륵.

눈앞에.

불길이 넘실거렸다.

남문을 집어삼키는 불길을 바라보며, 벤토는 암담한 기분을 느꼈다.

“1만의 병력이 라스칼에 갇혔다. 우리는 이제,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머릿속으로는 현실을 부정했지만,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서, 1만의 병력을 모두 사냥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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