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0화 (260/615)

260화 학살의 밤 (3)

라스칼의 경비병.

그는 성문이 무너지고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 파블로 백작의 명령을 들었는데도 자리를 이탈하고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크로노스 제국일지라도 모두가 용감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같은 인간으로 이루어진 나라기에, 경비병과 같은 탈영병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악마야. 이대로라면, 다 죽을 게 분명해.’

최근.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소문은 흉흉했다.

그가 나타난 전장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을 정도로 잔인한 학살이 이루어졌고, 그간의 행보가 단순히 전장 괴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실제로 동료들이 암살을 당한 모습은 공포를 유발했다.

제국의 법도에 탈영은 가족까지 몰살시킬 정도로 엄청난 중죄였지만, 사방이 불타오르는 라스칼의 모습을 확인하자 자신도 모르게 ‘비밀 통로’를 향해 빠르게 도망쳤다.

일단, 살고 싶었다.

라스칼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면 그때는 늦는다.

성문의 바닥을 파내서 만든 작은 개구멍은, 이 지옥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었다.

개처럼 기었다.

질퍽한 흙에 엉망이 되었지만, 마침내 밖으로 고개를 내민 경비병은 자신의 생존을 확신했다.

서걱-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고개를 내밀자마자 검이 그의 목을 날려 버렸고, 경비병은 환한 얼굴 그대로 머리만 성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크리스는 싸늘한 얼굴로 경비병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라스칼 안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처럼 남들 몰래 탈영을 시도하는 숫자가 적지 않았다.

“미리 확인해 둔 비밀 통로에 모두 불을 질러라. 주군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와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툭.

화르르르륵.

통로에 횃불을 던졌다.

미리 기름을 뿌린 덕분에, 불은 빠르게 번지며 시체를 시작해 통로 안을 불길로 물들였다.

그렇게 크리스는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로만 드미트리와 사전에 합의된 사항이었고, 그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성문의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불을 질러 버렸다.

그리고 비밀 통로를 차단하는 것까지가 크리스의 역할이었다.

불을 지르고 먼발치로 물러난 크리스는, 활활 타오르는 라스칼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우리는 적들이 행한 방식으로, 드미트리가 겪은 고통을 돌려줄 것이다.”

당시.

수하들은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크로노스 한복판에 침투해서 그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명령한다면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드미트리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금.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홀로 1만의 병력을 유인했고, 적들이 방심하는 사이에 라스칼은 불길에 휩싸였다.

크리스가 마법 통신기를 들었다.

삑.

“첫 번째 계획에 성공했다. 8개 조는, 적들의 움직임을 확인한 뒤에 곧바로 두 번째 계획을 진행하라. 명심하라. 이번 계획은 은밀하고 조용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단 한 명이라도 작전 도중에 존재가 발각된다면, 그때는 망설이지 말고 두 번째 계획을 포기하라.”

[수신 완료.]

[수신 완료.]

.

.

메시지가 밀려들었다.

크리스는 마법 통신기를 내려놓고는, 라스칼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지금부터는.

로만 드미트리의 몫이었다.

* * *

파블로 백작은, 벤토의 보고에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

“밖으로 나가는 퇴로가 완벽하게 차단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의도적으로 저희를 유도하고, 이 불구덩이에 1만의 병력을 가두려는 속셈이 분명합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사고 회로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병력을 진두지휘하며 곧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할 수 있다고 믿었건만,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보고에 파블로 백작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벤토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라스칼에 번진 불길에, 1만의 병력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전멸을 당할 수도 있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의 의도를 알았다면, 지금부터는 얘기가 달랐다.

“다른 퇴로는 없나?”

“일반적인 퇴로는 없습니다. 다만, 북문의 경우에는 다른 곳보다는 성벽이 노후된 상태라서, 마법을 활용해 성벽을 무너트리고 밖으로 빠져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생명입니다. 라스칼이 완전히 불길에 휩싸이면, 그때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없습니다.”

“알겠다. 일단 로만 드미트리의 추격은 포기하고, 전군에 명령해 후퇴할 것을 지시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상황이 바뀌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열기에, 파블로 백작은 이를 악물며 후퇴를 택했다.

‘로만 드미트리. 정말 무서운 존재구나.’

드미트리의 계획.

모든 것이 상식 밖이었다.

애초에 라스칼을 공격한다는 판단 자체도 경악스러운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소수의 병력으로 1만의 병력을 집어삼킬 계획을 구상했다.

헥토르 왕국이 어째서 유리한 상황을 역전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과 같은 과감한 판단은, 일반적인 전술 교본에서는 알려 주지 않는 영역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괴물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를 반드시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전군 퇴각하라!”

“북문을 통해, 라스칼을 빠져나갈 것이다.”

명령을 내렸다.

벤토와 7기사단을 선두에 세우고, 생존을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넓은 길목이 꽉꽉 들어찬 상황에, 파블로 백작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면서 인파를 헤치고 나갔다.

“비켜, 비키라고!”

“파블로 백작님이시다! 길을 열어라!”

극한의 혼란 속에서도.

병사들은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야를 확보했을 때, 파블로 백작은 눈앞의 현실을 의심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인 채로, 북문으로 향하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 * *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수천의 병력이, 단 한 명 때문에 나아가질 못했다.

파블로 백작이 소리쳤다.

“로만 드미트리! 언제까지 비겁하게 도망만 칠 것이냐! 네가 정녕 전사라면, 이런 비겁한 방법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한번 붙어 보자! 크로노스 제국은, 언제든 도전을 받아들일 것이다!”

소리를 지르면서도.

로만 드미트리가 응해 주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판단이었고, 병사들을 진군시키면 로만 드미트리는 불길 속으로 사라질 것이 뻔했다.

발할라에서의 일로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들었다.

드미트리로 향하는 길에 그의 검에 수많은 병력이 죽었고, 망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는 단순히 ‘일개 개인’으로 치부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1만 명이다.

이 많은 인원에, 조금만 시간을 끌면 본대가 도착할 것이다.

크로노스의 땅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기에,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하고도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물러나기는커녕, 보란 듯이 불길에서 한 발 걸어 나왔다.

“이 불 때문에 나를 처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당연하지! 내가 너의 의도를 모를 것 같으냐! 시간을 끄는 사이에, 불구덩이에 1만의 병력을 가두려는 속셈이겠지. 하지만 어림도 없다. 나 파블로 백작은, 너의 간악한 계획에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화악.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밀려났다.

처음에는 다가오기도 힘들 정도로 사방이 불타올랐는데, 로만 드미트리의 의지에 따라 수천의 병력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상관없을 만큼의 공간이 확보되었다.

지하 공간에서 얻었던 화마(火魔)의 힘은 강력했다.

불에 관해 절대적인 장악력을 보였고, 라스칼이 화마의 힘을 빌려 타오르는 순간부터 이 근방의 불길은 모두 로만 드미트리의 통제를 따랐다.

1만의 병력.

적들을 처리할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화마를 폭발시킨다면, 이미 불길에 휩싸인 그들로서는 이 뜨거운 열기를 버틸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복수는,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요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내가 약속하지. 나를 쓰러트린다면, 너희는 이 불길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만한 발언이었다.

이 많은 병력을 마주하고도.

감히 내려다보는 듯한 발언에, 파블로 백작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건방진 새끼. 전군,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라!”

터져 나오는 음성.

파블로 백작의 명령에, 크로노스 제국의 병력이 일제히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장관이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인파에,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을 향해 똑같이 달려들었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동시에 공격하라!”

“죽어!”

사방에서 살의가 넘실거렸다.

선두에서는 7기사단 소속의 오라 검사들이 오라를 일으켰고, 사방이 찬란하게 빛날 정도로 폭발적인 오라는 로만 드미트리를 단번에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두려움은 없었다. 공간을 가득 메우는 1만의 병력은, 이 싸움이 크로노스 제국의 승리로 끝나리라는 강한 확신을 주었다.

순간.

‘천마검법 중반부 일초식.’

콰앙.

콰콰콰콰쾅!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선두의 병력과 로만 드미트리가 맞닥트리자, 7기사단의 기사들이 단번에 소멸(消滅)되어 버렸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폭발적으로 분출되던 오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를 뚫고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제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바르보사를 압도한 이 괴물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일만의 병력이라고 한들 수많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파팟.

콰르르르르릉.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치고 들어오며 선두의 병력을 도륙하더니, 눈을 한번 깜빡이자 어느새 제국의 병사들로 득실거리는 공간에서 피를 흩뿌리고 있었다.

사방에서는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무기를 뻗었다.

머리, 몸 다리를 가리지 않고 병사들이 득달같이 공격했지만, 그들과 로만 드미트리는 마치 체감하는 속도가 다른 것처럼, 의도하듯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모두 흘려 버렸다.

팔락.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오라 검사는 본능적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푹.

“크르르륵.”

피거품을 물었다.

그러자 로만 드미트리는 그의 머리칼을 잡아채더니, 뒤에서 심장을 찔러 넣은 뒤에 쓰레기를 내던지는 것처럼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

일련의 상황이 눈에 콱콱 박혔다.

분명히 압도적인 숫자의 병력이 달려드는데도, 그들은 철벽(鐵壁)에 막힌 것처럼 맞닥트리는 족족 차례로 쓰러졌다.

눈이 팽팽 돌았다.

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일만이 한 명을 사냥해야 하는 상황에서, 날뛰는 한 명이 일만을 도륙하는 것처럼 보였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폭발에 휩쓸렸다.

천마검법이 발현되며, 방금까지 인간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처참하게 찢겨 나갔다.

병사들이 겁에 질렸다.

처음에는 숫자만 믿고 덤비던 그들이, 죽어 나간 이들의 숫자가 네 자리를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지금의 로만 드미트리는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만의 병력은 확실한 우위를 말하지만, 얼마나 더 죽어야 그를 궁지에 몰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련의 상황.

벤토가, 악에 받친 얼굴로 달려들었다.

“죽어라!”

콰르르르르르르릉.

오라의 폭풍이 일었다.

5성의 오라가 발현되며, 그는 전력을 다해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다.

믿었다.

단 한 번.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는 하이에나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이라고.

그가 아무리 대단한 행보를 보여 왔다고 할지라도, 크로노스의 땅에서 이 많은 병력을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7기사단의 소속들도 힘을 보탰다.

그들은 선천의 힘을 개방하면서, 급속도로 타오르는 생명을 대가로 주변을 압도하는 오라를 표출했다.

그리고는.

푸확.

단번에 찢겨 나갔다.

벤토를 비롯한 기사들이, 마치 일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일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벤토의 의식이 흐릿해졌다.

말이 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싸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흐릿한 의식 속.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불을 활용해서 라스칼의 병력을 집어삼키려고 한다고 생각했건만, 그를 직접 상대해 보니 자신의 판단은 어리석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는 애초에 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었다.

확실했다.

불은 퇴로를 막는 용도일 뿐.

로만 드미트리는, 직접 일만의 병력을 모조리 도륙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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