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6화 (266/615)

266화 제1차 대륙 전쟁 (4)

스벤의 검이 육체를 가르는 순간.

케빈은 기억의 심연(深淵) 속으로 빠져들었다.

적막한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공간에, 마치 부유하듯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보냈다.

방금까지 드미트리를 위해 스벤과 혈전을 벌였던 일과 그 이전에 있었던 많은 사건은, 마치 본인과는 무관한 것처럼 동떨어지게만 느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보냈을까.

내가 왜 이런 공간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순간, 블랙홀이 생겨나듯 정신이 기억의 폭풍에 휘말렸다.

눈을 깜빡였다.

케빈이 바라보는 시야에, 어떤 사내들이 집에 들이닥치는 모습이 보였다.

와장창!

집 안의 가구가 부서졌다.

사내들은 험악한 얼굴로 보이는 족족 때려 부수더니, 그것을 말리려는 아버지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케빈에게는 하늘과도 같은 존재가 아버지다.

케빈의 말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 줄 것처럼 대단한 분이, 힘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뺨을 맞는 모습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화가 났다.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르고 달려들고 싶었지만, 발이 그 자리에 박혀 있는 것처럼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이게 기억의 파편이라는 것을.

과거의 기억을 머릿속으로 떠올릴 뿐, 케빈은 정말로 그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처참하게 밟혔다.

어머니는 말리다가 뺨을 맞았고, 뒤로는 여동생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지직.

지지직.

공간이 뒤틀렸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다.

왜 이런 꼴을 당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말없이 괜찮다고 말할 뿐이었다.

지직.

지지직.

이번에는 길거리였다.

매일 집 안에 가두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여동생 마리는 반항하듯 밖으로 나갔고, 집을 공격했던 사내들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이 펼쳐졌다.

마리는 비명을 지르며 사내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뿌리쳤지만, 사내들의 힘은 너무나도 강했다.

그리고 힐끗 골목길을 확인한 사람들은, 분명히 범죄가 저질러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팔뚝에 새겨진 문양을 보았기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사람들은 차마 도와주지 못했다.

케빈이 달려들었다.

그들에게 엉망으로 얻어맞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덕분에 마리는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지직.

지지직.

어머니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가세(家勢)가 기운 이유는 그들 때문이고, 함부로 나섰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상대는 극악무도한 범죄 집단인 블러드 팽이었다.

그들은 어리다고 봐줄 사람들이 아니라며, 어머니는 겁에 질린 얼굴로 신신당부했다.

그때부터였다.

삶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기억이 옅어지고 있었다.

귀혼마공은 위험천만한 힘이었고, 잠식의 단계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심마(心魔)의 위험이 동반되었다.

처음으로 과도한 힘을 사용한 대가로. 정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기억의 재생은 그것들을 되새겨 보는 시간이 아니라, 기억들이 그것들을 잊어도 되냐고 물어보는 과정이었다.

지직.

지지직.

너무나도 피곤한 날이었다.

집안을 도와주기 위해서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케빈은, 어느 날 길거리에서 블러드 팽을 만났다.

자신을 기억하는 그들은, 처음에는 돈을 내놓으라며 몰아붙이다가 흥분했는지 심각한 구타로 번지고 말았다.

아팠다. 정신없이 맞던 도중에, 처음 들어 보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멈춰라.”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닥친 일에 나서 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신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은 사내는, 블러드 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드미트리의 법도를 어겼다. 고로, 지금부터 드미트리의 가문의 장자로서, 법도를 어긴 너희들에게 형을 집행하겠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삶의 목적에 도달했을 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다녀올 때까지. 꼭, 심마를 이겨 내거라.”

마치 그때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이번에도 자신의 어려움을 알아주었다.

자신은 그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

아직 살아 있다면, 이처럼 심마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확-

어둠이 밀려났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케빈은, 한스의 왜소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그게.

심마를 이겨 낸, 케빈의 첫 기억이었다.

* * *

한스가 호들갑을 떨었다.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괜찮냐고 묻는 모습에, 케빈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본능적으로 알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스벤의 죽음을 의미하고, 한스의 밝은 표정만 보더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간 벌어진 일을 알고 싶었다.

아직은 많이 창백한 케빈의 얼굴에, 한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얘기는 길었다.

스벤의 일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로만 드미트리의 이야기를 언급할 때는, 치료사에게 들었던 말을 덧붙였다.

“치료사의 말로는 로만 도련님이 정말 목숨을 걸고 너와 헨더슨을 치료했다고 들었어. 그 모습이 어찌나 헌신적인지, 생명력을 나누어 주는 것만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하더구나. 케빈. 그만큼 로만 도련님은 네가 무사하기를 바랐단다. 이렇게 일어난 모습을 보면, 로만 도련님도 정말 기뻐하시겠지.”

듣기 좋은 말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헛되게 살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케빈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생명력이라는 단어에,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선천(先天)의 기운을 나누어 주신 건가.’

언젠가.

로만 드미트리의 가르침에 나왔던 그 힘은, 태생부터 타고난 양이 한정되기에 매우 귀중한 힘이라고 강조했었다.

선천의 기운이 닳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치료를 진행하며 점점 메말라 갔다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케빈은 어쩌면 그가 자신을 위해 선천의 기운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악물었다.

정말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나, 자신과 같은 녀석을 위해 로만 드미트리의 생명력이 닳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드미트리의 복수를 위해 크로노스 제국과 전쟁을 선포했다고 들었다.

그런 사람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에, 이대로 병상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서부 전선으로 가야겠습니다.”

“케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스의 간곡한 만류에도, 케빈은 검을 챙기고 밖으로 나섰다.

때마침.

페르난도와 마주쳤다.

행색을 살핀 그는, 단번에 돌아가는 상황을 간파했다.

“케빈. 병상으로 돌아가서 쉬어라. 네가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지만, 지금 따라간다고 해도 주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차라리 이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주군이 기뻐할 수 있도록 몸을 회복하는 것에 전념하는 것이 어떤가.”

“죄송합니다만, 그럴 수 없습니다.”

케빈은 단호히 말했다.

페르난도가 하는 말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제 삶의 이유는 주군에게 있습니다. 그분이 전장에 있다면, 저도 그분과 함께 있어야만 합니다. 제가 그분 곁을 떠날 때는. 그분이 내린 명령을 이행할 때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지나치는 모습에, 페르난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걸 대체 어떻게 말려.”

케빈.

드미트리에서도, 그는 독종으로 유명했다.

페르난도는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목적은 드미트리를 수호하는 것.

제 역할을 하겠다고 떠나는 케빈을, 굳이 따라나서며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 * *

평화는 짧았다.

대화를 끝내고, 며칠 뒤.

멀리서 밀려오는 제국군의 모습에, 망을 보던 병사들이 긴급하게 신호를 보냈다.

뎅뎅뎅뎅-

“적이다!”

“적들이 진군하고 있다!”

성이 발칵 뒤집혔다.

병사들은 훈련받은 대로 일사불란하게 제 위치를 찾았고, 서부 전선의 지휘관인 반덴버그 후작도 무장을 갖춘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드미트리가 전쟁을 선포한 순간부터 한순간도 무장을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았다.

언제든 적의 공격에 대응하도록, 감각을 예민하게 세웠다.

성벽 위.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밀려드는 모습에, 같이 따라나선 노엘 남작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가 예상한 것보다 너무 이릅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사용한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 충분한 시간을 들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뱀포드 공작이 빠르게 결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이대로라면 저희가 확보하려는 시간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상대는 뱀포드 공작이다. 전장의 백전노장이라면, 본능적으로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겠지.”

반덴버그와 뱀포드.

전장에서 몇 번 마주쳤었다.

뱀포드 공작은 투박하나 전쟁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인물이었고, 수차례 마주친 전쟁에서 반덴버그 후작은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단순히 제국과 왕국의 전력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략의 대결에서도, 뱀포드 공작을 상대로는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도, 불길한 기운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플로라 로렌스가 말했다.

“지휘관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면전을 예상하고, 그동안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에서 마탑주급의 마법사들이 나선다고 할지라도, 마법 방어진을 겹겹이 두른 이 성벽을 무너트릴 방법은 없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로만 드미트리 님을 믿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옳은 말이다. 적들이 공격을 서두른다고 한들, 준비했던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꽉.

검을 움켜쥐었다.

로만 드미트리.

믿었다.

그간의 전쟁에서 그는 기적적인 결과를 보여 주었고, 크로노스와의 전쟁에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승리를 거둘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도 목숨을 걸라고 말했기에, 반덴버그 후작은 자신의 역할을 위해 목숨을 걸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일정 거리에 멈추어 선 제국의 병력 사이로, 의문이 인물이 터덜터덜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 * *

단 한 명이었다.

로브를 눌러쓴 모습에, 노엘 남작이 말했다.

“전령(傳令)일까요?”

“아니. 전령이라면, 백기를 내걸고 전달할 것이 있음을 알렸겠지. 크로노스 제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존재는 크로노스 제국이 의도하는 바를 행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반덴버그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장에서 많이 활용되었던 패턴이다.

실제로 지난번 크로노스와의 전투에서, 플로라 로렌스는 ‘대전사 전투’를 이용해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위치에 마법 트랩을 깔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덕분에 적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고, 이번에는 적들이 대비할 것을 염려해서 마법 트랩을 설치해 두지 않았다.

로브인은 망설임이 없었다.

마법 트랩을 확인하는 그 어떠한 행동도 없이, 어느새 마법을 사용할 충분한 거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반덴버그 후작이 신호를 보냈다.

“발리스타(ballista)를 준비하라.”

“알겠습니다.”

발리스타.

원거리 공격에 사용되는 무기다.

강력한 파괴력과는 달리 정확도는 다소 떨어지는 무기인데, 마법사들의 캐스팅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개조한 발리스타를 만들었다.

파괴력을 낮추는 대신에 정확도를 높이는.

마법사가 서 있는 위치에 공격을 퍼붓는다면, 마법사는 의도를 이루지 못하고 마법을 취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준비 끝냈습니다.”

“곧 신호를 내리겠다.”

슥.

손을 들었다.

로브인의 모습을 예의주시하다, 그가 무언가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자 번개같이 손을 내렸다.

“발사하라!”

“발사!”

퉁.

투투투투투퉁!

거대한 화살이 허공을 날았다.

마법이 인챈트(enchant) 되어 있는 화살은 생명체의 위치를 찾았고, 그것들은 순식간에 로브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단 한 발도 물러나지 않는 모습에, 사람들은 발리스타의 화살이 로브인의 연약한 육체를 단번에 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순간.

화악.

퍼퍼퍼퍼퍽.

하얀 막이 화살을 모두 막아 버렸다.

무언가를 특별히 준비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도, 손길 한 번에 단번에 마법이 발현되었다.

그리고는.

“가소로운 녀석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마법을 발현했다.

로브인이 로브를 걷으며, 백발의 머리칼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하늘에 밀려드는 먹구름에, 반덴버그 후작은 불길함의 실체가 바로 저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5성의 경지는 6서클과 같고.

6성의 경지는 7서클과 같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륙 십이검은 6성의 경지였으며, 마탑주급의 마법사들은 대게 7서클에 해당했다.

그 이상은.

천외의 경지였다.

존재한다고는 알려졌지만, 존재했음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퓨리 오브 더 헤븐(Fury Of The Heaven).”

콰르릉.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백발의 마법사가.

8서클의 마법을 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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