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천마재림 (天魔再臨) (2)
코르타스의 함락.
병사의 보고에, 뱀포드 공작은 복합적인 감정이 일었다.
‘드미트리. 이것이 너희들의 계획이었구나.’
감탄했다.
라스칼을 함락시키고 서부 전선으로 도망치는 것이 당연한 판단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한발 더 나아가서 코르타스를 점령해 버렸다.
이제야 카이로, 드미트리 연합의 선택이 이해되었다.
서부 전선을 버리면서까지 시간을 확보하려는 그들의 의도는, 로만 드미트리가 코르타스의 워프 게이트를 확보하리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분노가 들끓었다.
드미트리의 계획은, 명백한 의도를 드러냈다.
‘워프 게이트의 부재는 우리가 고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위해서는, 코르타스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위치의 워프 게이트를 활용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특별히 코르타스의 경계를 강화하지 않았다. 코르타스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이 아니라, 그런 말도 안 되는 작전에 성공할지라도 대세에는 영향이 없기 때문이지.’
화가 났다.
뱀포드 공작의 군대.
무려 삼십 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서부에 들이닥쳤고, 고립되었다고 한들 정면에서 이 많은 병력을 감당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이로, 드미트리 연합은 의도적으로 서부 전선을 버렸지만, 사실 압도적인 전략 차이에 그런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했다.
고립은 의미가 없었다.
이대로, 카이로와 드미트리를 쓸어 버리면 그만이다.
다만.
뱀포드 공작은 신중한 편이었다.
결단을 내릴 때는 과감하나, 플로라 로렌스의 계획을 예상했던 것처럼 혹시 모를 변수를 떠올렸다.
‘지금 적들이 선택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의도적으로 전면전을 피하면서, 우리가 보급을 원활하게 확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겠지. 워프 게이트의 부재로 우리는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식량을 모두 소모하고 나면, 30만 병력이 먹어치우는 막대한 식량을 감당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청야(淸野) 전술.
적들은 식량으로 사용할 만한 모든 물자를 없애 버리며 도망칠 게 분명하고, 그것이 이번 전쟁에서 유일하게 변수를 만들어 낼 방법이었다.
뱀포드 공작은 곧바로 수뇌부들을 불러들였다.
간단하게 설치한 막사 테이블 위에, 서부 전선의 지도를 펼치고는 적절한 장소를 찾았다.
촤르르르르륵.
“지금부터 우리는 장기전을 대비해야 한다. 카이로의 수도까지 밀고 들어갔다가는 그 이전에 식량이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터. 크로노스의 보급 부대가 늦어도 한 달 안에 서부에 도착한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그때까지 버틸 식량만 확보하더라도 적들의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곳이 어떻겠습니까?”
수뇌부 중 한 명이, 지도의 한 군데를 가리켰다.
이름 없는 성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고성(古城)에 불과했는데, 크로노스 정보부가 파악한 바로는 이곳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카이로 왕국이 식량을 숨겨 둔 장소였다.
마침, 현재 크로노스 제국의 위치와도 그리 멀지 않았다.
카이로, 드미트리 연합으로서는 크로노스 제국이 고성의 비밀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테니, 고성을 점령한다면 대군을 먹일 충분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다.
두 가지의 방법.
청야 전술을 시도하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밀고 들어가거나, 아니면 안전한 방법을 택하거나.
평소라면 전자를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스칼과 코르타스를 연속해서 무너트리는 로만 드미트리의 변칙적인 계획에, 이대로 빨려 들어갔다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안정적으로 병력을 운용한다면.
변수가 발생할 확률은 존재하지 않았고, 로만 드미트리의 낯짝을 발아래 둘 날이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뱀포드 공작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고성으로 향한다.”
* * *
전장이 격변했다.
라스칼과 같이 크로노스 동부의 전초 기지인 테슬로에, 일단의 병력이 몰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성벽 위.
테슬로의 지휘관, 제크먼 남작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코르타스의 워프 게이트를 활용해서 후방을 공격할 생각을 하다니. 로만 드미트리는 정말로,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승리하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구나.”
황당했다.
워프로 넘어온 병력은 약 3만.
겨우 그 정도로는 크로노스의 본대를 무너트리기는커녕, 사실 테슬로를 단시간에 함락시키기에도 민망한 전력이었다.
대체 로만 드미트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성문을 열어 로만 드미트리의 머리를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뱀포드 공작으로부터 절대 어길 수 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드미트리의 병력이 나타난다면 농성(籠城)을 벌여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는, 적들의 의도를 따라 줄 필요가 없다.”
전장의 마에스트로.
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이 아무리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뱀포드 공작이 나타난 전장은 항상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결과를 쟁취해 냈다.
그렇기에 그는 군부의 상징으로 불렸다.
제크먼 남작과 같은 인물들에게, 공명심(功名心)에 끌려 명령을 어기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저 멀리.
한 명의 사내가 걸어왔다.
그런데 대화를 상징하는 ‘백기’가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제크먼 남작은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공격하라! 로만 드미트리가 성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라!”
파파파팟.
화살이 발사되었다.
하늘 가득 어둠이 밀려들었고, 그것은 로만 드미트리를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릴 것같이 빼곡하게 떨어져 내렸다.
일반 병사들로서는 소름이 돋는 광경이었다.
방패를 들어서 막는다고 할지라도, 그 틈을 뚫어 버리고 살을 관통해 버릴 만큼 인간이 피할 공간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파파파팍.
화살이 떨어진 자리에, 이미 로만 드미트리는 없었다.
사라졌다.
땅을 박찬다고 생각하는 순간, 화살로 감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막아! 막으라고!”
하늘 위로.
화살과 마법이 떨어졌다.
로만 드미트리의 접근을 막으려고 발악했으나, 겨우 한두 개 적중한다고 할지라도 무형(無形)의 막은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제크먼 남작으로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테슬로의 성문은 마법 방어로 단단히 보호되어 있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혼자 달려든단 말인가.
그 순간.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코앞에 도달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검에서 오라가 일어나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대한 성문을 향해 휘둘렀다.
그리고.
번뜩-
사람들은 보았다.
깔끔하게 잘려 나가는 강철의 모습을.
환하게 일어나며 발현되는 마법 방어는, 성문과 같이 단번에 잘려 나가 버렸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성문이 열렸다.
동시에, 때를 기다리던 왕국 연합의 병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질렀다.
“공격하라!”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라, 악의 무리를 처단하라!”
테슬로.
그들의 농성은, 단 1분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 * *
성문이 열린 순간.
내부를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필두로 밀려드는 병력에, 제크먼 남작은 크게 반항하지 않고 곧바로 투항을 택했다.
“항복하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백기를 내걸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자존심은 ‘투항’을 허락하지 않지만, 뱀포드 공작은 치밀하게도 테슬로가 무너졌을 때의 상황까지도 대비했다.
“만약 얼마 버티지 못하고 성을 내준다면. 적당히 반항하다가 투항을 택하라. 포로 하나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배에 달하는 병력이 필요하기에, 너희의 존재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짐이 될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고 너희를 죽이지도 못할 것이다. 포로의 존재는 언제고 ‘거래’의 대상으로 활용할 수 있기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포로를 학살할 가능성은 적다.”
드미트리.
그들은 외통수였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고, 그렇다고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성문을 베어 버린 무력에는 진심으로 놀랐으나, 제크먼 남작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 대한 불안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입으로만 항복을 말할 뿐. 처참하게 일그러진 표정의 이면에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뱀포드 공작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포박한 병력을 한군데에 모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멀찍이 떨어진 사람들은, 포로들에게 바라는 점이 단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상하다. 보통은 우리에게 회유책을 제시해서 정보를 얻는 것이 일방적인 반응이건만, 이 녀석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설마, 우리를 전부 죽이려는 건가. 그건 말이 되지 않아. 서부 전선이 무너지면서 붙잡힌 포로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선택은 절대 할 수 없어.’
병사들이 길을 열었다.
로만 드미트리였다.
그 사이로 걸어 나온 로만 드미트리는, 별다른 질문도 없이 곧바로 제크먼 남작의 머리칼을 붙잡았다.
콱.
“악!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네가 이곳의 지휘관인 제크먼 남작인가.”
“마, 맞다! 아니, 마, 맞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게 정보를 바라거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실 생각이라면 살살 대해 주십시오! 이런 대우는, 서로에게 좋지 않습니다!”
당황해서 소리쳤다.
포로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바라는 그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그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표정을 보였다.
“나는 네게 바라는 것이 없다.”
“……그게 무슨.”
서부 전선에서의 전투.
그때, 니콜라스 백작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아마도, 미처 도망치지 못한 많은 병사가 그들의 포로로 붙잡혔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렇다면.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일까.
크로노스의 포로들에게 적당한 자비를 베풀고, 포로 교환을 유도하여 자신을 믿고 따라 준 사람들의 목숨을 보장하는 것이 옳을까.
사람들이 바라는 지휘관은 그런 이상적인 모습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 천마 백중혁이 살아온 방식에서 지휘관의 역할은 조금 달랐다.
희생한 이들의 목숨이 헛되지 않도록.
확실한 승리를 쟁취하는 것.
적의 손아귀에 들어간 포로들의 목숨을 살리겠다고, 다른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을 생각은 없었다.
척.
목에 검을 댔다.
제크먼 남작이 발악했다.
설마, 이렇게 바로 살의를 보일 줄은 몰랐다.
“하,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드미트리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살려야만. 드미트리의 포로들 또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실을 부정했다.
세상이 말하는 로만 드미트리는.
잔인하지만, 그래도 수하들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서.
포로의 존재를 언급했다.
포로 교환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살려 주길 바랐다.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싸늘한 음성이었다.
“나는 전장에서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서걱.
푸확.
피가 튀었다.
발악하던 제크먼 남작은, 목에서부터 뿜어지는 피에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몸이 꿈틀거렸다. 살기 위해서 애처로운 손길로 출혈을 막아 보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 너머로.
겁에 질린 포로들의 모습이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차갑게 말했다.
“우리는 포로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고로, 이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라.”
* * *
그 시각.
뱀포드 공작은 고성에 도착했다.
식량을 지키기 위해 병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고성 내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무혈입성(無血入城).
성에 들어섰다.
혹시라도 함정이 있을 것을 대비해, 뱀포드 공작이 명령을 내렸다.
“적들이 이미 식량을 모두 불태우고 도망쳤을 가능성이 있다. 식량의 존재를 확인하고, 마법사들은 주변에 마법 트랩이 설치되어 있는지를 확인해라.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병력을 고성 안으로 들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모든 게 완벽하다면.
그건 천운이 아니라, 오히려 함정일 가능성이 컸다.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들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식량을 확보했습니다. 먹어도 문제가 없는 것들이고, 기존에 보유한 식량들과 합친다면 한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마법 트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성 그 어디에서도 마법적인 기운을 발견하지 못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폭발에 반응하는 마법 방어진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만약에라도 적들이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저희가 대응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벌어 줄 것입니다.”
완벽했다.
그래서, 묘하게 불길했다.
뱀포드 공작은 걸음을 옮겨 식량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전쟁 물자들.
그것은 왠지.
자신들에게, 이곳에 머무르라고 배려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