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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화 (271/615)

271화 천마재림 (天魔再臨) (3)

일단 크로노스 제국은 고성에 자리를 잡았다.

30만 대군을 고성 안에 모두 수용할 수 없기에, 주요 병력만 안으로 들이고 나머지는 성 밖에 주둔지(駐屯地)를 형성했다.

그리고 수뇌부들은 곧바로 회의에 소집되었다.

식량의 확보로 우려했던 문제는 해결했지만, 오히려 이상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은 새로운 고민을 낳았다.

뱀포드 공작이 말했다.

“현재 상황에 대한, 너희의 생각을 말해 보아라.”

의견을 물었다.

혼자만의 힘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때는, 집단지성(集團知性)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뱀포드 공작의 유연한 결단은 의견을 받아들이는 태도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간 뱀포드 공작을 모셔 왔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상황이 익숙한 모양인지 차례로 본인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청야 전술을 시도하려다 실패한 것이 아닐까요? 카이로, 드미트리 연합은 서부 전선을 버리면서까지 제국군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했으나, 지휘관님이 적의 전술을 예측한 덕분에 아무런 피해 없이 서부 전선을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적들로서는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고성의 물자를 처리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 의견도 같습니다. 식량을 확인해 본 결과 독과 같은 문제도 없었습니다. 저희가 고성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이곳의 대비는 안일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의견이 통일되었다.

사실, 그게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 전쟁.

전력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크로노스의 강자들과 30만 대군을 앞세운 전력은, 왕국 연합과의 전면전에서 패배할 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상대의 선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면전은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렇다고 시간적인 여유가 허락되는 것도 아니다.

코르타스를 점령했다고 한들 크로노스 제국의 군대는 언제고 서부에 도착할 테고, 그때부터는 승리할 방법이 없었다.

딜레마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승리할 방법은 청야 전술을 활용해 전력이 약화되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리는 것만이 유일한데, 고성의 식량을 확보하면서 일말의 가능성마저 증발해 버렸다.

상식적인 판단 안에서는 크로노스 제국의 완벽한 승리였다.

뱀포드 공작을 따라 수많은 전장을 전전했던 수뇌부들도, 이번만큼은 크로노스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뱀포드 공작은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수뇌부들은 고성의 점령이 신의 한 수라고 말하지만, 애초에 드미트리가 이런 무모한 전쟁을 감행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파악한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정보. 그는 절대로, 가능성이 없는 전쟁에 배팅할 만큼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뱀포드 공작이 말했다.

“만약에. 드미트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우리를 고성에 묶어 두고 정면 대결을 유도하는 것이라면?”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미쳤다고, 크로노스와 전면전을 유도하겠습니까?”

곧바로 반발이 돌아왔다.

고성을 미끼로 크로노스 제국의 발을 묶어 두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었다.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한 번 꼬리를 물기 시작한 의문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로만 드미트리. 대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거지?’

그는 어째서.

드미트리의 힘만으로 전쟁을 선포했단 말인가.

의문의 시작점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머릿속으로 완벽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회의가 모두 끝날 때까지도.

뱀포드 공작의 굳은 표정은, 확신을 얻지 못했다.

* * *

그 시각.

다른 장소에서도, 로만 드미트리에 관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에드윈 헥토르, 레드포드 국왕, 프랑크 국왕.

친 드미트리로 분류되는 이들이 모인 자리에, 프랑크 국왕이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크로노스 제국이 벌써 서부 전선을 무너트렸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님이 라스칼과 코르타스를 점령하는 엄청난 성과를 보였지만, 이대로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저희가 얼른 지원군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움베르토와 오델리아가 크로노스 제국 편에 붙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모호한 태도는 저희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

경악스러웠다.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먼저 선제공격을 감행했고, 라스칼과 코르타스를 차례로 무너트리며 말뿐인 선전 포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샐러맨더 대륙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전쟁의 불길이 빠르게 번져 가는 상황에, 프랑크 국왕으로서는 어떻게든 힘을 보태고 싶었다.

드미트리가 무너지면.

그때는 끝이었다.

친 드미트리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프랑크 왕국은 잔인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에드윈 헥토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은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님은, 드미트리의 힘만으로도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이 전쟁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결단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켜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로만 드미트리님이 정말 결과로써 자신의 말을 증명해 보인다면, 그때는 크로노스 제국을 더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걱정입니다. 크로노스의 뱀포드 공작은, 만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레드포드 국왕이었다.

다들 걱정을 쉬이 내려놓지 못하는 반응에, 에드윈 헥토르는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님이 코르타스의 워프 게이트를 손아귀에 넣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저는 진심으로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특별한 전략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드미트리 공국의 선포식이 있던 날, 드미트리를 찾아갔던 저는 특별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대화의 상대는 크리스였다.

이제는 같은 배를 탄 상황에, 크리스는 에드윈 헥토르가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를 말해 주었다.

“주군이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을 인정하는 말을 몇 번 한 적이 있었습니다. 워프 게이트를 공략하는 과감한 판단은 모두가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려운 문제라고 말입니다. 그때부터 주군은 워프 게이트에 대해 공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를 따로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만큼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의 전략이 감명 깊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단순한 칭찬이었다.

사람들은 기분 좋게 받아들일 만한 말이, 에드윈 헥토르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남부 전선에서의 전쟁은 헥토르의 완벽한 패배였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님과의 대결에서 제 전략은 단 하나도 먹히지 않았고, 살면서 그토록 참담한 기분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님은 ‘압도적인 승리’에서도 본인이 발전할 만한 요소를 찾아 학습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섭습니다. 그때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을 계속해서 채찍질하고 있다는 것이.”

크로노스와 드미트리.

양자택일(兩者擇一)의 갈림길에서, 에드윈 헥토르는 드미트리를 택했다.

단순히 크로노스와 악연이라는 이유를 떠나서, 자신의 경험이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하지 않길 바랐다.

“저는 크로노스 제국보다 드미트리와 적대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 경험은, 살면서 단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믿고 기다리시지요. 완벽하게 승리했다고 판단했던 남부 전선에서 제가 패배했던 것처럼, 그분은 분명히 상황을 뒤엎을 계획이 있을 겁니다.”

믿었다.

자신이 경험했던.

남부 전선의 악마, 그날의 로만 드미트리를.

* * *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순탄했다.

뱀포드 공작이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서부 전선으로 향했기에, 크로노스 동부에 남은 병력으로는 드미트리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크로노스 동부가 로만 드미트리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제는 카이로 영토에 있을 크로노스 제국과의 결전을 앞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충분한 휴식을 명령했다.

그날.

잠자리에 들지 못한 사내가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케빈은 홀로 검을 휘둘렀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상상 속.

오라가 폭발했다.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오라의 폭풍 너머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스벤의 모습이 보였다.

콰앙!

얼굴이 고통에 물들었다.

정면에서 대항했다가, 케빈의 오라가 산산이 부서지며 스벤의 검이 육체를 가르는 통증이 일었다.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단 일격에 케빈의 육체는 통제권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불구가 되어버린 몸으로 스벤과 같은 괴물을 상대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끝났다.

머리가 날아갔다.

스벤과의 대결을 수도 없이 분석했지만, 언제나 결말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만약 전장에서 스벤과 같은 강자를 또다시 만난다면. 나는 주군을 위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

없다.

빈민가 소년에 불과했던 자신이 지금의 경지에 오른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기에, 6성의 오라 검사를 넘보는 것은 과한 욕심이었다.

자신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스벤에게 패배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협공으로 쓰러트렸다는 자체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병상 옆자리에 누워 있던 헨더슨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미칠 듯이 들끓었다.

‘그때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내가 무력하게 무너진다면. 언제나 그랬듯, 내가 감당하지 못한 일을 해결하는 것은 주군의 몫이다. 사람들은 드미트리의 행보에 주군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모두가 주군이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으로부터 비롯되었어.’

검을 휘둘렀다.

가상의 스벤을 소환해, 발악하듯 달려들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넘어지고, 나뒹굴고.

남들은 곤히 잠들었을 시각에, 케빈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날의 기억.

분노가 치밀었다.

통제되지 않는 감정은, 넘을 수 없는 벽에 심마(心魔)를 일으켰다.

“크르르르륵.”

빨갛게 변한 눈.

마음속의 악마에게 완전히 잠식되려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혼란을 파고들었다.

“케빈.”

분명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목소리.

자신이 갈망하는 존재의 부름에, 살의로 번들거리던 눈빛이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 * *

따로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케빈의 방황.

지켜보고 있었다.

코르타스에 합류한 이후로, 케빈이 한순간도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얼굴이 퀭했다.

심마가 무럭무럭 피어올라 안색에서부터 나타나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네게 해 줄 말이 있다.”

그것은 조금.

케빈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얘기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오라’를 분석하면서, 이 세상의 방식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때는 무분별한 분출로 극한의 파괴력을 끌어내는 것도 새로운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바르보사를 비롯한 대륙의 강자들을 상대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다.”

크리스에게 오라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날.

로만 드미트리는 쓰레기 같은 방식이라고 단언했다.

시간이 흐르며 이것 또한 새로운 갈래임을 인정했으나, 바르보사와의 대결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날의 대결은 정면으로 부딪쳐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았다.

세상에 대륙 십이검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얼마나 강한지, 그를 상대로 자신은 몇 번의 검을 발현해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인지.

그런데.

바르보사의 검술은 근본이 없었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있듯, 어떤 방식으로든 검술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데, 바르보사가 오라를 활용하는 방식은 단순히 6성으로 규정하는 파괴력이 끝이었다.

의문이 일었다.

분출에 의한 파괴력이 이들의 근본이라면, 사실 성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중원 무림의 검술은 파괴력만으로 승부를 단정하지 않는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하기도 하며, 각자만의 검술이 꽃을 피워 ‘중원 무림’이라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오라를 활용한 방식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 문명은 감탄할 정도로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오라 검사들의 역사는 빈약하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같잖았다.

그때.

확신을 얻었다.

자신의 검술이 대륙 제일임을.

바르보사를 대륙 십이검에 이름을 올린 그 순간부터, 이 세상에 자신을 상대로 검을 논할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생사가 걸린 싸움에서 오라의 위력은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너는 6성 검사와의 대결에서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마주했겠지만, 사실 그 벽의 존재는 네가 만들어 냈다는 의미다. 만약 오라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힘을 갖춘다면. 네가 3성의 오라 검사에 불과할지라도, 6성의 오라 검사를 쓰러트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케빈의 눈빛에 파문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

새로운 세계였다.

그의 말처럼 스벤을 쓰러트릴 무력을 갖출 수만 있다면, 케빈은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가 되었다.

그런 케빈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가르치려는 것의 이름은, 천마검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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