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천마재림 (天魔再臨) (6)
사람들의 신음성이 들렸다.
바닥으로 번지는 핏물에, 뱀포드 공작은 충격을 받았다.
‘……디에고가 겨우 4성의 오라 검사에게 패배했다고?’
충격적이었다.
백전노장이라고 불릴 만큼 지휘관으로서 수많은 전쟁을 경험한 그는, 대단한 검사는 아닐지라도 검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유했다.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특별한 계획을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대륙 십이검의 일원인 디에고가 크리스를 상대로 패배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열두 개의 검.
수많은 오라 검사 중, 정점(頂點)의 자리에 오른 괴물들이다.
폭발할 듯 들끓는 6성의 오라는, 크리스의 존재를 그대로 소멸시켜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패배했다.
크리스의 공격은 어떻게 시도되었는지 제대로 확인조차 할 수 없었고,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상황에서 갑자기 디에고의 가슴팍에서 피가 튀었다.
애초에 4성의 오라로 6성의 오라를 상대한다는 것부터가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디에고가 비틀거리며 무너지는 모습에,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피를 흘리는 모습에, 뱀포드 공작은 말을 잃은 채로 일련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피가 흘렀다.
움푹 파진 땅에 고이는 핏물은, 디에고가 허무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카이로, 드미트리 연합의 병사들이 열화와 같은 환호성을 보냈다.
그들 또한.
디에고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부터 크리스가 승리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결과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이번 대결을 상식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일격이 승부를 결정했다고 한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크리스가 승리했다는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첫 번째 대결.
드미트리의 승리였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물러나는 크리스의 모습에,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케빈이 나섰다.
‘빌어먹을.’
뱀포드 공작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번 작전에 6성의 검사는 두 명만을 대동했다.
일부는 다른 목적에 동원되었기에, 디에고가 패배한 현시점에서 마음 같아서는 한니발을 내세우고 싶었다.
한니발은 같은 6성이어도 차원이 다른 존재다.
그라면 3성 검사라고 알려진 케빈을 쓰러트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이미 그와 관련한 발언을 내뱉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말을 번복하는 것.
크로노스의 위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뱀포드 공작은 분노를 삼키며, 한 이름을 불렀다.
“블랑코.”
“예.”
40대 초반의 사내.
거대한 체구에 각진 얼굴이 인상적인 사내가, 뱀포드 공작의 부름에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상대는 겨우 3성 검사다. 미리 경고하는데, 만약 저 녀석을 상대로 패배하는 순간 네 가족을 모조리 몰살할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패배는 용납되지 않는 싸움이다. 하지만 크로노스 제국의 이름을 드높이고 돌아온다면, 그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해 주겠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긴장한 기색을 보였지만, 블랑코로서는 자신이 있었다.
눈앞의 상대는 정말.
어떻게 대전사로 선정되었는지 의심이 생길 만큼, 너무나도 약해 보였다.
* * *
앞으로 나섰다.
“나는 블랑코다.”
이름을 밝히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케빈은 서 있는 채로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예민한 감각으로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고 뭉그러진 목소리였다.
블랑코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신은 크로노스 랭킹 7위에 달하는, 6성의 경지에 오른 최상위 여섯 명의 검사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존재였다.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어야 할 상황에,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은 케빈의 모습은 분노에 불을 붙였다.
“말이 필요 없다 이건가.”
척.
검을 들었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오히려, 승리가 간절한 블랑코가 바라는 일이었다.
타닥.
콰르르르르릉.
땅을 박찼다.
오라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순식간에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고, 블랑코는 처음부터 봐주지 않겠다는 듯이 5성의 오라를 일으켰다.
그때까지도 케빈은 움직이지 않았다.
코앞에 들이닥친 블랑코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빨갛게 번들거리는 눈빛이 블랑코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격렬한 충돌이 일었다.
케빈은 5성의 오라가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략함과 동시에, 검을 살짝 틀면서 상대의 품을 파고들었다.
블랑코로서는 짜증이 치미는 상황이었다.
겨우 3성의 오라로 자신의 공격을 막은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자신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이 치고 들어오는 움직임은 심기를 건드렸다.
“어딜!”
콰르르르릉.
검이 번뜩였다.
빠르게 회수되는 검이 케빈을 공격했고, 순식간에 여러 차례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틈이다.’
케빈의 가슴이 열렸다.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뻗는 순간, 블랑코는 당황스러운 광경을 목격했다.
케빈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결과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고민은 짧았다.
본인이 케빈보다 빠르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광기에 차오른 눈빛을 보자 무모한 선택은 할 수 없었다.
팟.
공격을 피했다.
예상대로 케빈은 물러나지 않았고, 블랑코는 공격을 맞받아치며 스치듯 케빈의 팔뚝을 베었다.
서걱.
손맛이 느껴졌다.
분명히 피가 튀었는데, 케빈의 표정은 고통에 일그러지지도, 그렇다고 겁을 먹고 한발 물러나는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케빈은 마치 죽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처럼, 블랑코가 검을 회수하는 그 과정이 오히려 기회라는 듯이 득달같이 치고 들어왔다.
팟.
머리를 베자.
케빈은 살짝 피하며 오히려 가슴을 노렸다.
팟.
블랑코는 한 발 뒤로 물러나며 가슴의 공격을 흘려보냈고, 오라를 폭발시키면서 똑같이 가슴을 노렸다.
오라가 결렬한 충동을 일으켰다.
오라 특유의 격한 반발력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 블랑코는 상대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공격을 막아 낸다는 사실을 알았다.
번뜩.
고개를 틀었다.
케빈의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이렇게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을 막아 냄과 동시에 과감하게 공격을 뻗는 케빈의 판단은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5성의 오라와 대적하는 3성의 오라. 그리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과감함.
왜 사람들이, 겨우 3성의 오라 검사를 드미트리의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내 상대는 아니다.’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격렬한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상대의 힘이 사그라졌다.
어떻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고는 있으나, 압도적인 파괴력의 차이는 상대를 서서히 무너트렸다.
명백히 유리한 싸움이었다.
블랑코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목숨을 도외시하는 케빈을 차근히 무너트리고자 마음먹었다.
이런 미친 녀석을 상대로는 무리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무리 승리했다고 한들, 자신도 신체 하나를 잃어버린 불구가 되어 버린다면 검사로서의 생명이 끝날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팟.
검이 스쳐 지나갔다.
빗나간 공격이었다.
곧바로 반격하려는 그때,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려, 블랑코! 궁지에 몰렸잖아!”
뱀포드 공작이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상황에, 블랑코는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승부.
한 발.
두 발.
세 발 물러나며 상대의 공격을 맞받아치던 그는.
‘……이게 무슨?!’
어느새.
병사들이 바로 뒤에 있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 * *
잠식(蠶食)의 경지.
머리가 팽팽 돌았다.
광기에 완전히 물들면서도, 케빈은 이 상황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나는 6성의 검사를 바랐어. 네 녀석 따위가 아니라, ‘그때 그 녀석’과 같은 6성의 검사를 바랐다고.”
그 말에.
블랑코는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혼잣말하듯 말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 며칠.
로만 드미트리의 가르침은 케빈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오라의 본질을 깨닫는 과정만으로도 경악스러운 그 순간에, 로만 드미트리가 말한 ‘천마검법’의 존재는 그야말로 황홀했다.
그렇게 천마검법 전반부 삼초식을 배웠다.
천마신공은 귀혼마공을 배운 그가 터득할 수 없는 영역이었고, 귀혼마공을 기반으로 한 천마검법은 전반부만 사용하더라도 몸에 한계가 올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날.
강력한 힘을 손에 쥐었다.
이전과는 달라진 상황에,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6성의 검사를 상대로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블랑코가 나섰다.
못마땅했고, 화가 났다.
일부러 몸을 내주면서까지 상대를 궁지에 넣은 케빈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세 번을 공격하겠다. 그 공격을 모두 막아 낸다면, 패배를 시인하고 목을 내주마.”
상대는 궁지에 몰렸다.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을 터.
블랑코가 분노했다.
케빈의 발언은, 마치 본인을 한 수 위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건방…….”
그때였다.
‘천마검법 전반부 일초식.’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했다.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서 시도되는 공격에, 블랑코도 황급히 오라를 일으키며 대항했다.
콰앙!
콰콰콰콰쾅!
엄청난 충격이 일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그대로 나가떨어졌고, 블랑코는 단번에 마나가 소멸되는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다.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3성의 오라 검사라면, 세간에 알려진 케빈의 정보대로라면. 케빈이라는 존재가 이와 같은 무지막지한 위력의 공격을 사용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천마검법 전반부 이초식.’
콰르르르르르르릉.
다음 공격이었다.
케빈이 말한 2번째.
심상치 않은 기운에, 블랑코는 이를 악물며 전력을 끌어올렸다.
스스로를 믿었다.
힘과 힘의 대결에서, 겨우 3성의 검사에게 쓰러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콰직.
오라가 부서졌다.
5성의 오라에 균열이 일어나며,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진 균열에 오라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쨍그랑.
그게.
블랑코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아직 두 번째 공격에 불과하건만, 오라를 찢으며 치고 들어온 공격이 그의 몸을 베었다.
“크아아악!”
푸확.
피를 흩뿌렸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세 번의 공격.
그중 두 번째.
케빈은, 전력을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 싸늘한 눈빛으로 블랑코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말했잖아. 난 6성의 검사를 바랐다고.”
번뜩.
목을 날려 버렸다.
하늘 위로 떠오른 머리.
그 너머로, 경악으로 얼룩진 뱀포드 공작의 얼굴이 보였다.
* * *
디에고의 패배.
억지로 이해했다.
스피드로 승부를 본 크리스의 검술은, 오라의 차이를 무시할 만큼의 강점을 보였다.
하지만.
블랑코의 패배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케빈의 검에서 휘몰아친 오라는 너무나도 파괴적이었고, 단순히 힘과 힘의 대결에서 3성의 오라가 5성의 오라를 그야말로 압도해 버렸다.
뱀포드 공작으로서는 상식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를 불문하고,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케빈.
그의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방금의 공격은 그에게도 후유증이 있는 것 같았지만, 승자가 그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승부는 끝났다.
드미트리의 승리.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뱀포드 공작은, 엄청난 굴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로만 드미트리. 대체 무슨 개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전사 전투의 결과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 짓지는 않는다.”
현실을 부정했다.
악에 받쳐 소리치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에.
확신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전면전을 바라고 있었다.
크로노스 제국, 왕국 연합 등 대륙의 모든 사람이 그건 아니라면서 현실을 부정했지만, 이 미친 녀석은 애초에 크로노스와의 정면 대결로 승부를 보려는 생각이었다.
같잖았고, 동시에 감탄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대전사 전투의 결과로 상황을 반전시켰다는 사실이.
로만 드미트리는 진짜였다.
그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순간, 30만 대군조차도 패잔병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뱀포드 공작이, 승부수를 걸었다.
“전군(全軍)은 들어라! 비록 대전사 전투에는 패배했으나, 이것은 로만 드미트리가 승기를 가져가려는 개수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적들을 압도할 만큼의 전력을 갖추고 있다. 30만 대군과 8서클 마법사인 셰피르님의 존재는, 우리가 패배할 단 1퍼센트의 확률도 허락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믿어라. 제국을 믿어라. 제국을 위해 목숨을 건다면, 너희는 언제나 승자일 것이다.”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보통 대전사 전투가 끝나면 텀을 가지는 편이다.
하지만 패배한 상황에서, 적들이 평야 위에 나타난 지금과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전군, 공격하라!”
“공격하라!”
명령이 떨어졌다.
벼락같은 그 말에.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단 한 번의 연설이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열병처럼 번지는 분위기에 그들은 승리에 대한 확신을 보였다.
크로노스!
무적의 군대!
그들이 밀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왕국 연합의 병사들은 다급하게 무기를 들었다.
그때였다.
사람들을 지나.
케빈을 지나.
로만 드미트리가 앞으로 걸어갔다.
따라나서려는 케빈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고생했다. 지금부터는 내 차례다.”
이번 전쟁.
사람들의 말처럼 무모했다.
하지만 천마 백중혁으로서 살아가며.
그가 살아온 삶에, 단 한 번도 평탄했던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슥.
검을 들었다.
중원 무림은 말했었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천마를 대표하는 9번의 검술이 있다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9번의 걸음이 있다고.
로만 드미트리는 현생의 삶을 살아가면서, 심법과 보법, 검술이 하나가 되는 전력을 단 한 번도 발현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몰려드는 적들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첫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드디어.
진정한 천마가, 현생에 재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