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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화 (278/615)

278화 크로노스의 진실 (2)

당혹스러운 광경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순백(純白)의 존재도, 그녀가 발휘하는 성스러운 힘도.

사람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그때, 순백의 기사를 필두로 일단의 병력이 나타나 전장을 휩쓸었다.

“악의 무리를 처단하라!”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수백의 검사들.

그들이 모두 오라를 발현했다.

처음에는 적아(敵我)를 구분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제국군을 도륙하는 그들의 모습에 상황을 파악했다.

어디에서 나타난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은 크로노스 제국을 악의 무리로 규정하며, 수십 만의 적들을 상대로 거침없는 모습을 보였다.

“크억!”

“악!”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하얗게 일어나는 오라는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을 단숨에 베어 버렸고, 뒤늦게 대항하는 적들의 반항은 의미가 없었다.

전세가 단번에 기울었다. 의문의 존재들이 수십 만의 병력을 압도했다.

그들의 뒤에서.

순백의 기사가 따라 걸으며 소리쳤다.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분명히 경고했었다. 인간에게 허락되는 권한을 넘어 대륙을 어둠으로 물들이려 한다면, 우리로서는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다고. 하지만 너희는 결국, 대륙 정벌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건드려서는 안 될 힘을 받아들였다.”

화르르르르륵.

오라가 타올랐다.

순백의 오라는, 그녀의 존재감을 물들였다.

“신의 이름으로, 악의 무리를 처단하겠다. 블레스(bless).”

팟-

콰르르르르르르릉.

빛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것은 축복이었다.

그녀를 따르는 검사들뿐만 아니라, 드미트리와 카이로 연합의 병사들도 몸을 회복하는 의문의 힘에 눈을 부릅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크로노스 제국의 적이라는 사실을 직접 언급한 지금, 크리스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병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앞으로 치고 나갔다. 성스러운 힘을 발현하는 존재들을 아군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도와 크로노스 제국을 공격했다.

그때부터.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애초에 일당백(一當百)의 무력에 고전했던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체력을 단번에 회복한 드미트리 병사들의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순백의 기사를 따르는 검사들의 힘이 압도적이었다.

눈으로 빨려드는 일련의 상황에, 뱀포드 공작은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게 대체.’

이번 전쟁.

상상치도 못했던 전개였다.

순백의 기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처리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셰피르’는 로만 드미트리 때문에 모습을 감추었다.

아직도 크로노스 제국은 압도적인 병력을 갖추었다. 머릿수로는 명백한 우위였지만, 돌아가는 상황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전멸을 피할 수 없다.’

이를 악물었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는 자존심을 위해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멍청한 지휘관이 아니었다.

“전군 후퇴하라! 고성으로 후퇴해, 후일을 도모할 것이다.”

퇴각.

이례적인 명령이었다.

후퇴를 모르는 크로노스 제국이, 불리한 전세에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병력이 빠르게 물러났다.

고성.

작지만, 그것도 성이다.

고성에서의 수성을 택한다면, 크로노스 제국의 후속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판단했다.

뱀포드 공작으로서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패배로 인한 문책을 당할지라도, 수십만의 병력을 모두 잃은 참담한 패배보다는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달한 뱀포드 공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성벽 위.

펄럭이는 드미트리의 깃발 아래로, 화염을 일으키는 한 존재가 보였다.

그게 펠릭스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빌어먹을.”

뱀포드 공작은,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 * *

전략을 완성하는 것은 디테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정면 대결로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치겠다는 말에, 플로라 로렌스는 한 가지를 덧붙였다.

“정면 대결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고성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승리한다면 크로노스 제국은 고성을 최후의 보루로 택할 확률이 높고, 패배한다면 고성을 통해 적의 후방을 노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지금부터 고성의 식량을 순순히 내주는 대신에, 적들이 절대 찾아낼 수 없는 고성의 땅굴을 활용해 숨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된다면. 고성을 확보한 뒤에 성문을 열고 적들을 공격할 것인지, 아니면 고성으로 도망치는 적들의 퇴로를 막을 것인지 선택하면 됩니다.”

로만 드미트리를 믿었다.

다만,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참모의 역할이었고, 플로라 로렌스의 전략은 모두의 지지로 채택되었다.

성스러운 존재.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하지만 크로노스 제국이 고성으로 퇴각하는 지금, 고성의 병력은 본인들의 역할에 충실했다.

“파이어 레인(Fire Rain).”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펠릭스가 화염의 마나를 일으켰다.

수성에서 절대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그의 마법에,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불길이 지상을 불바다로 물들였다.

콰앙!

화르르르르르르르륵!

“크아아아악.”

고성으로 향하던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불타오르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그 뒤로 따라오던 병사들은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앞에는 고성을 점령한 피닉스의 마법사들이, 뒤에는 성스러운 기사들을 필두로 한 드미트리, 카이로 연합의 병사들이 공격했다.

완전히 궁지에 몰려 버렸다.

고성이 함락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면 미리 준비라도 했을 텐데, 공성에 필요한 물자를 하나도 갖추지 못한 그들로서는 성벽 위에서 떨어지는 마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사이에, 병사들이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다.

“적들이 궁지에 몰렸다!”

“모두 죽여라!”

벼랑 끝에 몰렸다.

앞뒤로 들이닥치는 공격에,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얼굴로 발악하듯 대항했다.

수십만.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전의를 상실한 순간, 패배는 현실이 되었다.

“물러나지 마라! 우리는 크로노스다! 크로노스는,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뱀포드 공작.

그가 발악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는 것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패배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뱀포드 공작은 직접 검을 들고 적들을 상대하다, 눈먼 화살에 눈을 부릅떴다.

퍽!

“크윽.”

심장을 관통한 화살.

피가 번졌다.

흐릿해지는 시야에, 그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번 전쟁.

모두가 승리를 확신했던 드미트리와의 전쟁은, 크로노스 제국의 완벽한 패배였다.

* * *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패색이 짙어지고, 지휘관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는 순간,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은 압도적인 병력을 갖추었는데도 승리에 대한 희망을 놓아 버렸다.

그때부터는 혼란에 빠졌다.

일부는 살기 위해 사방으로 도망쳤고, 일부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으며, 일부는 크로노스 제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발악하다가 앞선 두 부류의 결단을 유발하는 죽음을 맞이했다.

끝났다.

치열했던 전쟁.

그 끝이 승리라는 사실에, 카이로와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승리의 기쁨을 내질렀다.

“우리가 승리했다!”

“드미트리여, 영원하라!”

“로만! 로만!”

“로만! 로만!”

그들이 연호하는 이름.

로만 드미트리.

승리는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가 한니발과 크로노스의 기사들, 그리고 8서클의 마법사인 셰피르를 처리하지 않았다면 성스러운 존재가 나타났다고 할지라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리에 없다는 사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신뢰하는 존재는, 분명히 다시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열광적인 환호로 물든 자리.

크리스는 피로 흠뻑 물든 얼굴로 한 인물에게 다가갔다.

이질적인 존재였다.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전장에서, 순백의 기사는 일반적인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가 물었다.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대체 어디에서 오신 분입니까?”

순백의 기사.

의문의 존재였다.

샐러맨더 대륙에 그녀와 같은 존재가 있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는데, 그녀의 발언은 크로노스 제국과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발현하는 힘은,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검사들은. 감춘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존재였다.

순백의 기사가 크리스를 보았다.

아름다웠다.

새하얀 피부에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의 머리칼은, 외모만으로도 인간임을 의심할 정도였다.

그녀가 말했다.

“저는 끝없는 산맥 너머,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유일(唯一)한 인간들의 나라. 루나(Luna)의 여왕인 이사벨입니다.”

아르카디아.

루나.

이사벨.

예상치도 못한 단어의 연속에, 크리스는 놀란 반응을 보였다.

* * *

셰피르가 죽고.

통로가 열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통로로 들어서자, 전장 한복판이 아니라 끝없는 산맥 초입에 있었다.

일단 드미트리로 복귀했다.

마법 통신을 통해 이사벨의 존재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인한 로만 드미트리는, 이사벨이 자신과 만나길 바란다는 말에 카이로스에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아델리안의 워프 게이트가 아니었다.

드미트리를 떠나기 전,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드미트리의 도서관.

그곳에서 고서(古書)를 찾았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었는데, 여러 고서를 확인한 끝에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했다.

[막시밀리안]

-샐러맨더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방랑 검사. 5성의 오라 검사였던 그는 대륙을 전전하며 강자라고 불리는 이들을 상대했고, 크로노스 황제의 눈에 들어 출셋길에 올랐다. 그때, 막시밀리안(Maximilian)의 성을 얻은 그는 막시밀리안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크로노스 제국을 위해 이바지했다. 그리고…… 한때 크로노스 랭킹 1위에도 올랐던 그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평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한 인물의 행보였다.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 어떻게 살았는지, 고서에는 그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주목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막시밀리안 백작.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 이름이 탄생하기 전, 고서의 한 부분에는 그의 진짜 이름을 말했다.

-막시밀리안 백작. 그의 본명은 스벤이다.

스벤.

드미트리를 공격했던 그림자.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만약 스벤만 언급되었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그림자들의 연관성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미스틱]

-그는 의문의 존재다. 공간을 다루는 마법을 발전시키며 대륙에 새로운 파란을 일으켰지만, 사람들의 관심과는 다르게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한때 그와 같이 연구했던 마법사가 말하길, 그의 이름은 바로 ‘미스틱’이라고 했다.

[엘링턴]

-오랜 옛날. 크로노스 제국, 엘링턴(Ellington) 가문의 장자로 태어난 그는 대륙의 마법사들이 인정하는 마법의 천재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마법의 진리를 깨우치며 크로노스 제국이 마법적으로 발전하는 것에 큰 역할을 했지만, 미스틱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 인해 크로노스 제국에는 말이 많았다. 항상 ‘마법사들의 실종 사건’은 역사적으로 반복되던 일이었고, 현재에 이르러 명확한 증거 자료가 남지 않아서 엘링턴의 존재 자체에 의문이 따라붙기도 했다. 엘링턴 가문 또한, 장자의 실종 이후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의 본명에는 많은 추측이 있었고, 셰로니, 셰르페, 셰피르 등, 여러 이름이 그의 본명으로 거론되었다.

미스틱과 셰피르.

그들도 고서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림자들의 존재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서에 기록될 만큼 역사적인 행보를 보인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인해 지금까지 ‘그림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셰피르의 기억을 읽으며 네 명의 이름을 알아냈는데, 마지막 한 이름은 로만 드미트리를 충격에 빠트렸다.

대체.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마지막 이름은, 고서가 아니라 가장 휘황찬란한 책에 당당하게 첫 페이지에서부터 정체를 밝혔다.

[알렉산드르(Aleksandr) 황제]

오라의 창시자.

그가, 로만 드미트리가 찾던 마지막 이름이었다.

* * *

그 시각.

번뜩.

크로노스 황제가 눈을 떴다.

잠에서 일어난 그는, 밀려오는 통증에 표정을 찌푸렸다.

“……거기 누구 없느냐. 누가 없냐고 물었다!”

메말라 갈라진 목소리.

얼굴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총명(聰明)함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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