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크로노스의 진실 (3)
갑작스러운 회의 소집.
멤피스 후작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은 크로노스 황제의 불호령을 걱정했다.
‘방금 전달된 소식에 의하면, 뱀포드 공작의 30만 대군이 드미트리를 상대로 대패(大敗)를 당했다.
한니발을 비롯한 크로노스의 기사들이 모도리 도륙당했으니, 크로노스 황제 폐하의 분노가 대단하겠지.’
‘빌어먹을 뱀포드 공작. 승리를 확신하더니, 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결과야?!’
그들은 아직.
전장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홀로 수많은 병력을 도륙하고, 루나 왕국의 여왕인 이사벨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다면 뱀포드 공작의 지휘 능력을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크로노스가 처참하게 패배하는 굴욕을 맛보았다.
평소에 제국의 권위를 넘보는 그 어떠한 일도 허락하지 않는 크로노스 황제로서는, 이번 전투의 결과에 엄청난 분노를 토해 낼 것이 분명했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하인의 말.
회의실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런데 호위를 받으며 등장한 크로노스 황제는, 이상하게도 평소와는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
무심한 표정과 잔인한 언행.
크로노스 황제의 평소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확인한 그의 모습은 묘하게 생동감이 있었다.
같은 인간인지 의심이 생길 만큼의 무심한 표정을 보이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선 그는 고위 귀족들과 시선을 마주치며 강인한 느낌을 보였다.
이질감이 일었다.
대체 무엇이 바뀌었는지 특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외형을 비롯한 모든 것이 그간의 모습과 똑같은데도 이질감을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었다.
크로노스 황제가.
상석에 앉았다.
고위 귀족들의 인사를 받은 그는, 패배의 문책이 아니라 뜬금없는 얘기를 말했다.
“이번 전쟁은 부당한 이유로 시작되었다. 나는 그 책임을 통감하고, 휴전(休戰)을 선언할 것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황제 폐하.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드미트리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고는 하나, 이미 일부 병력이 작전을 위해서 움베르토와 오델리아 왕국으로 향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휴전이라니요. 건방진 드미트리를 처단하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당황했다.
평소라면 감히 반문하지 못했을 텐데, 이해할 수 없는 결단에 반발하는 반응을 보였다.
당연했다.
크로노스 제국은 대륙 정벌을 꿈꾸고 있고, 이번 전쟁은 그 시발점이었다.
서부 전선에서의 패배는 단 한 번의 전투일 뿐이다.
드미트리에 시선이 집중된 사이에 다른 작전들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상황을 반전시킬 가능성은 충분했다.
휴전은 있을 수 없었다.
강한 반발에, 크로노스 황제가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항명(抗命)하겠다는 것이냐.”
그 말에.
모든 불만이 정리되었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멤피스 후작조차도, 항명이라는 단어 하나에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들어, 휴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휴전.
아직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예상치도 못한 전개가, 그렇게 크로노스 황실에서 결정되었다.
* * *
카이로스.
서부 전선으로부터 날아온 승전보(勝戰報)에, 카이로의 수도는 축제의 분위기였다.
워프 게이트를 통해 이동한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드미트리 공국의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루나 왕국의 국왕, 이사벨입니다.”
이사벨.
독특한 존재였다.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아우라에, 로만 드미트리는 본론을 물었다.
“그간의 상황에 관해서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크로노스가 감추고 있는 진실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들과의 전쟁에서 ‘그림자’라고 불리는 부류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들이 고서에 나오는 역사적인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벤, 미스틱, 셰피르, 그리고 알렉산드르까지. 현세에 존재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은, 크로노스 제국이 ‘흑마법’을 다루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물어볼 것은 많았다.
크로노스와 루나의 관계.
그리고 진실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방관했던 이사벨의 존재까지도.
많은 물음이 함축되어 있는 질문에, 이사벨은 로만 드미트리의 눈을 마주 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간의 일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대로 내려오는 신탁(神託)에 대해서 알고 계셔야 합니다. 신탁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세상의 문(門)이 열렸습니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차가운 기운이 세상을 얼어붙게 했고, 세상에 남겨진 재앙은 영원토록 지속되었다고 신탁은 말합니다. 실제로 그 신탁이 내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끝없는 산맥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수가 얼어붙었습니다.”
이사벨의 말.
드워프가 했던 얘기였다.
드워프도 그녀와 비슷한 맥락으로, 세계수가 얼어붙어 아르카디아가 죽어 가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사벨은, 드워프와는 달리 ‘진실’에 근접했다.
“신탁에서 말하는 재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추위? 병균? 죽음? 모두 아닙니다. 재앙은 세상의 문을 통해 샐러맨더 대륙에 떨어진, 한 인간의 존재를 뜻합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탐욕스러운 야망을 지닌 인간은 크로노스 제국을 먹어 치웠고, 어둠의 힘을 받아들여 순식간에 몸을 부풀렸습니다. 우리가 그 존재의 행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그렇기에 선조들은 수호자(守護者)의 역할을 맡아 그가 활개 치지 못하도록 통제했지만, 지금은 더는 막을 수 없을 만큼 강해지고 말았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얘기였다.
차원을 넘어온 인간이라니.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의 삶을 살아가기 전에 천마 백중혁이라고 불렸기에, 이사벨의 설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예전부터 생각했었던 문제였다.
차원을 넘어온 존재가 과연 자신이 처음일까? 만약 이전에도 자신과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그 존재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의문은 끝을 맺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라 불리는 자신처럼,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는 이상 차원의 비밀은 알아낼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물었다.
“그 존재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알렉산드르. 오라를 창시한, 크로노스 제국의 황제입니다.”
경악스러운 진실이었다.
알렉산드르.
그가 차원을 이동한 존재였다니.
그렇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알렉산드르 황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샐러맨더 대륙의 사람들은 마나를 마법사의 전유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모든 체계를 바꾸었다. 그로 인해 오라 검사가 탄생했고, 기사들은 강력한 힘을 얻었다.’
고로.
높은 확률로, 차원을 이동한 존재는 처음부터 마나를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말인즉.
‘그는 나와 같은 중원 무림의 출신일 수도 있다.’
가설에 불과한 생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시선에, 이사벨이 확신을 주었다.
“알렉산드르 황제는 다른 차원의 영혼이 빙의(憑依)한 존재입니다. 처음 그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대대로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황제는 본인을 크로노스 황실의 핏줄이 아니라 ‘김판석’이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이 본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진실입니다.”
김판석.
확실해졌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 아니.
천마 백중혁과 같은 ‘중원 무림’에서 흘러들어 온 존재였다.
* * *
음침한 공간.
이곳에서 의문의 존재는 드미트리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무릎을 꿇은 미스틱을 향해 의문의 존재는 분노를 드러냈다.
“그래서, 크로노스 황제가 휴전을 선언했단 말이냐.”
“예. 아무래도 링크(link)가 끊기는 바람에, 잠시 육체의 통제권을 빼앗긴 것 같습니다.”
“끈질긴 녀석. 대대로 크로노스 제국의 황제들은 나의 통제를 따라왔다. 그런데 이번 황제는 5성의 오라를 각성한 만큼 좀처럼 의식이 소멸하지 않는구나. 하지만 상관없다. 셰피르로 인한 충격으로 링크가 해제되었지만, 그가 버틸 수 있는 것은 길어야 하루 이틀일 것이다.”
“알렉산드르 님. 로만 드미트리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알렉산드르.
미스틱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알렉산드르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로만 드미트리.
너무나도 큰 문제였다.
처음에 그가 나타났을 때는 단순히 귀찮은 장애물 정도로 생각했는데, 셰피르의 ‘눈’을 통해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설마 했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사용하는 힘은, 자신과 같은 중원 무림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힘인지는 알지 못했다.
알렉산드르.
정확히 김판석은.
중원 무림에서 살았던 시절, 무공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에 불과했다.
* * *
그건 우연이었다.
김판석.
십만대산 아래에서 살아가는 일반 평민에 불과했던 그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산에 올라 나물을 캤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에 먹구름이 일었다.
신이 진노하듯 하늘은 무언가를 빨아들였는데, 김판석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실수로 하늘에 같이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일어나 보니.
사람들이 그를 ‘알렉산드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김판석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이곳이 중원 무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곧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판석으로 살아갔을 시절에는 매일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빈민에 불과했는데, 알렉산드르의 삶은 너무나도 화려했다.
황제의 아들이라는 신분.
매 순간이 행복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렸고, 모두가 자신에게 아첨하기 바빴다.
욕심이 일었다.
황가의 핏줄로서, 자신에게 허락되는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한계에 부닥쳤다.
알렉산드르는 적자(嫡子)가 아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따위가 출신의 한계를 뚫고 황제의 자리를 거머쥘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는 전생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샐러맨더 대륙의 사람들은 ‘무공’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만약 자신이 삼류 무공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을 것이 분명했다.
마나를 육체적으로 발현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혁명이었다.
문제는 머릿속에 일말의 지식도 없다는 것이었고, 김판석은 매일 방에 틀어박혀서 전생의 기억들을 떠올리기 위해서 아득바득 노력했다.
무림인.
일반인들이 흔히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느 날, 김판석은 고개를 조아리며 한 존재를 찬양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천마재림 만마앙복(天魔再臨 萬魔仰伏)!”
“천마재림 만마앙복!”
만약.
자신이 모두가 우러러보는 저 존재였다면.
알렉산드르로서의 삶은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화가 났다.
김판석은 빈민가를 전전하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삶을 살았지만, 알렉산드르로 태어난 지금은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싶었다.
황실에서의 삶은 갈망을 일으켰다.
갈망은 탐욕이 되었고, 전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을 누리고 있는데도 그는 항상 더 많은 것을 바랐다.
기억을 되새겼다.
그러다 문득, 길을 지나가던 삼류 무인이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무공은 간단해. 체내의 기운을…….”
그의 말.
그때는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게 옳은 방법인지, 잘못된 방법인지.
김판석은 진실을 알지 못했지만, 알렉산드르의 삶을 반등하기 위해서 전생의 기억을 붙잡았다.
처음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노예들을 불러들여 실험을 진행했고, 그렇게 죽어 나간 노예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을 때, 김판석은 마나의 기운이 오라를 형성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거다!”
그날.
오라의 창시자, 알렉산드르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그게 바로, 현재 모두가 진리처럼 여기는 ‘오라’의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