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0화 (280/615)

280화 크로노스의 진실 (4)

오라(aura)라 명명한 힘.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알렉산드르의 행보에 샐러맨더 대륙이 난리가 났고, 후계 순위에서 밀리던 그가 단번에 실세로서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알렉산드르를 ‘검사들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투구를 눌러쓰고 마법사들을 대신해서 희생하는 이미지가 강했던 검사들이, 알렉산드르가 일으킨 혁명에 검사로서의 꿈을 꾸었다.

새로운 방향성.

대격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더는 마법사뿐만 아니라, 오라 검사와 같은 새로운 미래를 말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꿈만 같았다.

알렉산드르는 최초의 오라 검사로서 승승장구하는 나날을 보냈는데, 어느 날 마법사와 오라 검사의 대결이라는 주제가 화두에 올랐다.

그 결과. 실제로 벌어진 대련에서, 오라 검사들은 마법사들을 상대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오라의 위력은 폭발적이나 지속성이 떨어졌고, 마법사들의 날랜 움직임을 따라잡을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한들, 공간 자체를 이동해 버리는 ‘블링크’와 같은 마법을 당하고 나면 오라 검사로서의 회의감이 일었다.

그제야.

현실이 보였다.

적어도 알렉산드르가 기억하는 중원 무림의 무공은, 마법사들에게 당할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내가 발명한 오라는 겉핥기식으로 완성한 결과물에 불과해. 언제고 오라의 하찮은 진실이 바닥을 드러낼 테고, 높은 경지로 올라갈수록 마법사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겠지. 너는 김판석이 아니라 알렉산드르다. 양손 가득 쥐고 있는 부와 명예를 영원히 잃지 않기 위해서는,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해야만 한다.’

십만대산 아래에서 살아가며.

소문으로 전해 들었던 무공은 신의 영역에 닿았다.

한 번의 검술에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압도적인 무력은, 자신이 발명해 낸 오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마법은 달랐다.

그들의 힘은 천재지변과도 같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수록 알렉산드르는 권력을 잃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점차 강해졌다.

그는 빈민이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기에, 손에 쥔 그 어느 것도 놓치기 싫어하는 욕망이 미친 듯이 들끓었다.

때마침.

그와 후계 자리를 경쟁하던 존재는 마탑의 힘을 등에 업었고, 알렉산드르로서는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만 했다.

계속해서 ‘오라’를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단순히 크로노스 제국뿐만 아니라, 샐러맨더 대륙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할까.

욕망은 집착이 되었다. 광기로 변해 버렸고, 알렉산드르는 어두컴컴한 하늘을 바라보며 새로운 미래를 마주했다.

-나를 따른다면, 네게 힘을 주겠다.

악마의 속삭임.

그날.

알렉산드르는 검을 버렸다.

모두가 그를 오라의 창시자로 기억했지만, 왕좌에 올랐을 시절의 그는 검사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 * *

미스틱이 재차 물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는, 반드시 처단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의 말.

동의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의 반란에 이어, 레드포드 왕국, 그리고 이번 전면전까지 크로노스 제국의 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문제는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과 같은 ‘차원 이동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떠오르는 순간.

그의 가슴 깊숙이, 그로서도 알지 못했던 욕망이 고개를 내밀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나와는 달리 진짜 무공을 알고 있는 것이냐.’

늘.

머릿속으로 꿈꾸었다.

자신이 무공을 제대로 연마했던 사람이었다면, 어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알렉산드르로서 새로운 파란을 일으킬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에 이르러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르며 그의 심장에는 어둠의 마나가 흘렀지만, 그래도 무공에 대한 갈망은 남아 있었다.

직접 보고 싶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그가 터득한 무공의 근본은 어디에 있으며, 만약에 그게 구파일방과 같은 소위 상위 문파의 무공이라면 알렉산드르는 욕심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갈증이 일었다. 무림은 그의 머릿속에서 환상 속의 동물처럼 자리를 잡았다.

지금에 와서 무공을 안다고 할지라도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마법을 택한 것이 옳았는지 정도는 확인해 보고 싶었다.

고개를 조아리며.

그도 천마재림 만마앙복을 외쳤다.

그때 자신이 우러러보았던 존재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그의 이상(理想)으로서 존재했다.

그렇기에.

진심을 삼켰다.

자신이 따르는 존재에게, 진실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알렉산드르가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처단하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가 셰피르를 쓰러트린 이상, 로만 드미트리는 일방적인 방법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미스틱. 우리가 바라는 목표는 대륙을 정벌하고, 이 세상을 크로노스의 손아귀에 넣는 것이다. 그때가 된다면 우리는 불멸(不滅)의 존재로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겠지. 조급할 필요는 없다.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가 위협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하나, 기껏해야 오라 검사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다. 네가 판단하기에, 내가 직접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한다면 패배할 것 같다고 생각하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미스틱 이전의 세대에.

셰피르가 존재했다.

그리고 셰피르조차 범접할 수 없는 세대에, 알렉산드르는 괴물처럼 살아남아 지금까지 존재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이미 신(神)의 경지에 도달했다.

미스틱을 비롯한 그림자들은 크로노스 황제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크로노스 황제의 몸을 통해서 명령을 내리는 알렉산드르를 향해 충성심을 보였다.

그림자들에게 알렉산드르는 오라의 선구자가 아니었다.

불멸로 이끌, 이미 인간으로서의 새로운 길을 증명한 그런 존재였다.

“크로노스 황제는 이미 휴전을 명령했다. 황제의 명령을 번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일단은 흘러가는 대로 상황을 진행토록 하겠다. 하지만 명심하라. 우리는 대륙 정벌의 야욕을 밝힘으로써 이사벨, 그 빌어먹을 년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머지않아 다시 시작될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때에, 우리가 생각한 그림대로 전쟁이 시작된다면. 그때는 로만 드미트리, 이사벨과 같은 녀석들이 방해할지라도, 크로노스 제국의 천년대계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천년대계(千年大計).

미스틱이 고개를 조아렸다.

일반 사람들은 진실을 몰랐다.

하지만 알렉산드르의 말처럼.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머지않아, 세상은 크로노스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다.

* * *

이사벨과 로만 드미트리.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진실을 전부 밝힌 이사벨은,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진실을 밝힌 이유는 ‘그림자’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셰피르를 쓰러트렸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성스러운 힘을 발현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을 당신은 해냈다는 의미입니다. 인류(人類)를 위해 루나 왕국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저를 도와서 크로노스 제국, 나아가 악의 무리를 처단해 주십시오.”

그녀의 말.

예상했던 바였다.

진실의 이면에서 크로노스를 대적했던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설명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싫습니다.”

“……인류를 저버리겠다는 말씀입니까?”

“그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크로노스 제국이 드미트리의 적(敵)으로서 존재한다면, 저는 끝까지 그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명분에 인류를 위한 헌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드미트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검을 뽑을 수 있어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을 운운할 만큼 저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목적이 부합합니다.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사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간의 행보.

로만 드미트리와 자신의 뜻이 부합한다고 믿었다.

신탁을 받아서 암중(暗中)에서 활약했던 이사벨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의무를 같이 짊어 줄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를 발견했다.

그가 카이로의 반란을 정리했을 때, 레드포드 왕국의 반란을 무마시켰을 때, 그리고 크로노스와 전면전을 벌여 셰피르를 쓰러트리는 모습까지.

자신을 도와줄 신의 전사를 내려보내 주었다고 믿었다.

갈수록 강해지는 크로노스의 야망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로만 드미트리와 같이 강인한 전사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부합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위해, 저는 개인의 목적을 위해. 크로노스 제국을 쓰러트리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만약 크로노스 제국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을 해 온다면. 당신은 그들의 목숨을 포기하고 알렉산드르의 목을 베어 버릴 수 있습니까?”

“……그, 그건.”

“그 차이입니다. 중요한 순간에 서로가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에, 우리는 처음부터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저라면 그런 순간이 찾아왔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만남으로 루나 왕국과 드미트리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에 서로에게 득이 되는 행동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끝까지 같이 크로노스를 무너트리자는 약속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그동안 샐러맨더를 위해 헌신했던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입니다.”

말문이 막혔다.

로만 드미트리.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오만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크로노스의 진실을 알고도 이러한 반응이 돌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사벨이 말했다.

“알렉산드르는 인간에게 허락된 삶을 부정한 괴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신비한 힘을 들여온 존재이기도 합니다. 당신만의 힘으로 그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의 힘을 보유했다면, 당신의 그 판단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말은.

상식에 부합했다.

적어도, 본인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심한 눈빛으로 이사벨을 내려다보았다.

“상관없습니다. 그 존재가 얼마나 강하든, 저 너머의 세상에서 어떤 존재였든. 그건 제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알렉산드르가 정말 중원 무림에서 살았던 존재라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조금도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차원 너머.

중원 무림에서, 천마 백중혁은 천하제일(天下第一)이었다.

고로.

알렉산드르의 전생은, 아무리 대단한 존재였을지라도 백중혁의 발밑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중 하나에 불과했다.

* * *

며칠 전.

크로노스 제국과 드미트리의 대립이 극에 달할 때, 오델리아 왕국은 모종의 계획을 진행했다.

[이틀 뒤.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워프 게이트’를 통해 오델리아 왕국의 수도로 향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이번 작전은 크로노스 제국, 오델리아 왕국, 움베르토 왕국이 협력하는, 삼국(三國)의 연합 작전입니다. 오델리아와 움베르토에 도착한 제국의 병사들이 왕국 연합을 손에 넣는 순간, 우리는 대륙 정벌의 초석을 쌓게 됩니다. 그러니 전력을 다해 제국을 도우십시오. 크로노스 제국의 미래가, 곧 오델리아의 미래가 될 테니 말입니다.]

화면 너머.

찰튼 남작이 웃음을 보였다.

마법 통신을 끝내자, 오델리아 국왕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구나.”

매일, 전장에서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로만 드미트리가 기적적으로 승리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어쩌면 오델리아와 움베르토 왕국이 드미트리에 붙었다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크로노스 제국과 모종의 협약을 맺은 그 순간부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간에 관계를 되돌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결단이 필요했다.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콩알만 한 간덩이는 생존하는 것을 최우선에 두었다.

수하를 불렀다.

그리고는, 명령을 내렸다.

“크로노스와의 연합은 오델리아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그들이 수도에 도착하는 순간, 우리는 크로노스 제국의 병력을 내세워 왕국 연합을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실패는 허락되지 않는다.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대륙의 역사는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기사가 의욕에 차오른 눈빛을 보였다.

부끄러움은 없었다.

국익(國益)을 위해서라면, 그간 왕국 연합이 주장해 온 것들은 언제든지 내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델리아 국왕은 병력을 도열시키고, 워프 게이트로 넘어올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을 반겼다.

확.

척척척척.

하얀 불빛 너머로.

제국의 병사들이 밀려들었다.

처음에는 밝은 얼굴로 맞이하던 오델리아 국왕은, 그들의 지휘관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굳었다.

‘……설마.’

사나운 얼굴.

불길했다.

크로노스의 지휘관은, 마치 적군을 바라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제국의 병력이 모두 도착한 직후, 불길함은 현실이 되었다.

“오델리아 왕국의 버러지들을 공격하라! 크로노스 제국은, 오델리아와 움베르토를 시작으로 왕국 연합을 함락시킬 것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오델리아 왕국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물리쳤을 무렵, 오델리아 국왕은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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