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종결 (4)
휴전!
크로노스 제국이 드미트리와의 휴전을 선언했다.
서부 전선에서의 패배로 크로노스 제국이 보복할 것이라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식량을 비축하던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로 인해 최근 식량값이 폭등했다.
전쟁의 여파에 휩쓸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카이로와 드미트리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사람들은, 크로노스 제국이 휴전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얼빠진 반응을 보였다.
크로노스가 어떤 나라인가.
단 한 번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는 나라인데, 그들이 대군을 잃고도 휴전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미친! 크로노스가 전쟁 보상금으로 50만 골드를 책정했다고?!”
“세상에. 이러면 사실상 크로노스 제국이 패배를 시인하는 거잖아. 드미트리가 전쟁을 먼저 선포했고, 서부 전선에서 크로노스의 30만 대군이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는데, 오히려 크로노스 제국이 전쟁 보상금을 지급하다니. 드미트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가.”
“이유가 뭐든 간에. 크로노스가 한발 물러난 건 분명해.”
난리가 났다.
역사를 통틀어.
이와 같은 휴전 협약은커녕, 크로노스 제국은 침략을 일삼으면서도 그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50만 골드라니. 200만 명의 사람들이 일 년은 먹고살 수 있을 만한 엄청난 돈에, 사람들은 이게 현실임을 의심했다.
이건 명백한 패배의 증거이지 않은가. 오만한 크로노스 황제가, 이런 결단을 승인했다는 것 자체에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렸다.
“드미트리의 시대가 열렸구나.”
“로만 드미트리는 이제 ‘공국의 후계자’ 정도로 평가할 인물이 아니야. 발할라 제국의 바르보사를 쓰러트린 것을 시작으로, 크로노스 제국마저도 무찔러 버렸잖아. 드디어 대륙의 판도를 바꿀 영웅이 탄생했어. 드미트리는,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새로운 시대의 중심으로 거듭날 거야!”
“드미트리로 갑시다! 대륙의 미래는 그곳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드미트리를 우러러보았다.
이례적인 행보.
그간 많은 일을 이루었지만,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쳤다는 단 하나의 업적은 모든 것을 뛰어넘을 만큼 엄청난 임팩트를 보였다.
드미트리의 위상이 뒤바뀌었다.
시작은 카이로 왕국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드미트리가 카이로를 따르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륙이 들끓었다.
사람들이 말했다.
“크로노스도 이제 끝났어. 그동안은 불패(不敗)의 이미지가 강해서 아무도 그들에 대항하지 못했지만, 샐러맨더 대륙의 왕국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필두로 목소리를 높일 게 분명해. 그게 시작이야. 천천히, 천천히 크로노스의 위상이 무너져 내린다면. 예전처럼 크로노스가 대륙법을 무시하고 날뛰는 것도 더는 불가능해. 우리는 지금, 크로노스가 몰락하는 역사의 한순간에 존재하는 거야.”
타당한 말이었다.
크로노스의 몰락설은, 사람들이 맥주잔을 부딪치며 새로운 미래를 말하게 했다.
그러한 기쁨은.
딱 하루만 허락되었다.
다음 날.
오델리아의 소식이, 대륙을 충격에 빠트렸다.
* * *
폐허였다.
정확히는, 도시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잔해를 바라보며 루카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크로노스, 이 미친 새끼들.”
오델리아의 수도.
이곳에는 수십 만의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수도와 같이 명운(命運)을 달리했다.
그중에는 루카스를 따르는 하오문의 정보원들도 포함되었는데, 어떠한 보고도 없이 갑자기 연락이 끊겨 버렸다.
그것은 크로노스 제국이 정보원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의미가 아니다.
수도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이에 대해 알리지도 못할 만큼 기습적으로 모두가 죽었다는 의미였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산전수전을 경험한 루카스로서도, 눈앞의 광경을 설명할 길은 없었다.
“마법사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마법사가 앞으로 나섰다.
나이는 60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3서클의 경지에 불과한 대신 평생을 마법 연구에 전념한 인물이었다.
하오문은 다양한 일을 다루었다.
그중에는 ‘마법적인 지식’이 필요한 일이 있다 보니, 연구비와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노인을 영입했다.
‘정보원들이 보고하지도 못할 정도라면, 길어도 3분 안에 이 도시가 무너졌다는 의미다. 그건 물리적인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분명히 마법이 사용되었다. 8서클의 마법사를 동원했던 크로노스 제국이라면, 그에 버금가는 또 다른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부에서의 전투.
8서클 마법사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세상에 그와 같은 경지가 존재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발현되는 8서클의 마법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었다면. 드미트리는 분명히 패배했을 것이다.
드미트리와 카이로의 병사들은 승리했다는 기쁨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였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는 8서클 마법에 대한 공포가 남았다.
만약.
8서클 마법사가 오델리아의 수도를 소멸시켜버렸다면.
크로노스 제국은 두 명의 8서클 마법사를 보유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전력을 보유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곳을 찾았다.
현장을 확인해, 정보를 얻을 요량이었다.
그때였다.
콰직.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마법사가 경악했다.
그가 발명한 마법 기기로 현장에 남은 마법의 기운을 파악하려고 했는데, 감당할 수 없는 힘에 마법 기기가 그만 부서지고 말았다.
루카스가 물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아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법사가 덜덜 떨었다.
기기를 내려보는 그의 눈빛은, 격렬한 파도가 들이닥친 것처럼 파문이 일었다.
“제가 개발한 마법 기기는 8서클의 마법도 측정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도에 남은 ‘잔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마법 기기가 부서져 버렸습니다. 그 말은. 8서클 마법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위력을 보유했거나, 아니면……그 이상의 마법이라는 의미입니다.”
8서클.
혹은, 그 이상.
루카스의 표정이 굳었다.
마법사의 말이 진실이라면.
지금부터는, 크로노스와의 휴전 협상을 더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 * *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전과는 구성원이 달랐다.
드미트리, 카이로, 헥토르, 레드포드, 프랑크, 움베르토.
수도가 소멸해 버린 오델리아 왕국을 제외한 여섯 개 국가의 대표가, 로만 드미트리의 부름에 자리에 나타났다.
프랑크 국왕이 말했다.
“……오델리아의 일이 정말 사실일까요? 당시 수도 인근에서 상황을 목격한 사람에 의하면, 하늘에서 거대한 물체가 떨어져서 수도를 단번에 소멸시켜 버렸다고 합니다. 그건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서부 전선에 나타난 그 ‘악마’를 제외하고도,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전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몇 분 만에 오델리아의 수도를 소멸시켜 버렸고, 그들의 무력시위는 힘이 없기에 휴전 협약을 받아들인 것이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맞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다들 말을 덧붙였다.
불안이 번졌다.
분명히 어제만 해도 승리의 샴페인을 땄건만, 크로노스 제국의 행보는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다.
인간의 힘으로.
몇 분 만에 수도 하나를 소멸시키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했다.
그들이 우러러보는 로만 드미트리조차도, 라스칼의 일만 병력을 학살한 그조차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수도에 작렬했다는 ‘거대한 물체’는 셰피르와 동급이거나, 아니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의 힘을 사용했다는 의미였다.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크로노스 제국.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간 흘러온 대륙 역사에서, 왕국 연합의 선조들이 대항하지 못한 것은 압도적인 힘 때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오델리아의 사건은 크로노스가 우리에게 남기는 경고입니다. 그들은 힘이 없어서 휴전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 마지막 결전을 위해 숨을 고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휴전’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크로노스 제국은 협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먼저 전쟁을 선포할 것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크로노스와의 전쟁에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에드윈 헥토르였다.
그 물음에, 로만 드미트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예.”
간결한 대답.
사람들은 감탄했다.
분명히 자신들과 똑같은 정보를 보고 들었을 텐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안도하는 반응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크로노스와의 전쟁에 승산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게 바로.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이었다.
켜켜이 쌓여 온 승리의 전과는, 이제 그를 향한 맹목적인 신뢰를 부여했다.
“전쟁은 언제고 다시 시작될 것이고, 드미트리는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물러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새로운 왕국 연합의 이름으로 모였다고는 하나. 여러분들의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희생이 없는 자유는 없습니다. 결전의 날을 준비하지 않은 나라는, 드미트리와 같이 미래를 도모하지 않은 나라는. 오델리아 왕국의 수도가 소멸한 것처럼, 어떤 어려움을 경험하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할 것입니다.”
빈말이 아니다.
오델리아의 소멸은, 모두의 방관 아래 이루어졌다.
로만 드미트리는.
새로운 왕국 연합의 지도자는, 그렇게 인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결단으로 드미트리를 따른다면, 드미트리가 그 믿음을 저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그 또한.
진심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잔인한 면모와 더불어, 신뢰를 보답하는 방식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제1차 대륙 전쟁은 막을 내렸다.
* * *
밖을 걸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로만 드미트리는 루카스의 보고를 떠올렸다.
“현장을 조사한 마법사에 의하면, 셰피르가 사용한 마법을 능가하는 수준의 위력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로서는 ‘9서클’의 존재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게 아니고서는 같은 8서클의 마법이 이토록 차이가 날 수는 없습니다.”
9서클.
상상 속의 경지였다.
7서클 마법사들에 의해 8서클의 존재 여부는 처음부터 확인되었지만, 마법 학계의 사람들은 그게 마법사의 한계라고 단정했다.
9개의 서클은 인간의 육체로는 감당할 수 없다.
9개 이상의 서클을 심장에 두르는 순간, 자연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한 심장은 단번에 폭발해 버릴 것이다.
그런데.
9서클의 가능성이 나타났다.
수도를 단번에 소멸시켜 버린 힘은, 상식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척.
검을 들었다.
만약.
지금의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면 그와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시간을 들여 수십 만의 병력을 몰살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미지의 존재처럼 단번에 수도를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천재지변(天災地變)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힘이었다.
천마 백중혁이 살았던 중원 무림에서도, 그만한 힘을 사용하는 존재는 단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래서 날 이 세상에 부르셨습니까.”
하늘을 보며 웃었다.
기뻤다.
피가 끓었다.
사람들은 압도적인 위력에 절망감을 맛보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오히려 호승심이 일었다.
전생.
천마 백중혁은 무적이었다.
지의 경지만으로도 천하제일의 자리에 올랐고, 천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는 자신의 힘을 시험할 상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삶은 무료함의 연속이었다.
중원 무림에서 온갖 대단한 명성을 얻은 무인들도 막상 백중혁 앞에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상대가 없는 힘은 지루함을 낳았다.
항상 호적수(好敵手)를 바랐다.
자신의 전력을 시험할, 자신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그런 존재를.
전력을 다해 힘을 발현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발전의 여지를 찾아가길 바랐다.
“즐겁구나.”
알렉산드르는 알지 못했다.
그의 선물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로만 드미트리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 * *
금의환향(錦衣還鄕).
드미트리의 군대가 복귀했다.
크로노스를 물리친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와 환호성을 내질렀다.
기쁜 날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만남을 끝낸 로만 드미트리는, 한스의 표정을 보고는 자신을 기다리는 소식이 있음을 알았다.
울먹거리는 얼굴.
한스는, 힘겹게 하나의 소식을 전달했다.
“……도련님. 헨더슨이 죽었습니다.”
짧지 않은 투병 끝에.
헨더슨은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