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7화 (287/615)

287화 전쟁이 끝나고 (3)

클로에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크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나도 헨더슨처럼 희생할 수 있을까.”

스벤.

드미트리를 공격했던 그림자는 무려 6성의 검사였다.

크리스는 강해지겠다는 목적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따른 것이기에, 맹목적인 충성심이 있었던 다른 사람들과는 출발점이 조금 달랐다.

만약 헨더슨과 같은 상황에서 6성의 검사를 마주했다면.

페르난도에게 공격의 기회를 주겠다고, 적의 공격에 몸을 던지는 행동을 똑같이 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호승심으로부터 비롯된 충성심은,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겠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클로에.’

문을 나서며.

뒤로 그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유족들의 슬픔은 검사로서 살아가며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었지만, 클로에의 울음은 복잡한 문제였다.

헨더슨을 잃은 슬픔과 그를 기억해 주는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감사한 마음.

평민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우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먹먹했다.

크리스는 고아다.

부모를 잃고 조나단 기사단장을 따랐기에, 사실 헨더슨처럼 가족을 돌봐 준다는 말이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지는 않았다.

다만, 상상은 할 수 있었다.

훗날 자신도 검사가 아니라 헨더슨처럼 아버지로서 한 가정을 이룬다면, 그때는 로만 드미트리를 넘어서겠다는 목적보다는 가족에게 ‘안전망’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일 것 같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에게 직접 의도한 행동이라고 말했는데도, 클로에의 감정이 그를 전염시켰다.

‘주군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말 한마디에 수많은 목숨이 걸려 있는 지휘관이라면, 설령 진심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태도와 명확한 보상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어쩌면 저 또한. 클로에의 모습을 보았기에, 헨더슨과 똑같은 상황을 경험했을 때 망설임 없이 목숨을 바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을. 제가 존경하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패배해 분노했던 크리스가, 그를 인정하고 체념하는 시간을 거쳐 강해지고자 하는 목적에 충성을 맹세했고, 현재에 이르러 로만 드미트리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머나먼 미래.

지휘관이 된다면, 로만 드미트리처럼 되고 싶었다.

그때였다.

“크, 크리스 기사님!”

클로에였다.

헐레벌떡 달려온 그녀가,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로 말했다.

“아, 아무래도 상자를 잘못 주신 것 같아요. 언뜻 보아도 수백 골드는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제가 전부 들기에는 힘이 부족해서 다시 가져가 주실 수 있을까요? 기사님도 이렇게 큰돈을 헷갈리시면 큰일 나요.”

그녀의 말처럼.

상자에는 300골드가 있었다.

4인 가족이 300년을 놀고먹을 수 있을 만큼의 돈이었고,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한 클로에로서는 화들짝 놀라며 달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로서는 그것이 헨더슨을 위한 보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들, 평민에게 300골드의 보상은 과했다.

크리스가 말했다.

“착각한 거 아닙니다.”

“……예?”

“주군이 말씀하시길, 클로에 님이 앞으로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만한 돈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헨더슨은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클로에 님. 국가 유공자라는 단어는 단발적인 보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방금 받으신 금화는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 금전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아이의 학업과 같은 여러 문제에서 드미트리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몸소 경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웃음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대리인으로서.

이런 말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한편에서 자긍심을 일으켰다.

“그러니 부디,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 * *

이번 문제.

하오문은 상황을 관망했다.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긍정적인 소식이라면 일부러 소문을 키웠던 그들이지만, 사상자와 관련한 문제는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루카스는 담담히 명령을 받아들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뜻은 이해하나, 어차피 난리가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며칠 뒤.

예상대로 드미트리가 들끓었다.

처음에는 보상과 관련한 뜬소문에 사실 여부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클로에를 시작으로 금전적인 보상을 지급하자 경악하는 반응을 보였다.

실버 단위의 돈이 아니다.

전과에 따라 다르게 지급되기는 했어도, 보상이라는 명목으로 금화가 지급되는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세상에.”

“드미트리가 보상금 예산으로 무려 100만 골드를 책정했대!”

“그게 정말 사실이야?! 아니, 크로노스 제국에게 분명히 50만 골드의 보상금을 받았을 텐데,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50만 골드를 더 내놓겠다는 의미잖아. 드미트리가 철광산 산업으로 아무리 부유하다지만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1만 골드도, 10만 골드도 아닌, 100만 골드잖아!”

난리가 났다.

100만 골드라는 액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지만, 하루가 지날 때마다 보상을 지급받은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옆집도, 바로 그 옆집도.

평소에 어울려 지내던 사람들이 보상의 진실을 확인해 주었기에, 사람들은 드미트리의 과감한 결단에 존경심을 보였다.

게다가.

국가 유공자에 대해서도 알려졌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가족을 평생 국가가 책임지는 시스템이라니. 로만 드미트리 님이 드미트리에 헌신한 사람들의 노고를 잊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설마 이런 것까지 생각하실 줄은 몰랐어. 이건 대륙,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시스템이야. 대륙 제일이라고 떠들어 대는 크로노스 제국조차도, 국가 유공자들을 이렇게까지 대우해 주지는 않는다고.”

“다들 클로에네 소식 들었어? 이번에 헨더슨의 공을 인정해서, 국가 유공자로 등록할 뿐만 아니라 무려 300골드의 보상금을 지급했대. 국가 유공자 시스템이 말뿐이 아님을 증명한 거지!”

보상은 유족들의 슬픔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보상이 가족을 잃은 미래를 보장해 주었기에, 적어도 클로에와 같이 가장을 잃은 유족들은 앞으로 살아갈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나라가 들썩였다.

어떤 이는 슬퍼하고, 어떤 이는 로만 드미트리를 찬양했고, 어떤 이는 드미트리로 귀화하겠다면서 짐을 챙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 가장 도드라지는 현상이 있었다.

드미트리의 한 마을.

평생을 농사에 헌신했던 청년 중 일부가, 조잡한 목검을 챙겨 들며 길을 떠났다.

“아버지. 저는 이 길로 드미트리 군에 입대하겠습니다.”

“헨더슨도 처음에는 농사꾼에 불과했어요. 검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해서 담력 테스트를 보면서 다리를 덜덜 떨었지만, 로만 드미트리 님의 가르침을 받아 대단한 검사로 성장했어요. 저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저는 꼭 열심히 훈련해서, 헨더슨 님처럼 되고 싶어요.”

“어머니! 성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

한 번의 예.

헨더슨은 평범한 사람들의 성공 모델이 되었다.

제2, 제3의 헨더슨을 꿈꾸는 사람들이 생겨나며, 그들이 일제히 드미트리로 향하는 현상을 낳았다.

훗날.

사람들은 그날의 일을, 헨더슨 신드롬(Henderson syndrome)이라고 기억했다.

* * *

그 시각.

각 나라에서 회의가 이루어졌다.

[헥토르 왕국]

국왕을 바라보며,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드미트리 공국이 전쟁 보상금 예산으로 100만 골드를 책정했습니다. 아버지. 이는, 드미트리가 자신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증명하는 예입니다. 그렇다고 로만 드미트리가 인간적인 존재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델리아 왕국은 왕국 연합 중에서 유일하게 드미트리를 배반했고, 그들의 수도가 소멸한 상황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드미트리가 적과 아군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헥토르가 크로노스와 한 하늘 아래에서 살아갈 수 없다면, 차선책은 드미트리와의 연합이 유일합니다.”

지난 회의.

로만 드미트리는 명확한 선을 언급했고, 따르지 않는 자들과는 미래를 도모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헥토르의 왕은 그였지만, 나라를 이끄는 실질적인 인물은 바로 에드윈 헥토르였다.

그의 판단을.

그간 보여 준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를 믿었다.

“알겠다. 헥토르는 지금부터, 크로노스와의 전쟁을 준비토록 하겠다.”

[레드포드 왕국]

그곳에서의 대화는 회의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통보.

레드포드 국왕은, 신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드포드 왕국은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큰 은혜를 빚졌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레드포드는 멸망의 길을 걸었을 것이고, 레드포드의 백성들은 오델리아처럼 난민(難民)으로 전락하고 말았겠지. 명심하라. 레드포드의 결단은 전쟁의 승패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우리는 드미트리에 은혜를 갚을 것이고, 드미트리가 전쟁을 결심한 순간 그들을 위해 검을 뽑을 것이다!”

“레드포드를 위하여!”

“드미트리에게 축복을!”

[카이로 왕국]

[움베르토 왕국]

[프랑크 왕국]

나머지 왕국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카이로 왕국은 애초에 드미트리와 한 몸이었고, 반란을 주도하고 왕좌에 오른 드레이크 가문은 움베르토가 드미트리를 따를 것을 밝혔다.

유일하게 프랑크 왕국은 의견이 갈렸다.

크로노스 제국이 오델리아 왕국을 단번에 소멸시킨 것에 말이 많았지만, 결국 선택은 드미트리였다.

크로노스와 드미트리.

크로노스는 연합을 맺어 놓고도 배신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드미트리는 이번 보상 문제로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를 증명했다.

전쟁 보상은 단순히 민심만을 얻어 낸 것이 아니었다.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고민하던 연합 국가들조차도, 새로운 왕국 연합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륙이 급변했다.

제1차 대륙 전쟁.

크로노스는 처음으로 패배했고, 발할라는 방관자의 태도를 고수했다.

오델리아는 멸망했으며, 구 왕국 연합은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왕국 연합으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 * *

약 보름 뒤.

드미트리에 벽보(壁報)가 붙었다.

[드미트리 사병 모집]

몇 년 전.

로만 드미트리는 남부 전선으로 떠나기 위해, 자신의 명령만을 따르는 사병을 공개적으로 모집했었다. 이번 벽보는 그때와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었다.

드미트리는 이미 국가 단위로 성장하면서 나라에서 병사들을 받아들였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사병은 개별적인 임무 수행을 위한 특수 부대의 의미가 강했다.

그리고.

특이한 사항도 있었다.

[참가자의 신분은 현재 드미트리 공국 영주들의 소속이 아닌 사람들로 엄격히 제한한다. 단, 기존에 드미트리 공국 자체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의 경우,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소속을 변경할 수 있다.]

그날.

드미트리가 난리가 났다.

그렇지 않아도 헨더슨 신드롬으로 인해 드미트리에 입대하겠다고 젊은 청년들이 난리를 피우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사병을 구한다는 벽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사병이 된다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아. 케빈, 볼칸, 푸키 등등. 처음에는 분명히 일반적인 수준이었을 사람들이, 로만 드미트리 님의 가르침을 받고 엄청난 검사로 성장했잖아. 이는 드미트리의 국민이라면. 가슴 한편에 검사로서의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존재하지 않아. 드미트리 군 소속의 병사들도 대거 지원할 테니, 아마 정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이번 시험에 도전할 게 분명해.”

1만 명?

2만 명?

얼마나 많이 지원할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생각하고 말았다.

드미트리 공국의 사람들만이,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사병 모집에 지원하리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소식이 알려진 직후.

드미트리를 넘어.

샐러맨더 대륙 전체가, 뜨거운 열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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