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드미트리로 향하는 사람들 (1)
발할라의 명가, 클라이브 백작가.
클라이브 백작은, 당황스럽다는 눈빛으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의미지?”
“보시다시피 사직서입니다. 그동안 클라이브 가문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만, 더는 이곳에서 제 뜻을 펼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안 돼! 절대 안 돼!”
쫘악.
클라이브 백작이 분노하며 사직서를 찢어 버렸다.
사직서를 내민 사내.
로건이라는 이름의 검사는, 발할라 랭킹 19위에 랭크되어 있는 강자였다.
한 3년 전에 클라이브 가문이 거액을 들여 외부에서 초청한 존재였고, 그가 클라이브 가문의 소속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명가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문을 떠나겠다니.
그동안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잘 대해 주었다고 생각했기에, 클라이브 백작으로서는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대체 어디야? 누가 감히 클라이브 가문의 검사를 영입하려고 수작질을 부린 거지? 할튼? 마르칼? 어떤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제안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마. 로건. 너는 이제 클라이브 가문의 사람이야. 만약 네가 클라이브 가문을 떠나고 다른 가문으로 이적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밝혀진다면, 클라이브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질 수밖에 없어!”
목소리가 높아졌다.
예민한 문제였고,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3년 전.
클라이브 백작의 말처럼 로건은 초청을 받아들였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그들이 원하는 요구를 들어주었다.
서로 윈윈의 관계였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클라이브를 떠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최근에 벌어진 일들로 인해서 로건의 머릿속에 크나큰 파란이 일었다.
로건이 말했다.
“발할라의 다른 가문으로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왜 클라이브를 떠나려는 것이냐!”
“……백작님도 로만 드미트리의 사건을 기억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가 그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도 축제에 응했고, 홀로 모랄레스를 비롯한 검사들을 쓰러트리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바르보사가. 그의 공격을 열 번도 막아 내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습니다. 그때, 저는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관중석의 한 자리.
로건이 있었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의 압도적인 무력을 바라보며, 하늘에서 전사의 신이 내려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발할라는 낭만을 잃었습니다. 축제의 승자인 로만 드미트리를 곱게 돌려보내는 것이 옳은 일이었지만, 마치 저희를 눈먼 장인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은 발할라와 무관하다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백작님. 이 땅에는 제가 생각하는 미래가 없습니다. 전사로서 명예롭게 살길 바란다면, 적어도 발할라의 전사로 남을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결단이었다.
발할라에서 태어나 평생을 이 땅에서 살았던 그가, 새로운 꿈을 찾아 떠나는 것은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던 와중에 하나의 소문을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사병을 구한다는 내용이었고,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로건은 그때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19위의 명성?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바르보사를 쓰러트리던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조차도 우러러봐야 할 그런 존재였다.
게다가.
사상자들의 처우와 관련한 내용을 들으며, 로건은 클라이브 가문과의 이별을 결심했다.
“저는 드미트리로 떠날 생각입니다. 어떤 조건으로든 제 결정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클라이브에서의 생활이 불만족스러웠다는 것은 아니나, 전사로서 바라는 꿈이 드미트리에 있을 뿐입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걸음을 돌리는 로건의 뒷모습을, 클라이브 백작은 허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로건과 같은 일은 발할라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대륙 각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중간 경유지인 아델리안의 여관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탁.
“크으.”
대머리 사내가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는 힐끗 주변에 있는 사내를 살피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거 칼밥 좀 먹으신 분인 것 같은데,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질문을 받은 사내.
뱀눈의 사내가, 피식 웃었다.
“프랑크에서 왔습니다.”
“프랑크라니. 그 먼 곳에서 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이유야 뻔하지 않습니까. 드미트리의 영웅이 사병을 구한다기에,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드미트리는 ‘사상자’들에 대한 예우가 확실하다고 들었습니다. 이왕 칼끝에서 사는 삶이라면,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분을 모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하하하하.”
대머리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앞으로 경쟁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는 맥주잔을 부딪치며 뱀눈의 사내와 이 순간을 즐겼다.
그의 조사는 계속되었다.
여관에 있는 인물들에게 드미트리를 찾은 이유를 묻자, 각양각색의 대답이 돌아왔다.
“드미트리의 일원이었던 헨더슨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농사꾼으로 시작해서 국가 유공자로 등록되었다는 말에, 가슴이 끓어서 도무지 잠자리에 들 수 없었습니다. 움베르토에서는 나름대로 괜찮은 가문의 기사로 활동했습니다만, 지금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카이로에서 왔습니다. 사실 카이로에서 드미트리로 이적하는 것은 조금 예민한 문제인데, 전장에서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랐던 기억을 도무지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신입니다. 항상 선봉에서 병사들을 이끄는데…… 크으, 그런 사람을 모실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저는 오델리아의 난민입니다. 어차피 나라를 잃은 지금, 백성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싶습니다.”
대머리 사내는 헥토르 출신이었다.
그야말로 각국의 출신들이 모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 사상자들을 대우해 주는 시스템에, 그리고 검술에 대한 강한 욕망에.
그들은 드미트리의 사병 모집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본인의 고향을 떠나는 과정에 많은 잡음이 있었지만, 합격 여부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대머리 사내의 시선이 구석을 향했다.
로브를 눌러쓴 사내였는데, 홀로 음식을 먹는 모습이 묘하게 시선을 잡았다.
“어이, 거기 당신은 어디 출신입니까?”
흠칫.
나이프질을 멈추었다.
로브인은 고개를 들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랑크에서 왔습니다. 대화에 참여하고 싶지 않으니, 더는 말을 걸지 마십시오.”
“에이, 거짓말.”
딱딱한 반응에.
뱀눈의 사내가 웃음을 보였다.
프랑크 출신이면서도 대륙을 방랑한 그는, 로브인의 억양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프랑크 사람들은 그런 발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제 경험으로 보자면 아마도…… 크로노스. 크로노스 제국 출신 맞죠?”
순간.
분위기가 굳었다.
크로노스 제국.
다른 나라들은 다 그렇다 치더라도, 대륙 전쟁의 원흉인 크로노스의 출신은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였다.
* * *
“후.”
로브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이프를 내려놓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마주 보았다.
“맞습니다. 크로노스 출신.”
“……적어도 크로노스 제국의 출신은, 드미트리의 사병 모집에 응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일단 따로 제약하는 부분이 없으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왜 이런 선택을 한 겁니까?”
다들 궁금했다.
크로노스는 제국이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출신이, 하필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대국의 수장이었던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시험에 응하겠다니.
첩자가 아니고서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다들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낭만이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크로노스 제국의 사람을 곱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로브인이 말했다.
“적대국 출신이니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크로노스 제국의 악랄한 행보에 질렸습니다. 크로노스는 협력을 맺어 놓고도 오델리아의 수도를 날려 버렸고, 이번 협상 문제로 외교부 소속의 찰튼 남작을 죽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로만 드미트리의 요구에 무릎을 꿇었다는 이유로, 찰튼 남작은 그동안 제국을 위해 헌신했던 시간을 조금도 보상받지 못한 채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크로노스는 무서운 나라입니다. 적어도 한 가정의 아비로서, 그런 나라에서 제 자식들을 키울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생각보다 인간적인 사연이었다.
사람들은 표정이 바뀌었고, 의외라는 눈빛을 보였다.
“크로노스 제국은 대륙 제일의 강대국입니다. 다들 이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못하겠지요. 그런데 드미트리가 전쟁 보상금으로 100만 골드를 책정할 때, 크로노스 제국은 그보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란 말입니까. 저 또한 크로노스 제국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제 미래를 보장해 주는 그런 사람을 위해 충성을 맹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헨더슨을 국가 유공자로 등록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제국의 국경을 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드미트리의 테스트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경을 넘는 일.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재산을 털어 워프 게이트의 경비들을 매수했고, 가족들만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하듯 제국을 떠났다.
로브인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관방에서는, 아내와 자식들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배반자들을 엄하게 처벌하기에.
혹시라도 발각될 염려가 있어서, 로브인만 밖으로 움직이며 음식을 여관방으로 직접 전달해 주었다.
대머리 사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것 참. 크로노스 제국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들면, 시험에 합격하기란 정말 힘들겠네.”
그의 말.
모두가 공감하는 바였다.
로브인의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그런 강자조차도 합격을 희망한다면, 앞으로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빌었다.
제발, 경쟁자들이 많지 않기를.
상식의 선에서만 경쟁자들이 몰려든다면, 그들은 어떻게든 시험에 통과할 생각이었다.
* * *
드미트리의 대로.
조나단 기사단장은, 특별한 용무를 위해 걸음을 옮겼다.
“기사단장님. 이번 시험에 사람들이 얼마나 지원한다고 보십니까?”
그의 옆으로.
따라 걷던 기사가 물었다.
조나단 기사단장은 잠시 고민하던 기색을 보이더니,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예상을 말했다.
“예전에 로만 도련님이 지금의 위상을 갖추지 못했을 때도, 인근에서 제법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로만 도련님은 드미트리 공국의 후계자가 되었고, 정식 랭킹전을 치르지 않았을 뿐이지 새로운 랭킹 1위에 오를 존재로 유력하신 분이다.”
달그락, 달그락.
옆으로 사람들이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수북이 쌓인 서류 뭉치에, 조나단 기사단장은 특별히 눈여겨보지 않았다.
“드미트리 내에서도 로만 도련님을 모시는 ‘사병’들은 예외의 존재로 취급한다. 드미트리 공국의 병사들도 대거 시험에 응한다고 했으니, 어쩌면 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험에 응할지도 모르지.”
“……만 명이라니. 정말 엄청나네요.”
또다시.
옆으로 수레가 지나갔다.
조나단 기사단장이 기억하기로는, 저런 광경을 보일 일은 없었다.
“이번 사병 모집의 서류 접수 기간은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동안이다. 아마 오늘 수천 명의 사람이 몰려들고, 차츰 줄어들다가 일주일을 전부 채워서 1만 명을 넘길지도 모른다는 것이 내 솔직한 생각이다. 그러니 걸음을 서두르자꾸나. 우리는 접수처의 사람들을 도와서, 서류에 문제가 없는지를 확인해 주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걸음을 서둘렀다.
그들의 역할.
서류 확인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신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나중에 하오문이 맡을 일이고, 그들은 기본적인 결격(缺格) 사유를 확인해서 일차적으로 사람들을 걸러 낼 생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정한 자격에 벗어나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면. 그들은 신분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참가 자격을 잃어버릴 것이다.
서류 접수는 1시간 정도가 지난 상태.
적당히 서류가 쌓여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한 접수처는 그야말로 전쟁터를 보는 것만 같았다.
“빨리, 빨리 움직여!”
“거기 서류 쏟아지잖아!”
“이런 미친 새끼야! 정신 차리라고!”
난리가 난 사람들.
그중.
책임자로 보이는 사내가, 울먹거리는 얼굴로 조나단 기사단장을 돌아보았다.
“……조나단 기사단장님! 제발,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겨우 한 시간 만에, 지원자가 벌써 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 말에.
조나단 기사단장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알았다.
접수처로 이동하는 길에 수레를 나르던 사람들.
수레에 가득히 쌓여 있던 서류 더미가, 전부 시험에 응시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지원서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