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6화 (296/615)

296화 역사에 남을 첫걸음 (2)

로만 드미트리가 떠난 자리.

콘라드 자작이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위한 초석을 쌓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기초적인 토대만으로도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것인데, 로만 드미트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내놓았다.

인류의 발전을 위한다는 등의 이상한 명분 때문이 아니다.

그 정도를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리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황당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자신감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오만함이.

콘라드 자작을 혼란에 빠트렸다.

만약.

동북쪽 연합회와 드미트리의 갈등이 심각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장담컨대 콘라드 자작은 지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 공국’이라는 세력을 바랐기에 목숨을 구제할 수 있었지, 조금이라도 반기를 들었다면 콘라드 자작은 처참히 짓밟혀 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소름이 돋았다. 변방의 영주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콘라드 자작은 선뜻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로렌스 자작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모시는 분은, 동북쪽 일대의 작은 땅덩어리로 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기억을 되새겼다.

로만 드미트리.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블러드 팽을 처단한 그는 당당하게 본인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말했다.

그때부터 로렌스 자작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드미트리의 얼간이가 아니라, 이미 정신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게 패왕(霸王)의 자질임을 그때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다.

“주군은 검술 발표회를 통해 ‘단전’을 활용한 오라 활용법을 발표한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난리가 나겠지요. 검술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드미트리만의 전유물이었던 방식을 터득한 사람들이 빠르게 발전할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그로 인한 변화가 아닙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해진다고 한들. 겨우 기초를 터득한 사람들이, 주군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주군에게 가르침을 받는, 드미트리의 병사들을 따라잡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단언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단전의 개념을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수준의 차이를 메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알렉산드르와는 달랐다.

알렉산드르는 최초의 선구자일 뿐, 최고의 검사라고는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섰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존재들은 시간이 갈수록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경외심을 보였다.

지식이 깊어질수록. 로만 드미트리가 도달한 위치는, 인간의 영역으로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의 한순간에 올라탔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주군이 오라를 재정립할 그날을 기록할 것이고, 알렉산드르가 그랬듯 주군으로 인한 변화는 드미트리를 부흥시킬 것입니다. 모두 명심하십시오. 앞으로 드미트리의 일원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역사에 기록될 만큼의 역량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덤덤히 내뱉은 발언.

그의 말처럼.

드미트리의 귀족들은, 일개 공국의 수준으로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드미트리가 떠들썩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공지한 검술 발표회 날에, 먼 거리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드미트리가 득실거렸다.

대강당.

사람들이 자리했다.

그중 가장 앞자리에 앉은, 한때는 드레이크 후작이라고 불렸던 움베르토 국왕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생각을 당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오라의 재정립이라니. 기존의 체계보다 월등히 뛰어난 기술을 개발했다면, 대체 왜 크로노스 제국까지 초청해서 그것을 발표한단 말입니까. 그 목적에, 솔직히 의구심이 생깁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처음 오라가 발명되었을 때.

오라의 분출은 크로노스 제국의 전유물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먼저 선점한 대가로 압도적인 세력을 구축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오라의 정보가 자연스럽게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기술의 유출을 늦추는 것이 정상이었다.

이렇게 적대국을 초대하면서까지, 검술 발표회를 진행할 이유는 없었다.

제일 뒤.

크로노스와 발할라의 손님들이 있었다.

그들은 상석에 앉지 못하는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번 발표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일반적으로는 발표회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 님이라면. 제가 경험한 그분은, 남들이 대단하다고 떠들어 대는 ‘새로운 체계’를 알려 주어도 되는 정보로 분류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남부 전선에서 처음 로만 드미트리 님을 만났을 때. 그분은 물러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면으로 헥토르의 병사들을 압도했고, 끝에는 아시다시피 저희가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로만 드미트리 님의 근본입니다. 패왕의 자질을 타고난 존재. 이번 발표회를 통해 최초의 선구자라고 불리던 알렉산드르의 명성을 강탈한다면, 그때부터 드미트리의 근본은 ‘카이로 변방 출신’이 아닌 오라의 체계를 재정립한 존재를 배출한 땅으로 불리게 됩니다.”

상황이 바뀌었다.

동북쪽 변방의 드미트리.

끝없는 산맥에 붙은 척박한 땅.

사람들이 무시하던 드미트리 출신이, 알렉산드르와 같은 최초의 선구자 타이틀을 확보할 것이다.

근본이 생긴다는 의미다.

드미트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징성을 얻는다.

“오히려 저는 이 상황이 두렵습니다. 모두가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정보를 알려 주어도, 로만 드미트리 님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 테니까요. 크로노스가 한때 오라로 다른 국가들을 압도했던 것처럼. 드미트리는, 벌써 그만한 우위를 점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들 침묵에 빠졌다.

같은 우방국이지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경외심을 유발했다.

그때였다.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마침내, 로만 드미트리가 예고한 시간이 되었다.

* * *

무대 뒤.

로만 드미트리는 한 존재를 떠올렸다.

그의 이름은 남궁진천이었다.

남궁세가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라고 평가받던 그는, 어느 날 백중혁을 찾아와 절망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째서. 어째서 마교의 무공을 공개하신 겁니까!”

정파 무림의 몰락.

남궁진천은 현실을 목격했다.

스스로 최고라고 자부하던 남궁세가의 검이 백중혁에 의해 꺾였고, 그날 그가 보여 준 모습은 남궁진천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박혔다.

그때부터였다. 남궁진천은 남들 몰래 마교가 개방한 무공을 익혔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마교에 대해 완벽하게 알아내고 싶었고, 동시에 천마 백중혁의 토대인 마교의 무공을 익힘으로써 그와 같은 발전을 이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 년, 이 년.

세월이 흘렀다.

십 년에 이르렀을 때, 남궁진천은 깨달았다.

‘마교의 무공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천마 백중혁이 특별했을 뿐이다.’

마공에 대해 알아갈수록.

절망에 빠져들었다.

백중혁이 발현하는 무공은 같은 경지여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파괴력을 보였고, 마교의 역사를 통틀어 그와 같은 존재는 없었다.

역대 천마 중에 지의 경지에 도달했던 존재는 여럿 있었으나 무림을 정벌한 존재는 백중혁 단 한 명인 것처럼, 백중혁의 힘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최고의 재능이라고 불리는 자신조차도.

앞으로 수백 년을 수련한다고 한들, 백중혁이 도달한 경지에는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래서 백중혁을 찾았다.

완벽하게 무너진 얼굴로, 백중혁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닙니다. 십 년간 발악하며 마공을 익혔는데도, 저는 감히 당신의 발끝조차 따라잡질 못했습니다. 대체 왜. 어째서 마교의 무공을 공개하신 겁니까? 저와 같은 존재들이, 당신과의 차이를 절감하고 절망하길 바라신 겁니까?”

그 말에.

백중혁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러길 바랐다.”

“……!”

“패배의 역사는 한순간이다.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잊어버리고 천마신교를 향한 반감을 키우겠지. 그래서 마교의 무공을 공개했다. 너희와 같은 존재가 마교의 무공을 공부하고, 우리가 이루어 낸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체감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뼛속 깊이 각인된 공포가, 우리의 통제 없이도 너희 스스로를 억누를 테니까.”

경악했다.

공부하고, 경험하고, 그리고 우러러보아라.

오만하다 못해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남궁진천은 천마 백중혁의 말을 조금도 부정할 수 없었다.

참담한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정파의 무공을 등한시하고 십 년을 투자한 지금, 백중혁은 참사가 벌어졌던 그때보다 공포스럽게 보였다.

백중혁이 말했다.

“그 절망감을 기억하라. 나 백중혁은, 나보다 강한 자가 나타난다면 언제든지 웃으며 목을 내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절망감을 이겨 낼 자신이 없다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무림의 하늘에는 천마신교, 나아가 나 천마 백중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백중혁의 말.

옳았다.

그로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무림엔, 단 한 번의 반란도 시도되지 않았다.

* * *

무대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그들은 감히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마침내.

로만 드미트리가,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렉산드르. 그의 방식은 틀렸습니다.”

시작부터 강렬했다.

각자만의 방식이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이 아니라, 단언(斷言)함으로써 사람들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알렉산드르는 마나의 분출을 통해, 그 폭발력으로 강력한 ‘오라’를 발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입니다. 알렉산드르가 말하는 분출은 정리되지 않은 무분별함을 의미하고, 무분별함이 효율적이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대체 왜 알렉산드르의 방식에 의문을 가지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최초의 선구자라서? 모두가 진리처럼 따르는 체계이기에? 이유가 어찌 되었든, 여러분들은 간단한 문제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드르.

그의 정체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무림인이었다면, 무공을 ‘분출’이라는 키워드에만 맞춰서 발전해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로.

멍청했다.

하찮고, 같잖았다.

이 자리에서 자신을 지켜볼지도 모르는 알렉산드르를 향해,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냈다.

“마법에는 서클(circle)이 존재합니다. 서클에 마나를 쌓고, 그것을 정제하여 마법으로 발현합니다. 오라와 마법은 다르지 않습니다. 마법이 마나를 기반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분출하는 방식이라면, 대체 왜 오라를 발현하는 과정에서 마나를 ‘서클’과 같은 공간에 쌓아 둘 생각은 하지 못하셨습니까? 만약 오라 검사들도 마나의 저장 공간을 확보한다면. 단순히 분출의 방식으로만 오라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마나를 섬세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비난했다.

깎아내렸다.

마법의 서클이라는 대놓고 좋은 예시가 있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알렉산드르를 깔보았다.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확인하게 될 것은, 무분별한 분출이 아닌 서클과 같은 저장 공간인 단전(丹田)을 활용한 방법입니다.”

화악.

마나가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준비한 검에서 오라가 피어올랐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라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오라는 폭발하는 힘을 뜻했다.

활화산이 터지듯 분출하는 마나는 1성의 오라만으로도 강렬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의 마나는 차분했다. 너무나도 미약해서, 이게 같은 오라인지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소문으로 들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

그들은 조용한 오라를 사용한다고.

격정적이고 들끓지 않아도, 그들의 오라는 막아서는 적들을 베어 버리는 파괴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오라.

그것의 특별함은 애초에 알았다.

하지만 오라의 체계를 설명하고 직접 선보이는 일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걸음을 옮겼다.

강철.

미리 준비한 장애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별다른 폭발 없이, 가볍게 강철을 베어 버렸다.

서걱.

콰앙!

강철이 잘려 나갔다.

오라의 파괴력을 명백히 증명하는 상황에, 일부 사람들은 입을 틀어막았다.

알렉산드르의 가르침에 의하면. 폭발력을 배제한 파괴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에 알렉산드르의 방식이 틀렸다고 발언한 것을 증명하듯,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철을 두부처럼 베었다.

그리고는.

“저장 공간의 마나를 분출하는 방식을 마법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저는 단전의 마나를 분출하는 방식을 통틀어 ‘무공’이라 부릅니다. 그것이, 이번 발표회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선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검을 다시 한번 휘둘렀다.

체계에 따라 발현된 힘이, 무공이라고 표현한 로만 드미트리의 검술이 강철을 수십 갈래로 조각내 버렸다.

그 순간.

사람들은 확신했다.

그들은 지금.

알렉산드르가 오라를 발명하며 역사에 기록되었던 것처럼, 역사에 남을 한순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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