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역사에 남을 첫걸음 (4)
검술 발표회.
그 자리에, 알렉산드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단전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순간부터, 알렉산드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공은 간단해. 체내의 기운을…….”
삼류 무인.
오라의 토대가 되었던 그는 무공의 이론을 언급하면서, 단 한 번도 ‘단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스스로를 무림인이라고 밝힌 사내의 행색은 상당히 초라했고, 으스대듯 내뱉는 말은 그의 유일한 자랑거리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는 진짜 무림인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귀동냥으로 기의 흐름에 대해서는 들었지만, 기초적인 지식을 알지 못하는 삼류 무인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단전의 존재는 빼먹고 무공에 대해 떠들었다.
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사내가, 차원 이동을 통해 ‘알렉산드르’라는 존재가 될 줄은.
참담했다.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창시자의 업적이, 사실은 하찮은 말장난에서부터 비롯되었다니.
알렉산드르도 단전이라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단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몰랐기에, 샐러맨더 대륙의 지식을 결합해 체내의 마나를 폭발시키면서 분출하는 오라를 탄생시켰다.
부끄러웠다.
자존심이 상했다.
무대 위.
로만 드미트리는 이따위 기초적인 것도 모르는 ‘미지의 존재’를 대놓고 비웃듯이, 조롱하고 깎아내렸다.
이제는 무공을 공개적으로 밝힌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무공과 단전의 개념은 중원 무림에서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토대일 뿐이기에, 그걸 공개할지라도 대세가 바뀔 일은 없었다.
생각해 보라.
중원 무림에는 수많은 고수가 존재하고, 그들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무공을 발전시키면서 문파를 형성했다.
그 역사는 깊고 깊었다.
겨우 단전의 개념을 알았다고 한들, 샐러맨더 대륙의 사람들이 중원 무림의 역사를 단기간에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나름대로 발전을 해 나가겠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동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앞서 나갈 것이 분명했다.
김판석.
알렉산드르의 전생은 초라했다.
별 볼 일 없었던 삶은 그의 역린이었고, 알렉산드르는 새로운 세상에서 전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화려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기에 오라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는 상황에, 현생은 전생과는 다르다고 믿었다.
마법사로 전향한 지금도.
무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온전히 자신의 업적이라는 자부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데.
무참히 깨져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일류 무인의 수준만 되어도.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업적을 이룰 것이 분명했다.
알렉산드르의 이름은 쇠퇴(衰退)의 상징으로 전락할 테고, 사람들은 더는 오라의 역사를 말할 때 알렉산드르를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에 의한 시대가 열렸으니까.
오라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오라 검사들의 아버지라 평가받는 알렉산드르의 명성은 이대로 끝날 것이다.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화가 났다.
전생이었다면 초라한 현실을 받아들였겠지만, 현생의 알렉산드르는 순순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 로만 드미트리. 너는 이번 발표회를 통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비난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샐러맨더 대륙에서의 너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전생의 기억으로 마치 최고가 된 것처럼 으스대고 있지만, 현생의 나는 너를 압도할 만큼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무공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명백한 실수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냈던 내가, 네가 공개한 일말의 지식만으로도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똑똑히 보여 주마.’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앞으로 1년 뒤에 모든 준비가 끝나면, 샐러맨더 대륙을 불바다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다만.
그 전에, 자신만의 무공으로 로만 드미트리의 하찮은 업적을 짓밟아 버리고 싶었다.
“이미지 메모리(image memory).”
화악.
마나가 일었다.
세상이 뒤틀렸다.
알렉산드르의 머릿속.
기억 한편에 존재하는, 조각의 기억을 실체화시켰다.
* * *
서부 전선.
로만 드미트리의 무공을 되돌려 보았다.
천마군림보를 발현해 30만 대군을 향해 달려드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뒤흔들렸고, 검술 한 번에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소멸했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당시 셰피르의 ‘시야’를 공유하고 있던 알렉산드르는, 로만 드미트리의 무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십만대산 아래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무인들의 모습이 허황되었다고 생각했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것을 현실에서 증명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최소 일류 무인 이상이다. 대체, 그의 무공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거지?’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알렉산드르는 정말 무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지렁이에 불과했다.
그나마 아는 인물이라고는 구파일방의 수장들이나, 천마신교의 교주인 천마 정도가 전부였다.
특히 천마의 업적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십만대산 아래에서 살았기에,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존재에 대한 소문은 마을까지 전달되었다.
천마.
그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에게 천마는 신과 같은 존재였고,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주는 무력이라면 천마를 따르는 고수 중 간부급 인물은 되지 않을까 추측했다.
사실 그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실력의 구분도, 일류 이상부터는 정확히 뭐라고 표현하는지 알지 못했다.
결국.
기억을 되새겨도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한 단전을 기반으로 어떻게 마나를 운용하는지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복잡한 체계는 보는 것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짜증이 일었다. 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 9서클의 영역에 들어섰건만, 무공은 마법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오라의 창시.
대단한 업적이다.
만약 자신이 무림인으로서의 가능성이 없었다면, 겨우 ‘삼류 무인의 조언’을 가지고 오라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도 무림인으로서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로만 드미트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마법사의 길을 택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실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욕망이었다.
대륙 정벌을 떠나.
로만 드미트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무공으로서 유의미한 결과를 내보이고 싶었다.
공간이 뒤틀렸다.
현실로 돌아왔다.
알렉산드르는, 미스틱을 불러 명했다.
“현재 드미트리에 침투한 첩자들에게 명하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드미트리의 무공을 전부 알아내라고. 임무에 성공한 이들은, 크로노스 황제의 이름으로 약속하건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비참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였다.
조금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무공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뛰어넘는 그 날, 알렉산드르는 들끓는 열등감을 해소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 * *
그 무렵.
로만 드미트리의 발표에, 대륙이 발칵 뒤집혔다.
“검술 혁명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대륙을 지탱하는 근간인 오라의 개념이 완전히 재정립되었고,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오라의 창시자인 알렉산드르조차도 초창기에는 순순히 오라의 개념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적대국에조차 단전과 무공의 개념을 알려 주었고,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에 대해 떠들었다.
“기존 오라 검사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기는! 단전의 개념을 익히고 빠르게 변화에 적응하는 존재들은 살아남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존재들은 도태되고 말겠지. 앞으로 대격변이 일어날 거야. 현재 랭킹 시스템은 순위 변화가 거의 없을 정도로 공고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상황인데, 변화에 적응하고 치고 올라오는 존재들이 대세를 읽지 못하는 존재들을 밀어내고 상위권을 차지하고 말겠지.”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왜 이런 대단한 것을 그냥 알려 주는지 모르겠어.”
“확실한 것은, 그간 보여 주었던 비약적인 발전에 ‘근거’가 있음을 이번 발표회를 통해 증명했어. 이건 단순히 기술의 유출만을 의미하지 않아.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발전을 바라는 검사들이 있다면,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라면.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드미트리에 충성을 맹세할 수밖에 없어. 힘의 균형이, 급격하게 드미트리로 몰릴 것이라는 의미지.”
사람들의 말처럼.
대세가 기울었다.
검술 발표회로 기본적인 이론은 공개되었지만, 무공을 정확히 정립한 정보는 드미트리에만 있었다.
고로.
오라 검사들은 드미트리로 향했다.
마법사들보다는 급이 낮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들이, 로만 드미트리가 일으킨 혁명에 편승한다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판단은 적절했다.
무림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단전의 개념 하나로, 알렉산드르를 뛰어넘는 명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수많은 검사가 우러러보는 존재로 거듭났다.
드미트리 공국.
더는 변방의 나라가 아니었다.
검사들의 성지로 불렸고, 급격하게 몰려드는 인구는 사람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크로노스, 발할라.
견고했던 대륙의 양대산맥에, 역사상 처음으로 ‘삼파전(三巴戰)’의 균열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 * *
툭.
통신을 끊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첩자인 스캇은, 다소 어두운 얼굴을 보였다.
“……드미트리의 무공 정보를 빼돌리라니.”
방금.
상부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공의 정보를 빼돌리라는 내용이었는데, 문제는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4차 테스트로 첩자들을 색출했다.
스스로 정체를 밝힌 첩자들은 정말로 살려서 돌려보내 주었는데, 스캇과 같이 목숨을 건 첩자들이 끝까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을 ‘사병’으로 받아들였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뛰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스캇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정체가 발각되었음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일반적인 존재가 아니야. 첩자들의 존재를 방관한 것으로도 모자라, 우리가 목숨을 걸고 캐내려고 했던 정보를 공개적으로 밝혀 버렸어. 그 말의 의미는 아무리 정보를 빼돌린다고 한들 드미트리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의미겠지. 정말 크로노스 제국의 명령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옳을까. 앞으로의 미래에, 드미트리가 대세를 차지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
혼란스러웠다.
처음 임무를 받아들였을 때는, 크로노스 제국의 요구를 감히 거절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복잡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검술 발표회 하나로 판도를 뒤엎었고, 이쪽 업계 사람들은 정말로 삼파전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떠들었다.
게다가 오델리아를 제외한 샐러맨더 대륙의 모든 왕국이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가.
임무의 위험성을 떠나서, 크로노스 제국에 자신과 가족들의 미래를 맡기는 것 자체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불과 몇 년 전.
크로노스 제국의 권력을 넘보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파격을 선보였고, 그로 인한 균열은 결국 권력의 체계를 무너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일단 드미트리로 합류하자. 며칠만 드미트리에서 생활해 보고, 크로노스 제국의 임무를 수행할지 결정하면 되겠지. 만약 드미트리가 정말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릴 저력을 갖춘 나라라면. 그때는 심각하게, 정보를 빼돌리는 것이 아니라 제국에 있는 가족을 피신시킬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어.’
선택의 갈림길.
일단은 고민을 뒤로 미루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있다지만, 크로노스 제국을 버리고 드미트리를 따르기는 쉽지 않았다.
다음 날.
스캇은 드미트리에 합류했다.
4차 테스트의 합격자들.
그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드미트리의 사병으로 복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