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선택의 기로 (1)
첫날.
사람들이 지정된 장소로 몰려들었다.
복잡한 허례허식은 전부 생략되었고, 크리스는 그들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사병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지금부터 너희는 간단한 절차를 통해, 정식으로 사병이 되었음을 기록할 것이다. 호명한 순서부터 차례로 진행할 예정이니, 일련의 과정에 성실하게 임하길 바란다.”
스캇의 차례는 98번째였다.
햇볕을 가리기 위한 막사에서 크리스가 말한 절차가 진행되었고, 10명씩 진행되는 상황에 금방 스캇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막사로 들어서자 개별로 나누어진 공간이 보였다.
보안상의 이유로 사병들을 따로 분리한 것 같았기에, 스캇으로서는 왠지 모르게 긴장하는 마음이 들었다.
작은 공간.
테이블을 두고 서류를 확인하던 평범한 인상의 사내는, 스캇을 슬쩍 올려보았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간단하게 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이니, 성실하게만 대답해 주시면 돼요. 일단 올해 나이로는 38살. 움베르토 왕국 출신의 ‘스캇’ 씨 맞으시죠?”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로만 드미트리 님의 사병은 매우 특수한 보직입니다. 일반 병사들과는 달리 매월 30실버의 월급이 지급될 것이며,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는 생명 수당을 추가로 지급합니다. 그리고, 가족 있으시죠?”
훅, 치고 들어온 질문.
스캇이 마른침을 삼켰다.
움베르토 왕국의 출신이나 그의 가족은 크로노스 제국에 있었고, 사내의 질문이 크로노스와의 연관성을 묻는 것만 같았다.
순간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서 살짝 뜸을 들였지만, 괜한 거짓말은 상황을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솔직하게 말했다.
“……있습니다.”
“가족의 구성원과 거주하는 곳은요?”
“아내와 일남일녀를 두었고, 크로노스 제국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알아본 바와 동일하네요. 이와 같은 정보를 묻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스캇 씨가 만약 드미트리를 위한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사망할 경우, 저희는 아내분을 직접 찾아가서 보상금을 지급해 드릴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동의하십니까?”
“예?”
당황했다.
이미 정보를 파악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고, 사내의 물음이 보상금으로 직결될 줄은 몰랐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처럼.
스캇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크로노스 제국에 가족이 있다는 사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까?”
우뚝.
사내의 행동이 멈추었다.
사내가 웃는 얼굴로, 스캇을 바라보았다.
“예. 스캇 씨 본인 스스로가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면, 그 외의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 *
첫 번째 차례가 끝났다.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기며, 스캇은 복잡한 기색을 보였다.
‘……스스로 문제를 만들지만 않는다면, 과거를 떠나 드미트리의 일원으로 받아 주겠다는 의미인가.’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첩자의 신분은 들킨 것 같았지만, 로만 드미트리와 그의 사람들은 특별히 문제 삼지 않았다.
듣기로는 국가 유공자 시스템을 도입한 이후로 ‘보상금’과 관련한 체계를 확실하게 정립했다.
그 대상에 첩자인 자신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스캇으로서는 마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단은.
절차에 응했다.
다음으로 도착한 장소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대장간이었다.
“이리로 오십시오.”
대장장이였다.
거친 수염을 기르고 안전을 위한 앞치마를 두른 그가, 성난 근육을 꿈틀거리며 스캇의 신체 상태를 살펴보았다.
“전쟁 용병이라더니, 확실히 몸이 좋으시네. 문제는 양쪽 다리의 길이가 맞지 않아서 살짝 틀어져 있다는 것과 손가락이 짧아서 두꺼운 손잡이는 좀 버겁겠네요. 이 정도면 맞춤 제작한 무기가 아니라면 사용이 힘들었겠는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이유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로만 도련님의 사병들을 위한, 맞춤 무장(武裝)을 제작하기 위함이죠.”
맞춤 무장.
눈이 휘둥그레졌다.
몸에 맞는 무장을 제작하는 것 자체는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일반 사병들 전부 맞춤 제작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액수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애초에 맞춤 무장은 ‘기사’와 같은 부류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부의 상징이다.
설마 처음부터, 이런 호화스러운 대우를 받을 줄은 몰랐다.
스캇이 물었다.
“설마 사병들 전부 맞춤 제작을 하는 겁니까? 그랬다간,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비용이야 적지 않게 들겠죠. 이곳이 아무리 ‘대장장이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드미트리일지라도, 사병들 전부를 맞춤 제작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임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일반 병사들은 이미 제작되어 있는 기성품에 몸을 맞추지만, 로만 도련님의 사병들은 다릅니다.”
말을 하면서도.
대장장이는, 꼼꼼하게 스캇의 신체 사이즈를 기록했다.
“이곳 드미트리에서 로만 도련님의 직속 병력은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드미트리에 위험이 닥친다면. 로만 도련님은 항상 최전선에서 그들과 싸우며, 그것은 직속 병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당신과 같은 로만 도련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망치만 잡고 살아서 같이 전쟁터에서 등을 맡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완벽한 맞춤 무장을 만들어 드린다면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담담한 음성은.
진심을 보였다.
대장장이를 비롯한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매일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감사함을 표현하며 살았다.
로만 드미트리.
드미트리의 구세주였다.
철광업의 발전으로 드미트리의 부흥을 이끌었고, 드미트리에 닥친 문제를 직접 해결하며 사람들의 자긍심을 끌어올렸다.
물론 긍정적인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크로노스 제국의 기습적인 공격. 그날 가족을 잃었던 유족 중 일부는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원망하는 감정을 보였다.
적당하게 타협할 줄 알았다면,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에 가족을 잃는 일은 없었다며 결과론적인 비난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들은 금방 감정을 추슬렀다.
로만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을 공격해 수십, 수백 배로 복수했다는 승전보를 들었을 때, 드미트리로 돌아와 전사자들에 대한 확실한 대우를 해 주었을 때,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야말로 자신들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부터 드미트리는 내적으로 견고한 철옹성을 쌓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서라면, 당장에라도 볏짚을 끌어안고 불구덩이에 뛰어들겠다는 사람들이 대거 속출했다.
대장장이.
그도 그중 하나였다.
가족을 잃었고, 슬픔에 빠졌지만, 드미트리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은 그의 가슴에 자부심으로 남았다.
진심을 보였다.
눈앞의 사내.
처음 보았다.
스캇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그가 로만 드미트리를 직속으로 따른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진심을 보일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것이 바로 드미트리의 민심(民心)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드미트리를 처음 경험하는 스캇으로서는, 그 감정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장장이가 말했다.
“절 믿으십시오. 조금만 기다리면, 당신을 위한 최고의 무장을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 * *
놀람의 연속.
화룡점정(畫龍點睛)은 숙소였다.
모든 절차를 끝낸 스캇은, 넋을 잃은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숙소라고요?”
“예. 드미트리의 사병들은 모두 개인실을 사용하며, 각자의 생활을 보장합니다. 만약 가족들이 드미트리에 정착할 경우, 가족과 같이 지낼 수 있는 거처도 따로 마련해 드릴 수 있습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놀랐다.
넓은 평수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공간은, 어떤 상상을 했든 그 이상이었다.
드미트리에 대한 소문은 들었다.
드미트리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확실하게 대우해 준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보상금과 맞춤 무장부터 시작해서 기본적인 생활 환경까지 이렇게 갖추어 줄 줄은 몰랐다.
스캇은 자신도 모르게 침상으로 이끌렸다.
먼지가 쌓인 허름한 여관방 침대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도 충분히 누울 만큼 넓은 침대였다.
푹신했다.
안락했고, 따뜻했다.
“……여보.”
눈물이 핑, 돌았다.
만약.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이 드미트리에 있었다면, 침대에 같이 누워 얼마나 행복한 미소를 보였을까.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위험했다.
크로노스에 있는 가족들은 자신들이 ‘인질’로 붙잡혔음을 알지 못했다.
스캇은 아직 그 정도로 분류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고, 자신이 크로노스를 배반할 경우 그때 크로노스는 망설임 없이 가족들을 해할 것이다.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첩자의 역할을 완수해야만 했다.
드미트리는 미래를 꿈꾸게 했지만, 스캇에게 가족이 없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참았다.
꾹꾹 억눌렀다.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흔들릴 수는 없었다.
일단 적어도 훈련을 모두 마치고, 그때 판단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날.
스캇은 밤이 늦도록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스캇과 마찬가지로,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첩자들 대부분은 그와 똑같은 밤을 보냈다.
* * *
첫 훈련이 소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지금부터 약 열흘간 기초 적응 훈련을 진행하겠다. 낙오는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번 훈련은 모두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수할 것이다.”
그때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분명히 기초 적응 훈련이라고 말했는데, 로만 드미트리가 진행한 첫 번째 훈련은 40kg짜리 군장을 메고 이동하는 행군이었다.
행군은 아주 기초적인 훈련이다.
상식적인 범주 안에서 진행되었다면 스캇은 당황하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행군하는 지형과 앞서 치고 나가는 사람들의 속도였다.
겨우 30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캇은 눈이 팽팽 도는 것을 느꼈다.
“후욱, 후욱.”
‘이런 미친.’
이번 훈련.
산악 행군이었다.
가파르다 못해 기어서 올라가야 할 것 같은 지형을 이동하는 행군이었고, 마나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마나 활용을 철저하게 금했다.
오로지 육체적인 능력으로만 훈련에 임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산전수전을 경험했던 용병 출신이기에 잘 따라가는가 싶었지만, 거의 달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빠르게 치고 나가는 움직임에 어느 순간부터는 턱밑까지 숨이 차올랐다.
“허억, 허억.”
빨랐다.
잠깐만 걸음을 늦추면, 저 멀리 사람들이 멀어질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마다.
크리스가 소리쳤다.
“빨리빨리 따라붙어! 이곳은 전장이다! 만약 너희 뒤에 적들이 따라붙었다면, 혹은 너희가 적을 따라잡는 상황이라면. 40kg의 군장을 메고 있다고 해서, 체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이동할 것이냐! 체력은 생명과 직결된다. 신체적인 한계에 부닥쳐서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차라리 거품을 물고 쓰러져라. 우리가, 너희를 책임지고 끌고 가겠다.”
벼락같은 목소리였다.
스캇은 정신을 차리고는,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문제는.
선임들의 모습이었다.
스캇을 비롯한 신병들은 다들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선임들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아예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많은 훈련을 경험하면서, 그들에게 이 정도의 행군은 ‘기본적인 훈련’에 해당할 만큼의 난이도로 떨어졌다.
경악했다.
사병 테스트에서 선임들을 상대하며 그들이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알았지만, 이렇듯 같이 훈련을 진행하는 상황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강함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훈련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하기에, 사람들이 목격했던 강인한 무력을 보였다.
숨을 헐떡였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보통 일반 지휘관들은 병사들과 훈련을 같이 진행하지 않는데, 병사들의 선두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때마침.
속도를 맞춰서 걷는 ‘헌트’라는 이름의 선임에게, 그에 관해 물었다.
헌트가 웃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지휘관이라는 존재들이 소리만 바락바락 질러 대겠지. 하지만, 드미트리는 달라. 최전선에서 항상 주군을 따라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에, 주군은 자신의 템포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거야.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겨우 이 정도 속도도 맞추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장에서 주군을 따를 자격조차 없는 거라고.”
그제야 알았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상황이.
대륙을 충격에 빠트린,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드미트리의 진실임을.
“최선을 다하라고. 훈련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니까.”
순간.
소름이 돋았다.
첩자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이대로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스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