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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화 (300/615)

300화 선택의 기로 (2)

용병(傭兵).

산전수전의 집합체와 같은 직업이다.

스캇은 용병으로서 살아가며 수많은 전쟁터를 전전했고, 첩자 일을 했으며, 살기 위해서 밤낮으로 산을 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비록 대단한 오라 검사는 아닐지라도, 용병 바닥에서 구른 세월은 그가 일반적인 존재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런데.

겨우 반나절 만에, 스캇은 벌써 한계를 느꼈다.

‘……위험하다.’

숨이 찼다.

입은 바짝바짝 말랐고, 도중에 수분과 당분을 보충하는 것만으로는 밀려오는 현기증을 억제할 수 없었다.

40kg의 군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로만 드미트리는 체력에 한계가 없는 모양인지 선두에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찾아다녔고, 대부분을 가파른 오르막을 향하는 행군에 체력도 벼랑 끝에 몰렸다.

“후욱, 후욱.”

낙오.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대로 쓰러진다면 정말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스캇은 꾸역꾸역 역겨움을 삼켰다.

그때였다.

픽.

털썩.

바로 앞에서 낙오자가 발생했다.

스캇과 같은 출신들은 그래도 체력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지만, 사병 테스트의 합격자 중에는 일반인 출신들도 많았다.

그들로서는 악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정신 줄을 놓아 버리면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고, 스캇은 불안한 눈빛으로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궁금했다.

낙오는 없다고 말한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내가 업어서 갈게.”

“헌트. 너는 군장을 들어.”

“알겠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선임들은 예상했다는 듯이 한 사람은 쓰러진 사람의 군장을, 또 다른 사람은 간단한 조치를 진행한 뒤에 군장을 앞으로 메고 등으로는 사람을 업었다.

그리고는 행군을 속행했다.

한 사람이 기절하고서부터 1분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는데, 그들은 순식간에 대열에 합류하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는 표정을 보였다.

미친놈들이었다.

스캇은 제 몫을 해내는 것도 죽을 지경인데, 쓰러진 사람을 감당하고서도 선임들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대체 그동안 어떤 일들을 경험했단 말인가.

분명히 자신과 같은 일반인이었을 선임들은, 로만 드미트리와 지낸 세월로 인해서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났다.

참았다.

이를 악물었다.

앞에서 부상자를 등에 업고 걸어가는 선임의 뒷모습을 보며,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훈련을 진행할수록.

의지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스캇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겨우 하루.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행군이 끝나고도 훈련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훈련이 종료되었다는 말에 신병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들 숨을 헐떡였다.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체력 훈련에 안색은 창백했고, 어떤 이는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계속해서 구역질을 내뱉었다.

스캇도 예외는 없었다. 몇 번이나 위기가 있었던 그는, 산송장과 같은 얼굴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지옥이었다.

드미트리에서의 첫날이 흘러간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옆에서, 한 동기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씨발, 이게 훈련이야? 이건 고문이야, 고문! 훈련은 체력 증진을 위해 하는 건데, 쓰러진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가면서까지 진행하는 훈련은 사람들의 몸만 상하게 할 뿐이라고. 만약 이런 방식의 훈련이 계속 진행된다면, 진지하게 이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필요가 있어.”

일부 동기들.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체력 훈련이라는 것은 단계가 있는 법인데, 과정을 생략한 극한의 훈련은 당혹스러움을 선사했다.

막말로.

스캇과 같은 사람들은, 첩자의 임무만 아니었다면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따위 생각이라면 그냥 그만둬.”

누군가 생각을 읽은 걸까.

비교적 평온한 안색의 사내가 말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다른 신입과는 다르게 기존에 드미트리의 병사였다가 사병으로 전향한 케이스였다.

불만을 토해 낸 동기가 발끈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말했잖아. 징징거릴 거면, 그만두라고.”

사내의 이름.

랜돌프였다.

랜돌프는, 이죽거리는 얼굴로 동기를 보았다.

“너희는 이 훈련을 왜 진행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단순히 체력적인 우위를 보여 주기 위해서? 아니면, 너희 말처럼 우리를 고문하기 위해서? 등신 같은 새끼들. 이게 드미트리의 일상이야. 로만 드미트리 님의 사병들은 매번 이런 지옥 같은 훈련을 감당하고, 강인하게 단련한 체력을 기반으로 너희가 드미트리로 향하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승리의 전과를 달성했어.”

드미트리 내부에서.

사병들은 논외의 존재였다.

그들이 훈련하는 방식을 바라볼 때면,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사병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도 소문을 들었겠지. 크로노스의 공격으로 드미트리의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그들 중에는 내 친우였던 ‘헨더슨’이라는 녀석도 있었어. 나도, 그리고 드미트리의 사람들도. 더는 그때와 같은 일이 반복되기를 바라지 않아.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강해지는 방법밖에 없어.”

헨더슨을 비롯한 죽음.

사람들은 가슴에 멍울이 남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사상자들을 충분히 대우해 주었지만, 헨더슨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랜돌프는 그런 의미로 사병에 지원했다.

단순히 사병으로서 받는 혜택들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강해져서 헨더슨과 같은 희생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이를 악물었다.

스캇과 같은 인물들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릴 때, 랜돌프는 뒤에서 군장을 받쳐 주며 힘내라고 말했다.

스캇보다 체력이 대단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낙오라는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없애 버렸기에,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선임들은 너희가 지옥 같다고 생각했던 훈련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았어. 쓰러진 사람들을 등에 업고, 군장을 대신 짊어지고. 그렇게 이번 훈련을 끝냈다고. 그건 전장에서도 다르지 않아. 드미트리의 일원이 되는 순간,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도 선임들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야.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동료가 되었고, 전장에서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겨우 이따위 체력 훈련에 불만을 토로하지 마. 단순히 좋은 혜택을 바랐다면, 그건 큰 착각이야. 드미트리는 너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아니야.”

말을 끝냈다.

고개를 돌리고 숨을 고르는 랜돌프의 모습에, 스캇은 말을 잃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동료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동료가 되었다는 말은, 그들의 가슴에 큰 여운을 남겼다.

이제야 조금씩 체감되는 기분이었다.

드미트리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사병으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 * *

열흘이 흘렀다.

낙오자는 없었다.

드미트리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끝까지 참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체를 숨긴 첩자들의 경우에는 무공을 확인할 때까지는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침내 과실을 딸 차례였다.

신입 사병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크리스는, 기초 적응 훈련의 다음 과정인 ‘심법 훈련’을 진행했다.

“일단 간단하게 단전의 개념을 설명해 주도록 하겠다.”

검술 발표회.

그때, 단전의 개념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하지만 이론을 정확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었고, 사병들은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였다.

무공.

검술 혁명의 핵심이다.

앞으로 변화할 미래에서, 드미트리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지를 사람들은 모르지 않았다.

다들 귀를 기울였다. 단전에 마나의 그릇을 만들고, 단전을 통해 마나를 운용한다는 방식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대체 왜 이런 기발한 방식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정답을 들었을 때는 길이 보였지만, 정답을 몰랐을 때는 감히 상상치도 못했던 영역이었다.

이윽고.

“지금부터 너희가 익힐 무공의 이름은 수라(修羅) 심법이라고 한다.”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다들 가부좌를 틀었다.

불편한 자세에 힘든 기색을 보였지만, 크리스의 설명에 따라 어떻게든 수라 심법의 방식을 행했다.

설명은 계속되었다.

수라 심법.

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크리스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스캇은 수라 심법의 설명처럼 마나를 느끼려고 노력했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아.’

심법의 기본 조건은 감응이다.

마나를 느껴야만 다음 스텝을 밟아 갈 수 있는데, 아무리 집중해도 크리스가 설명한 마나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스캇은 오라 검사가 아니다.

용병 일을 하면서 오라 검사가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애초에 재능이 허락하지 않는 영역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한 서른쯤 되었을 때. 오라를 포기했다.

불가능한 일에 돈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은, 용병으로서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고 믿었다.

결국.

한계에 부닥쳤다.

남들에게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를 이 수라 심법이, 자신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시간.

2시간.

3시간.

심법에 집중했다.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훈련에 매진해야 하는 시간이기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스캇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설마.’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차갑게.

피부를 간질이듯 느껴지는 기운에, 심법을 중단한 스캇이 눈을 부릅뜨고는 자신의 단전을 바라보았다.

“내, 내가 지금 마나를 느낀 거야?!”

확실했다.

이건, 기적이었다.

* * *

심장이 뛰었다.

수라 심법을 익힐수록, 그 대단한 효과에 스캇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한평생.

전장에서 살았다.

스캇은 생존을 위해서 오라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크로노스 제국에서 명성을 떨친 오라 검사들에게 값비싼 대가를 치러 가며 가르침을 받았다.

효과는 없었다. 대단한 사람이 가르쳐도, 대단한 기술을 말해 주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 스캇은 이건 사기라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람들은 ‘아무나’ 각성할 수 없기에 오라 검사가 귀중한 존재라고 말했다.

할 말이 없었다.

재능 부족이라는데, 자신이 어찌한단 말인가.

그래서 포기했다.

오라의 각성은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믿었건만, 피부에 와닿는 마나의 감촉은 그를 황홀경에 빠트렸다.

‘알렉산드르의 시대는 끝났어. 겨우 몇 시간 만에 나와 같은 사람도 마나를 느낄 정도라면, 앞으로는 로만 드미트리를 오라의 창시자라고 부르겠지. 수라 심법. 이것을 크로노스 제국에 바친다면 나는 부귀영화를 보장받을 수 있어. 내 역할을 충분히 이행했다고 크로노스도 인정해 주겠지.’

목표를 이뤘다.

이제 정보를 빼돌리면 끝이다.

미리 챙겨 둔 마법 통신기에, 수라 심법을 어떻게 행하는지를 알려 준다면 가족들의 목숨은 안전하다.

하지만.

고민이 들었다.

드미트리가 사람들을 귀하게 여겨 준다는 사실을 떠나, 첩자의 존재를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가르쳐 준 수라 심법의 위력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이런 대단한 기술을 만들어 낼 정도라면.

혹시 앞으로 크로노스 제국이 아니라 드미트리의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 항상 권력의 체계가 뒤바뀌는 대격변(大激變)이 있었는데, 자신은 지금 그 중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갈림길에 섰다.

판단 한 번에, 자신을 비롯한 가족의 목숨이 달렸음을 알았다.

때마침.

훈련이 끝났다.

심법 훈련 첫날의 훈련을 마무리하며, 크리스는 훈련 총괄로서 앞으로의 미래를 말했다.

“당분간은 수라 심법을 기초적인 베이스로 훈련을 진행할 것이다. 만약 빠른 성장세를 보이거나, 혹은 전과를 세우는 존재가 있다면. 그 사람은 특성에 걸맞은 새로운 무공을 가르칠 것이다.”

새로운 무공.

당황스러운 단어였다.

수라 심법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상황에, 다음 단계가 있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 사람이 물었다.

“……새로운 무공이라니요. 이것보다 대단한 무공이 있다는 의미입니까?”

순간.

크리스가 웃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수라 심법을 익혔지만, 자신과 케빈 같은 인물들은 다른 무공을 하사받았다.

그건 다른 사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수라 심법만으로도 충분했으나,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면전 이후에 그들에게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크리스가 말했다.

“네 물음에는 전제가 틀렸다. 수라 심법은 애초에 대단한 무공이 아니다. 드미트리는 이미 무공의 체계를 정립했고, 그중 수라 심법은 ‘초급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초적인 무공에 불과하다.”

그 말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진실 여부를 떠나, 이건 도무지 덤덤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로만 드미트리는 마교의 시스템을 도입했다.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단전의 개념을 밝혔다면, 드미트리는 그와는 비교되는 특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크리스의 말은 옳았다.

수라 심법은.

전생에 ‘일반 공개 대상’에 포함되었을 만큼, 매우 기초적인 하급 무공에 불과했다.

저울이 한쪽으로 확 기울었다.

드미트리와 크로노스 사이에서 고민하던 첩자들로서는, 마음속에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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