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선택의 기로 (3)
그날 저녁.
개인 숙소에서, 스캇은 심각한 표정으로 ‘마법 통신기’를 내려다보았다.
“……보고할 것이냐, 말 것이냐. 첩자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냐, 드미트리의 사병으로 남을 것이냐.”
지난 열흘.
드미트리의 저력에 감탄하는 시간이었다.
선임 사병들의 괴물 같은 체력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스캇은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임무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크로노스 제국의 압박감은 대단했다.
최근 드미트리가 아무리 대단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한들, 크로노스가 대륙 제일의 강국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심법 훈련 이후부터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겨우 3시간 만에 마나를 느끼기 시작하자,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오라 검사들은 나를 보고 오라의 재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어. 그런 내가 하루도 걸리지 않아 마나를 느낄 정도라면, 오라 발현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도 불가능한 영역은 아니겠지. 만약 드미트리가 수라 심법을 기반으로 오라의 대중화를 이루어 낸다면? 드미트리는 수천수만의 오라 검사들을 보유하게 될 것이고, 크로노스 제국을 압도하는 전력을 갖추는 것은 시간문제야.’
드미트리와 크로노스.
현재는 둘의 차이가 명백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드미트리는 빠르게 크로노스를 뒤쫓을 것이다.
혁명이었다.
알렉산드르의 크로노스가 ‘오라’를 창시하면서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전력을 갖추었던 것처럼, 드미트리는 분명히 새로운 미래를 주도할 것이다.
게다가 크리스의 발언대로라면 수라 심법은 하급 무공에 불과하지 않은가. 스캇은 고민에 휩싸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적을 철저하게 응징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정보를 빼돌리는 선택이 정말 안전한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해가 저물었다.
머리를 헝클이고, 손톱을 물어뜯었지만, 가족의 안위가 걸린 문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결국.
‘크로노스 제국은 나와 내 가족들의 안위를 보장해 주지 않아. 그들은 일이 조금만 틀어져도 내가 드미트리에서 잘못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지만, 드미트리는 끝까지 신뢰를 보인다면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 분명해. 쓰러진 사람들의 군장을 대신 짊어졌던 것처럼. 나는, 그런 사람들의 동료로 남고 싶어.’
결단을 내렸다.
정보를 빼돌리고 드미트리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크로노스 제국의 지인에게 연락해, 어떻게든 가족들을 빼돌리는 방법이 미래를 위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삑.
“파이크. 내 통신을 확인하는 대로, 사람들 몰래 내 가족들을 빼돌려 드미트리로 도망쳐. 이곳에서 내가 확인한 드미트리의 미래는 찬란해. 내 안위는 관심도 없는 크로노스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보다는, 드미트리의 찬란한 미래에 목숨을 걸겠어. 그러니까. 너도 같이 이곳으로 넘어와. 드미트리에서, 우리를 귀하게 여겨 줄 나라에서 다시 시작해 보자.”
통신 상대.
용병 동료였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그에게 미리 대비를 해 두라고 말해 두었었다.
그런데.
삑.
[스캇. 드미트리의 ‘정식’ 일원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통신기 너머의 음성.
파이크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스캇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통신기를 떨어트렸다.
툭.
“……이, 이게 무슨.”
충격적인 상황.
그는 한동안, 넋을 잃은 얼굴로 마법 통신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그 시각.
크리스는 본인의 집무실에 있었다.
‘오늘이 기점이다. 수라 심법을 배운 첩자들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본인들의 미래를 선택하겠지.’
첩자의 존재.
받아들였다.
그들로 인해 수라 심법이 유출되는 가능성을 고려하면서도, 로만 드미트리는 수라 심법을 공개했다.
그것은 의도적인 메시지를 보였다.
만약 유출된다면 드미트리의 위엄을 세상에 알릴 것이고, 동시에 첩자들을 대하는 태도로 드미트리의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정보를 빼돌린 존재들은 철저하게 대가를 치를 생각이었다.
먼저 손을 들었던 몇몇 첩자들이 살아서 돌아갔다고 해서, 드미트리 내부에 끝까지 남아 정보를 빼돌린 존재들을 살려 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벌을 언급했다.
첩자로서 분류한 존재들은, 하오문의 감시 속에 시험대에 올랐다.
‘나를 비롯한 수하들은 처음부터 수라 심법의 유출 가능성을 차단하자고 말했지만, 주군은 유출되는 것은 개의치 않으셨지. 수라 심법을 일반 병사들에게 공개한 순간부터 유출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다만. 결과에 따른 책임은 확실히 묻겠다고 하셨어. 첩자임을 알고도 방관을 택했지만, 첩자의 임무를 행동으로 옮기는 적들은 더는 살려 둘 이유가 없지.’
방금.
스캇의 상황을 보고받았다.
스캇은 마법 통신기를 통한다면 드미트리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미리 설치해 둔 마법 방해로 인해 그가 원하는 장소로 통신을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약에 크로노스 제국에 연락을 취했다면.
문을 열고 들이닥친 병력에, 단번에 목이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배신하기 좋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크리스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밖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인물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단을 내린 첩자일 확률이 높았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존재는, 크리스의 예상처럼 비장한 표정을 보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제게 드미트리를 진심으로 따를 기회가 있겠습니까?”
그는 바로.
멤피스 가문의 기사단장이었던, 프레드였다.
* * *
프레드.
그의 사연은 복잡했다.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크로노스를 떠난 것은 맞지만, 그게 진실의 전부는 아니었다.
프레드가 말했다.
“저는 애초에 크로노스 황제의 사람입니다. 그분의 명령을 받아 멤피스 후작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드미트리가 사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이곳으로 보내졌습니다. 솔직히 이곳에서 지내며 생각이 많았습니다. 검술 발표회에서 단전의 개념을 망설임 없이 공개하는 로만 드미트리 님의 결단에 감탄했고, 사람들을 진정으로 대해 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드미트리를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이 선택으로 인해 죽을지도 모릅니다.”
공포를 삼켰다.
프레드는 말하면서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런 모습을.
크리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드미트리로 같이 넘어온 사람들은 제 진짜 가족이 아닙니다. 그들은 연기자에 불과하고, 크로노스 제국은 제 가족들을 인질로 붙잡고 있습니다. 만약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제 가족들은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가족들을 살릴 방법이 있다면 저를 거두어 주시고, 그게 아니라면 4차 테스트에서 첩자들을 살려 주었던 것처럼 저를 이대로 보내 주십시오. 수라 심법에 대해서는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저는 크로노스로 돌아가 가족들을 살릴 방법을 찾을 뿐, 드미트리를 배반하지는 않겠습니다.”
감정에 호소했다.
그는 드미트리를 위해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본인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위험한 선택임을 알면서도 진실을 밝혔다.
만약 가족을 살릴 방법이 없다면.
끝이었다.
드미트리가, 순진하게 자신을 크로노스 제국으로 돌려보낼 확률은 낮았다.
크리스가 말했다.
“네가 어떤 인물인지, 드미트리로 데려온 가족이 가짜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다. 프레드. 네가 정녕 드미트리의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지금부터 물어보는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라. 우리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크로노스 황제는 ‘정신적인 제약’을 통해 사람들을 다룬다는 정보가 있었다. 최근에 네 기억의 일부가 소실되거나, 이질적인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나. 단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내게 진실을 말해라.”
하오문.
그들은 크로노스 깊숙이 파고들었다.
수많은 정보를 분류하면서, 크로노스 황제의 주변 인물들이 공통적인 문제점을 호소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기억의 소실.
기억하지 못하는 행동.
정신적인 제약이 분명했다.
그때 행한 행동이 크로노스 황제를 위한 일이라는 사실은, 정신적인 제약을 통해 사람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스캇과 같은 인물들은 그럴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프레드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적인 제약이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프레드가 놀랐다.
“……있습니다.”
머릿속에 번뜩.
최근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의 아내는, 제국으로 떠나기 전에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 같다면서 걱정하는 반응을 보였었다.
크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네가 살 길을 말해 주도록 하지.”
* * *
장소를 옮겼다.
지하로 이동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는데, 그 안은 마치 낮처럼 환하고 수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광경이었다.
드미트리의 지하에,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이리도 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이곳이 바로.
하오문의 본거지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처음 루카스에게 정보 길드 창설을 명령한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하오문의 규모가 급격하게 성장했다.
막대한 정보를 다루다 보니 본거지로 활용할 공간이 필요했다.
펠릭스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총동원되었고, 마법적인 침투가 이루어지지 않는 비밀스러운 공간을 만들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말했다.
드미트리의 공방이 해가 저물 때까지 불을 뿜는다면, 지하는 단 한 번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잠든 시간에도.
하오문의 사람들은 정보를 분류했다.
그로 인한 막대한 정보력은, 크로노스 황제가 정신적인 제약을 활용한다는 실마리까지 얻어 냈다.
프레드가 말했다.
“……저를 이런 곳에 데려와도 되겠습니까? 정신적인 제약을 받고 있다면, 통제를 빼앗겼을 때 머릿속의 정보들이 고스란히 전달될 텐데요.”
“상관없다. 이곳은 공간 이동 마법이나 링크 같은, 그 어떠한 마법적인 기운이 침투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만약 마법 방어벽을 뚫는다고 할지라도. 드미트리는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프레드와 마주 앉은 크리스가 본론을 말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문제부터 해결하도록 하지. 네가 드미트리를 위해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면, 크로노스에 있는 드미트리 정보 길드의 사람들이 네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실패할 확률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네 가족의 위치와 주변 인물들을 매수한 상태이고, 희생을 각오한다면 성공할 확률이 낮지만은 않다고 말해 줄 수는 있다.”
“대체 언제 그런 준비를…….”
“4차 테스트가 끝나고. 사병 모집에 지원한 사람들이 휴가를 보낼 때, 우리는 이미 너희에 대한 정보 분류를 끝내고 선택에 따른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일주일의 휴가는 그런 의미였다. 너희가 드미트리에 합류했을 때, 어떤 선택을 내리든 완벽하게 대응할 준비를 갖출 시간.”
진심으로 놀랐다.
드미트리는.
안일하지 않았다.
과감하게 일을 진행하면서도, 세세하게는 어떻게 대응할지를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철옹성(鐵甕城).
견고한 탑을 쌓아 갔다.
로만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드미트리 공국은 제국의 기반을 갖추어 나갔다.
“그리고 너와 같은 첩자 중에 ‘정신적인 제약’이 걸려 있는 부류들은, 이곳에서 한 달간 생활하며 제약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릴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성공한 예시가 있다. 항마(降魔)의 공부는 정신적인 단단함을 만들어 내고, 너를 제약하는 미지의 힘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이는.
로만 드미트리의 방책이었다.
알렉산드르가 사용하는 정신적인 제약은 강력한 억제력을 발휘하지만, 소림이 만들어 낸 항마의 공부는 제약에 대항하는 가장 최적의 해결책이었다.
정파 무림인들을 공포로 밀어 넣었던 환마조차도, 항마의 공부로 무장한 소림의 정신력은 뚫어 내지 못하지 않았던가.
소림을 무너트리며.
백중혁은 그들의 무공을 얻었다.
전생에는 특별히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 알렉산드르의 정신 제약을 끊어 버릴 수단으로 적합했다.
사병 모집.
검술 발표회.
일련의 과정은 완벽한 준비 하에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과감하다고 놀랐지만, 드미트리는 모든 변수에 대응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감탄했다.
프레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 가족들을 구출하고, 정신적인 제약을 해제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저를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시는 겁니까?”
“아니.”
웃었다.
크리스는, 언제나 그렇듯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다만.
“프레드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오라 검사인지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드미트리를 따르겠다고 말하는 너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주군을 직접 모시는 인물들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네게 어떤 일이 벌어지든. 네가 모든 진실을 밝히고 드미트리를 위해 충성을 맹세한 순간부터, 드미트리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일었다.
크로노스 제국에서는 권력의 중추에 있으면서도 불안한 날이 많았는데, 크리스는 드미트리를 대표해 드미트리가 자신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정말, 정상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드미트리의 포용력은, 그들이 언제고 제국으로 도약하리라는 강한 확신을 주었다.
프레드가 말했다.
“드미트리를 따르겠습니다. 앞으로, 드미트리를 위해 목숨을 걸겠습니다.”
진심을 토해 냈다.
열의에 찬 프레드의 눈빛에, 크리스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앞으로 한 달간 항마의 공부를 끝내면, 그날 네 가족을 눈앞에 대령해 주지.”
“감사합니다.”
따라 일어섰다.
프레드.
그는 지금부터 드미트리의 사람이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는데, 프레드는 맞은편에서 피로 범벅이 된 사내가 끌려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
눈을 부릅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에 의해 질질 끌려오는 존재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관에서 사람들과 왁자지껄 떠들던 사내.
첩자임을 밝히고, 4차 테스트를 포기했던 사내.
드샨.
그가, 죽어 가는 모습으로 프레드의 눈앞에서 끌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