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2화 (302/615)

302화 선택의 기로 (4)

드샨의 눈이 커졌다.

프레드를 발견한 그는, 병사를 뿌리치더니 헐레벌떡 달려 나와 프레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제, 제발. 제발 살려 줘! 이 사람들한테 부탁해서 나를…… 악!”

콱.

뒤에서 병사가 옷을 잡아끌었다.

병사는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하더니, 바둥거리는 거구를 억지로 끌고 프레드를 그대로 지나쳤다.

뒤에서 악악, 비명이 계속해서 들렸다.

4차 테스트에서 첩자임을 밝히고 드미트리를 빠져나갔던 드샨의 모습이 떠오르자, 프레드로서는 방금 벌어진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드미트리의 명예를 걸었던 약속이 설마 거짓이었던 것입니까?”

드샨은 첩자다.

첩자를 상대로 약속을 지킬 이유는 없지만, 프레드 또한 첩자이기에 당혹스러운 마음이 컸다.

크리스가 말했다.

“우리는 약속대로 드샨을 살려 줄 생각이었다. 그가 드미트리에서 보고 들었던 것을 묻어 두고, 입을 꾹 닫고 살았다면 말이야. 드샨은 드미트리를 떠나 아델리안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발할라’로 향하는 워프 일정을 예약한 뒤에, 마법 통신을 통해 첩자 의뢰를 넣었던 상대에게 연락을 취했지. 이후부터는 네가 본 그대로다. 드미트리의 정보 길드는 첩자들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드샨이 약속을 어겼다는 판단에 그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프레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이 메말랐다.

담담히 내뱉는 크리스의 말에, 그는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드미트리는 단 한 번도 첩자들의 존재를 방관하지 않았다. 첩자들로 인해 어떤 변수가 생기든 상관이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우리의 존재를 언제든지 처단할 준비도 끝냈겠지.’

소름이 돋았다.

크리스는 분명.

사병 모집에 합격한 사람들에 대한 정보 분류를 끝냈고, 그들의 선택에 따른 만반의 준비도 갖추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게 첩자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같은 가족들이 인질로 붙잡힌 사람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크로노스를 배신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진실은 달랐다.

선택에 따른 만반의 준비는 부정적인 상황도 포함되었다는 의미이고, 만약 자신이 드미트리의 정보를 빼돌렸다면 크리스가 매수했던 존재들은 가족을 해쳤을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드미트리가 생각보다 무섭다는 사실은, 복잡한 감정을 선사했다.

처음에는 놀랐고.

두려움이 일었다.

당혹스러웠고,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혼란스러웠다.

그러고는.

안도했다.

이토록 철저한 일 처리라면, 드미트리에게 미래를 맡기는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프레드.”

크리스를 보았다.

크리스는 프레드를 바라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오늘을 기억해라. 드미트리는, 순진하리만큼 좋기만 한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 * *

첩자들의 거취 문제로 떠들썩할 그때.

훈련장에서 홀로, 수련에 몰두하는 존재가 있었다.

팟.

콰르르르릉.

검이 밤하늘을 갈랐다.

땀방울과 함께 흩뿌려지는 오라에, 아레스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눈빛을 보였다.

“……내가 찾았던 정답이 드미트리에 있었다니.”

아레스.

검술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는, 알렉산드르의 방식에 의문을 가진 뒤에 ‘그만의 방식’을 만들어 갔다.

무분별한 분출보다는 정리되어 있는 오라를.

체내에 마나를 퍼트리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마나를 통제할 수단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가 대륙 십이검의 일원인 슈나이더를 쓰러트린 사건은 그의 방식이 옳았다는 증거였지만, 아레스는 아직도 정답을 찾지 못했음을 알았다.

수십 년.

검에 미쳐 살았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검만을 생각하던 그에게, 드미트리의 가르침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수라 심법은 내가 찾던 이상(理想)이야. 마나의 통제는 항상 해결하지 못했던 숙제였는데, 수라 심법은 마나를 저장하는 공간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마나를 분출하는 수백 가지의 길목을 제시했어. 이는 절대 한두 해로 완성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야.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어떻게, 이토록 완벽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거지?’

놀라웠다.

스캇과 같은 인물들은 3시간이 걸려 마나를 느꼈다면, 아레스는 수라 심법의 방법을 따르자마자 마나를 느끼고 그것을 유도했다.

겨우 1시간.

단전에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마나가 쌓였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아레스는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전율에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경악했다.

수라 심법은 기적이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자신이 상상했던 많은 것들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수라 심법이 하급 무공에 불과하다는 게 정말 사실일까.’

척.

검을 거두었다.

수라 심법을 기반으로 한 검술은 파괴적이었고, 최근 제자리를 맴돌던 자신이 한발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수라 심법이 하급에 불과하다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수라 심법만으로도 신세계를 보았는데, 크리스는 그 이상이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이미 무공에 관하여 압도적인 위치를 선점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단전의 개념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첩자들을 상대로 수라 심법을 가르친 것처럼 그 정도는 로만 드미트리가 이룬 업적에 아무것도 아닌 수준일 수도 있다. 로만 드미트리. 네 정체는 대체 뭐지? 아직 서른도 되지 않는 나이에, 어떻게 기존의 체계를 부정하면서도 완성도가 높은 체계를 만들어 낼 수가 있지?’

아레스의 방식.

알렉산드르의 가르침을 부정한다고는 하나, 결국은 알렉산드르의 것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달랐다.

사람들이 천재라고 부르는 자신조차도 어렴풋이 상상만 하는 체계를, 로만 드미트리는 완벽하게 현실로 만들어 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알렉산드르의 방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가던 아레스이기에, 수라 심법의 가르침은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레스는 어느 정도 가르침을 받고 드미트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검사로서의 명예는, 그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알렉산드르를, 역사의 뒤편으로 밀어 버릴 위대한 업적을.’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알렉산드르와 달랐다.

조금의 허점도 없는, 완벽한 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레스는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배울 것이 있는 동안에는. 당분간은 드미트리에 머무르자.’

결단을 내렸다.

로만 드미트리를 인정하고.

그에게 배울 것이 있음을 받아들였다.

평생을 드미트리에 충성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드미트리를 위해 헌신할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예상이나 했을까.

그와 비슷한 이유로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크리스라는 선례가 있었음을.

슥.

검을 거두었다.

밤공기가 찼다.

아레스는 자신의 미래는 예상하지 못한 채, 걸음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 * *

크로노스 황제.

아니, 알렉산드르는 ‘빙의’한 채로 멤피스 후작의 보고를 받았다.

“……드미트리로 보낸 첩자들이 모두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통신의 문제로 여겼습니다만, 드미트리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보고로 보아 아무래도 변절(變節)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멤피스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분노하고 있을 크로노스 황제의 얼굴을 감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전부 드미트리를 택했단 말이지.”

사병 모집.

크로노스는 수백의 첩자를 보냈다.

대부분은 4차 테스트까지 통과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스캇을 비롯한 적지 않은 인원이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 무공을 빼돌리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돌아오는 연락은 없었고, 멤피스 후작은 결국 변절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황당했다.

크로노스 제국의 첩자들이.

각자 변절의 리스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드미트리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조각들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

드미트리에 침투한 조각들.

그들과 연결이 원활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는 첩자들이 모두 실패하더라도 무공을 빼돌릴 자신이 있었는데, 조각들의 통신 두절은 당혹스러움을 선사했다.

그들이 변절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알렉산드르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크로노스는 제국(帝國)이다.

일반적인 나라와는 다르기에 제국의 칭호가 붙었고, 사람들은 그런 크로노스 제국을 우러러보았다.

권력의 땅.

카이로, 드미트리, 헥토르 등등 그런 같잖은 나라에서 출세하는 것보다, 크로노스 제국에서 성공하는 것이 대륙 어디에서도 목을 뻣뻣이 세울 만큼의 업적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흐름이 변하고 있었다.

드미트리를 상대로 연달아 패배하고 전쟁 보상금으로 50만 골드라는 거금을 지급한 이후부터, 사람들은 크로노스 제국을 더는 ‘압도적인 권력’을 지닌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균열이 일었다.

크로노스도 완전하지 않다는 선례는, 첩자들의 배신이라는 참담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반복되었던 역사에서 크로노스 제국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를, 멍청한 인간들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세상은 자신의 분노를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멤피스 후작.”

“예.”

“드미트리에 투입한 첩자들을 모두 폐기한다. 그들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사람을 불러들여, 크로노스를 배반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명확히 보여 주어라.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크로노스를 이탈한다고 해서 크로노스가 흔들릴 여지는 없다. 크로노스는, 언제나 대륙의 정점에 있을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멤피스 후작이 물러났다.

그리고 며칠 뒤.

멤피스 후작은, 창백한 얼굴로 첩자들의 가족이 모두 도망쳤다는 보고를 전해 왔다.

* * *

음침한 공간.

알렉산드르가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주변의 공간을 밝혔다.

재단(齋壇)이었다.

검붉은 형태의 그것을 바라보며, 알렉산드르는 웃었다.

“앞으로 1년. 1년이면 천년대계를 완성한다.”

오랜 옛날.

알렉산드르의 몸을 차지하고,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면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그때.

알렉산드르는 불멸을 바랐다.

전생에는 가지지 못했던 삶을 살았기에 영원하길 바랐고, 비루하면서도 영원한 것이 아닌 군림하는 삶만이 생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르는 흑마법을 받아들였다.

불멸자로서 살아가며, 알렉산드르는 황실의 후손들을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전통을 만들었다.

“황실의 후손들은, 성인식을 치르는 날 선조들의 혼을 기리는 의식을 통해 제국의 부흥을 빌어야 한다.”

현 크로노스 황제.

그도 마찬가지였다.

오라 검사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평가받던 그는, 성인식을 치르는 자리에서 선조의 혼인 알렉산드르에게 잠식당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크로노스 황제는 수많은 조각 중 하나가 되었다.

알렉산드르는 그렇게 크로노스 황제를, 그의 아버지를, 그의 할아버지를.

역사에 알렉산드르가 죽었다고 기록되었던 시점부터, 황제라고 불리는 이들을 손아귀에 넣었다.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백 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이 망각의 늪에 빠져서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동안, 이 재단에는 피와 죽음이 쌓여 갔다.

알렉산드르의 계획도 차근히 진행되었다.

어둠의 마력은 점점 강해졌고, 최근에 세계수의 힘이 급속도로 약해지면서 천년대계를 실현시킬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로만 드미트리.

왕국 연합.

무의미했다.

앞으로 1년 뒤면, 그들은 오라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이 알렉산드르가 그동안 샐러맨더 대륙을 주도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마음껏 날뛰어라. 네가 아무리 발악해도, 오래전부터 예정되었던 미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너를 넘어설 무공과 드미트리를 무너트릴 재앙으로 천년대계를 완성할 것이다.”

웃었다.

활짝 웃는 얼굴은, 광기로 물들었다.

“그날을 기대하거라.”

꾸르르륵.

재단에서 마력이 일었다.

어둠은 증식했고.

그것은 어느새, 알렉산드르의 존재를 집어삼켰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드미트리는 안정을 되찾았다.

첩자들의 이슈는 대부분 정리되었고, 드미트리의 사병들은 본격적으로 훈련에 임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그 무렵.

세 명의 손님이 드미트리를 찾았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시각.

첫 번째로 드미트리를 찾은 손님은, 골든 뱅크(Golden Bank)의 은행장인 호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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