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세 명의 손님 (1)
세간에 알려진 호프만의 이미지는 탐욕(貪慾)의 덩어리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호프만은 명성에 걸맞은 외형을 보였다.
살은 뒤룩뒤룩 쪄서 뱃살이 튀어나와 있을 것이고, 두세 개로 접힌 턱살은 번들거리는 기름과 잘 관리되지 않은 수염으로 호프만을 마치 식탐을 부리는 돼지로 표현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잘 관리한 중년의 남자가, 동그란 안경을 올려 쓰며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최근, 드미트리의 행보에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전사들의 나라라고 불리는 발할라조차도 크로노스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드미트리는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전쟁 보상금을 받아 냈습니다. 그리고 ‘검술 발표회’까지. 골든 뱅크는 대세를 거스르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이제는 드미트리가 새로운 대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골든 뱅크는 계산이 빨랐다.
급변하는 대륙의 정세에, 그들은 밤낮없는 회의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드미트리는 앞으로 크로노스, 발할라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능력이라면 분명히 그러한 업적을 이루시겠지만, 만약 그 과정에 저희 ‘골든 뱅크’와 같은 후원자가 있다면 조금 손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제가 드미트리를 찾은 이유입니다. 골든 뱅크는 드미트리와의 협력을 바랍니다. 드미트리가 골든 뱅크와의 미래를 생각하겠다고 말씀하신다면, 드미트리의 금전적인 문제를 저희가 모두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발언이었다.
골든 뱅크는 부의 상징이다.
그들의 보고에는 대해(大海)와 같은 금화가 쌓여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부를 이룩했다.
이건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게다가 드미트리가 최근에 연달아 터진 전쟁과 레드포드 왕국, 전쟁 보상금 명목으로 막대한 돈을 사용하면서, 아무리 대부호라고 불리는 드미트리라 해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시기가 맞았다.
드미트리가 돈이 필요한 시기에, 골든 뱅크는 드미트리를 높이 평가했다.
호프만이 덧붙였다.
“골든 뱅크는 드미트리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드미트리가 생각하는 미래에 골든 뱅크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저희는 당장 ‘100만 골드’ 정도를 무이자로 융통해 드릴 수 있습니다. 파격적이지 않습니까? 대륙의 약소국들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액수를, 저희는 순수한 호의를 위해 내어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명백하게 드미트리에 유리한.
얼굴에 웃음을 보이며 손을 맞잡는 순간, 드미트리는 100만 골드의 여유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
“그러니까, 크로노스와 드미트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겠다는 의미인가.”
* * *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딱딱하게 굳어 가는 호프만의 표정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골든 뱅크는 그동안 크로노스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왔다. 단순히 상생하는 관계를 넘어서, 너희는 ‘레드포드 왕국’의 사건 당시에 노골적으로 크로노스 제국을 도우려는 모습을 보였다. 호프만. 골든 뱅크의 은행장이기에, 그때의 계획은 너의 머리에서부터 비롯되었겠지. 레드포드 왕국이 골든 뱅크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면, 너는 드미트리를 찾아와 오늘처럼 협력을 입에 올렸을 것 같나.”
예민한 문제였다.
레드포드 왕국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폭동의 원인은 크로노스 제국과 골든 뱅크였다.
그때의 계획.
반인륜적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레드포드 국왕의 자식을 죽이고, 마지막 남은 왕자의 목숨을 담보로 국왕에게 방탕한 생활을 강요했다.
국왕은 술을 퍼먹고 여자에 빠져 살며, 도박 빚으로 레드포드 왕국을 나락으로 빠트렸다.
골든 뱅크는 크로노스 제국의 계획에 불을 붙였다.
담보로 잡을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막대한 돈을 빌려줌으로써, 레드포드 왕국을 뒤에서 힘껏 밀어 버렸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레드포드 왕국은 멸망하고 왕국 연합은 와해되어 버렸을 것이다.
크로노스와 골든 뱅크는.
같은 배에 탔다.
그것을 지적하는 말에, 호프만은 싸늘한 감정을 웃음으로 표현했다.
“레드포드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저는 당연히 드미트리를 찾지 않았을 겁니다. 왕국 연합의 와해는 크로노스 제국의 부흥으로 직결되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조금 실망스럽군요. 저는 과거의 악연을 운운하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 님과 앞으로의 미래를 말하고 싶습니다. 레드포드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현재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이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치부를 숨기지 않았다.
떳떳했다.
골든 뱅크의 강점은, 더러운 과거를 묻어 버릴 만큼 강력했다.
“미래를 보십시오. 한때 우리가 어떤 일로 뒤얽혀 있었든 간에, 골든 뱅크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겠다는 약속 하나만으로 100만 골드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희가 철없는 어린아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상대의 얼굴을 힘껏 때렸다고 해서, 일 년이고 십 년이고 그 일을 가슴에 담을 나이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분명,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어쭙잖은 설득이 아니었다.
명확한 보상과 실리적인 관계.
호프만은 골든 뱅크의 은행장으로서 살아가며, 권력자들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았다.
다만.
상대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었다.
실리적인 이득을 떠나, 단 하나의 사실이 로만 드미트리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니. 우리는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없다. 나는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리길 바라고, 너희 골든 뱅크는 끝까지 크로노스 제국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못하겠지. 너희가 바라는 것은 드미트리와의 미래가 아니다. 크로노스와 드미트리 중 누가 대륙의 실세가 되든 간에,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변수를 ‘100만 골드의 안전망’으로 대비하려는 속셈이겠지. 호프만. 드미트리에 있어 ‘적의’를 보인 자들과 협력하는 모든 존재는, 그 어떠한 타협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오실 문제가 아닙니다! 대륙의 역사를 되돌아보십시오. 대륙을 주도하는 지도자들은 항상 골든 뱅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골든 뱅크는 중립의 세력이고, 킹 메이커(king maker)입니다. 그냥 입바른 말 한마디면 엄청난 이득을 얻으실 텐데, 이렇게 일을 망칠 필요가 있으십니까?”
“너희와의 관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로만 드미트리가 사나운 기세를 보였다.
아군과 적.
둘의 경계에는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
골든 뱅크가 크로노스 제국을 적극적으로 도운 순간부터, 아군으로 받아들인 레드포드 왕국이 골든 뱅크와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은.
드미트리의 방향성을 정했다.
적과의 타협으로 유리한 상황을 도모하는 것은, 로만 드미트리가 말하는 ‘정점’의 자리에 오르는 방식과는 달랐다.
힘으로 찍어누르고.
짓밟는다.
상대가 강할수록, 정점의 자리에 올랐을 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드미트리에게 있어 타협은, 타협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일방적인 이득을 취할 때밖에 없다.
“골든 뱅크. 난 너희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간.
호프만은 말을 잃었다.
얼굴이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달아오르더니,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오늘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골든 뱅크는, 절대 원한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홱.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싸늘한 음성이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멈춰.”
로만 드미트리가.
호프만을 바라보며, 살의를 보였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내게 적의를 보이고도, 드미트리에서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 * *
당황했다.
살의(殺意).
이 자리에서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말에, 호프만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지금 저를 죽이겠다는 말입니까? 로만 드미트리 님. 아니, 로만 드미트리. 나는 골든 뱅크의 은행장이다. 나를 죽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하는 거지? 단순히 한 명의 목숨을 없애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골든 뱅크의 모든 자금이 드미트리를 말려 죽이기 위해 사용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력은 금은보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관계를 뜻하고, 그 관계들은 드미트리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
유의미한 협박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채뿐만 아니라, 돈이 필요한 모든 과정에 골든 뱅크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
그중 하나.
만약 상업에서, 골든 뱅크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이 드미트리와 관계를 끊어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질 좋은 철광석을 보유할지라도 그걸 살 사람이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돈은 말라 갈 것이고, 대부호라고 불리는 드미트리일지라도 상업의 붕괴 속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
로만 드미트리가 다리를 꼬았다.
호프만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왜 왕국 연합을 창설했다고 생각하지?”
“……그게 무슨.”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나는 그와 반대되는 왕국 연합을 형성했다. 그것은 단순히 약소국들의 안전망을 형성하기 위함이 아닌, 너희 골든 뱅크의 수작질을 대비하기 위한 판단이었다. 너희로 인해 상업의 붕괴가 일어날지라도, 왕국 연합과의 관계로 우리는 다시 회복할 수 있다. 네 말처럼 처음에는 고비가 찾아오겠지. 하지만 너희로 인한 공백을 메우고 나면, 골든 뱅크의 위상은 옛날과는 똑같지 않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판도를 읽었다.
어떠한 결단을 내렸을 때, 그로 인한 파급 효과를 계산에 넣었다.
“호프만. 다시 한번 묻겠다.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살려 줄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 그건.”
말을 더듬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미쳤다.
지금 말을 잘못했다가는, 세간의 소문처럼 그는 정말로 자신의 목을 날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전장의 악마.
로만 드미트리의 명성이었다.
자신이 탐욕의 덩어리라고 불리듯, 로만 드미트리의 살의는 진짜였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권력자로서 살아온 호프만은, 골든 뱅크의 후광이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하는 상황을 대비하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지금부터 하나 제안하도록 하지. 네 목숨을 100만 골드에 팔겠다. 골든 뱅크가 그렇게 많은 돈을 보유하고 있다면, 이 자리에서 100만 골드를 지급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네 목숨을 챙겨라. 어떤가. 내 살의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하게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거래’라고 생각하는데.”
“100만 골드라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판단한다. 골든 뱅크 은행장의 목숨값이라면, 일반적인 기준과는 다르겠지.”
선을 넘었다.
호프만은 분노로 얼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로만 드미트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이를 악물었다.
처음부터 잘못 판단했다.
드미트리는 사지(死地)였다.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발을 들인 순간부터, 호프만의 뜻대로 일을 진행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거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 * *
호프만이 떠났다.
방금의 거래.
무모하고, 선을 넘었다.
이로 인해서 골든 뱅크와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겠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개의치 않았다.
만약 호프만을 죽여서 얻는 이득이 있었다면. 그는 드미트리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골든 뱅크는 권력에 기생하는 벌레다. 벌레와의 타협은, 내 몸을 썩어들어 가게 할 뿐이지.’
어차피.
앞으로의 상업은 골든 뱅크와의 협력을 배제해야만 한다.
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려고 들어도, 드미트리만의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왕국 연합의 결성은 유의미했다.
만약 크로노스와 발할라 제국이라는 좋은 거래처를 잃을지라도, 나머지 왕국들이 어느 정도의 공백은 충분히 메울 수 있다.
물론.
완벽한 대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쟁을 결심한 순간부터, 일부는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생의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
‘골든 뱅크의 서약서는 목숨보다 중요하다. 호프만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100만 골드를 지급할 테고, 그들은 우리와의 거래를 위해 이미 그 돈을 준비해 두었겠지. 100만 골드는 골든 뱅크의 방해 공작에 대응할 자금으로 사용하면 된다. 100만 골드를 모두 소진했을 때는, 드미트리를 비롯한 왕국 연합은 골든 뱅크와 제국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낼 것이다.’
판도를 뒤엎었다.
크로노스와 휴전 협력을 맺은 지금이야말로,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한 판도를 만들 좋은 기회였다.
차곡차곡.
기반을 만들어 갔다.
검술 발표회.
골든 뱅크.
왕국 연합.
모든 선택은, 하나로 뒤엉켜 거대한 목적에 한발 다가갔다.
그렇게 호프만은 드미트리를 떠났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두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도련님. 에드윈 헥토르 왕자가, 도련님을 만나 뵙기를 청했습니다.”
에드윈 헥토르.
의외의 손님이었다.
지난 왕국 연합 회의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다.
그리고는.
“제게 상단전(上丹田)에 대해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본인의 목적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