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세 명의 손님 (3)
셰피르와의 전투.
그를 상대하며, 로만 드미트리는 마나의 흐름을 목격했다.
‘일반적인 저서클 마법사들과는 다르다. 그의 마법은, 중단전에서 시작해 상단전에서 폭발력을 일으키고 있다.’
이상했다.
사람들은 분명히 중단전인 심장에 서클을 형성하고, 그곳에서 분출하는 마나를 곧바로 마법으로 발현시킨다고 말했다.
그런데 셰피르의 방식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중단전에서 일어난 마나가 상단전에 도달했을 때, 마나는 자연과 융화되며 엄청난 폭발력을 일으켰다.
편견을 버렸다.
기존의 것과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셰피르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생각했다.
‘셰피르는 8서클 마법사다. 사람들은 8서클의 경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8서클에 도달했음을 증명한 존재는 셰피르가 유일하다. 어쩌면 기존의 마법사들은 8서클에 도달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서클의 완성도는 8번째 고리를 형성할 준비를 끝냈으나, 상단전의 활용법을 모르기에 8서클 이상의 경지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겠지.’
가설이었다.
명확한 사실은 아니었으나, 상단전이 8서클의 실마리라고 생각한다면 상황이 그럴듯하게 들어맞았다.
그렇다면.
상단전은 마법 혁명의 실마리였다.
상단전을 단련한 존재들은 8서클의 길이 열릴 것이고, 동시에 그 이하의 마법사들도 상단전의 단련을 통해 기존보다 강해질 확률이 높았다.
로만 드미트리로서는 한번 시도해 볼 법한 가설이었다.
샐러맨더 대륙의 사람들은 단전의 개념조차 알지 못했지만, 중원 무림은 단전을 세분화해서 분류하고, 단전마다 어떻게 단련해야 하는지를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해 낸 상태였다.
양의신공(兩儀神功).
상단전을 단련하는 방법이었다.
한때 백중혁이 무공을 연구하던 시절, 무당의 양의신공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양의신공을 만들었다.
정신의 단련.
양의신공을 훈련할 경우 뇌의 발달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지만, 하단전을 단련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상단전의 개방으로 인해 마나의 흐름이 정수리를 통해 흩어져 버린다.
그야말로 계륵(鷄肋)이었다.
무인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수련법이 아니었으나, 상단전의 발달이 8서클의 벽을 넘어서는 실마리라면, 마법사들에게 양의신공보다 좋은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드미트리로 돌아오고서 펠릭스를 불렀다.
그간 생각했던 결론을 말하며 양의신공을 말해 주었고, 며칠 뒤 펠릭스는 놀란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다.
“……주군. 대체 이 기술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확실했다.
양의신공은, 마법을 발달시킬 혁명이었다.
* * *
지난 한 달.
피닉스의 마법사들은 상단전에 마법을 접목하는 것에 성공했다.
아직은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양의신공으로 단련한 상단전이 명확한 효과를 보였다.
녹스.
그가 바로 살아 있는 예시였다.
중단전을 거쳐 상단전을 통해 폭발한 마법은 이전보다 강한 파괴력을 보였고, 뇌의 발달로 인해서 마법을 처리하는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라졌다.
에드윈 헥토르가 ‘캐스팅을 생략’했다고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상식보다 2~3배는 빠르게 마법을 사용해 버리니, 같은 경지인데도 녹스의 마법을 막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패배.
당연한 결과였다.
에드윈 헥토르는, 설마 마법 혁명이 벌써 시작되었음을 예상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제가 왜, 헥토르에 상단전의 비밀을 알려 주는 노고를 감수해야 하는 겁니까?”
명백한 거절.
에드윈 헥토르는 무력감을 느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처럼.
드미트리가 상단전의 비밀을 공유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검술 발표회를 통해 단전의 개념을 공개했지만, 그렇다고 드미트리는 무조건적으로 자신들의 것을 내주는 얼간이가 아니다.
검술 발표회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을 쓰러트린 시점에, 오라의 개념을 재정립하면서 알렉산드르의 명성을 강탈했다.
그것은 엄청난 파급력을 일으켰다.
다른 나라들이 단전에 대해 알아낸다고 해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한 번의 발표로 제국으로 도약할 근본을 형성했다.
하지만.
상단전은 다르다.
아무리 동맹국이라고 할지라도, 상단전을 공유해서 그들이 얻는 이득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차라리 ‘상단전의 비밀’을 미끼로 다른 마탑들을 병합한다면, 뇌의 발달을 갈망하는 마법사들이 드미트리로 몰려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걸 헥토르, 나아가 천공의 마탑에게 공유한다? 마법 혁명을 일으켰다는 업적은, 검술 혁명과는 다르게 이제는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씁쓸했다.
설득할 명분이 없었다.
‘피닉스 마탑은 상단전의 비밀을 활용해 이미 체계를 정립해 나가고 있다. 그들이 선발주자로 치고 나가면, 언제고 우리에게 기회가 돌아올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그때는. 만약 그 전에 크로노스 제국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헥토르 왕국은 역사가 반복되듯 방관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방관하고 싶어서 방관하는 것이 아니다.
힘이 없기에 넋을 잃고 지켜볼 뿐이고, 그렇게 헥토르의 사람들은 무의미한 희생을 당할 것이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은.
합리적인 사람이다.
감정에 호소하는 부류는 아니었으나, 이번만큼은 구차할지라도 유일한 동아줄을 붙잡고 싶었다.
그때였다.
“드미트리가 상단전의 비밀을 공유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딱 하나. 헥토르 왕국이 주종(主從)의 관계를 맹세한다면. 드미트리는 헥토르의 자유를 보장하는 관계로서, 헥토르의 미래를 책임지겠습니다.”
그 말에.
에드윈 헥토르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 *
에드윈 헥토르.
매력적인 존재였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가 처음으로 쓰러트린 타국의 적장이었지만, 그에 대한 가치는 처음부터 인정했다.
기습적인 공격.
과감한 판단.
그리고 마법을 사용하는 개인의 능력까지.
에드윈 헥토르는 약소국의 출신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더 대단한 인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방금 녹스와의 대결도 마찬가지였다.
에드윈 헥토르는 본인이 패배했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꼈지만, 녹스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도 잠깐 보여 준 그의 임기응변은, 에드윈 헥토르가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했다.
전장.
에드윈 헥토르는 선두에 서는 지휘관이었다.
병사들과 같이 목숨을 걸며, 워 메이지의 습성이 몸에 배었을 만큼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에, 그와의 동맹을 받아들였다.
‘마법과 검술은 영역이 다르다. 검술에 한해서는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지만, 미지(未知)의 영역까지 내가 통제하는 것은 오만에 불과하다. 내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을 보완해 줄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앞으로 드미트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천마 백중혁.
그의 강점은 무력뿐만이 아니었다.
부족한 부분은.
사람으로 메웠다.
타협을 불허하는 정치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괴마를 받아들인 것처럼, 배신자처럼 이리저리 붙었던 파비우스 백작은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 되었다.
에드윈 헥토르도 마찬가지였다.
피닉스 마탑의 펠릭스가 마법적인 부분을 보완해 주고 있지만, 마법이라는 거대한 영역을 피닉스만으로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사람이 필요했다.
펠릭스를 도와서, 양의신공으로부터 비롯되는 마법 혁명을 적극적으로 살려 줄 믿을 만한 존재가.
에드윈 헥토르.
그가 눈에 보였다.
찬란한 원석은,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동요하는 눈빛을 보였다.
“선택하십시오. 드미트리를 따르겠다고 말한다면, 당신에게 새로운 미래를 약속드리겠습니다.”
* * *
주종의 관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아니,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동맹국과는 다르다.
연합의 개념은 드미트리와의 동등한 관계를 의미하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순간부터는 대화의 방식부터가 달라질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하대를, 자신은 존대를.
아직은 공국에 불과한 드미트리를, 헥토르 왕국이 떠받드는 관계를 로만 드미트리는 요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종의 관계를 언급하는 상황이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
왕가의 후계자.
사람들은 에드윈 헥토르의 삶을 우러러보았다.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왕실에서 하인들을 부리는 왕자의 모습이 그들이 생각하는 왕실의 삶이었다.
하지만 에드윈 헥토르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헥토르의 별’이라는 명성을 얻을 때까지, 에드윈 헥토르는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많은 일을 감당해야만 했다.
한순간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크로노스 제국이 의도적으로 흉작을 유도하지 않았을 때도, 헥토르 왕국은 그렇게 살기 좋은 나라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무능력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업무에 시달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처리했고, 틈틈이 마법을 익히며 헥토르의 별이라 불리는 명성을 충족했다.
대체 왜.
그렇게 살았을까.
그리고 지금도, 에드윈 헥토르는 크로노스에게 복수하겠다고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다.
‘헥토르의 왕자로 태어나며 내게는 꿈을 꿀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한때는 그러한 삶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지만, 지금은 헥토르 왕국의 안락과 평화가 내 존재 의미가 되어 버렸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내가 왕위에 오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그런 삶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리고 이 지긋지긋한 현실의 끝에 헥토르가 평안을 찾길 바란다.’
참.
서글픈 삶이었다.
에드윈 헥토르는, 개인을 위해서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헥토르는 대단한 권력을 바라지 않았다.
크로노스와 발할라처럼, 대륙을 집어삼키겠다고 눈을 부릅뜨는 그들과는 원하는 바가 달랐다.
헥토르만의 평화를 바랄 뿐이다.
그저 아침에 걱정 없이 눈을 뜨고, 끼니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지 않는 삶을 헥토르의 사람들에게 부여하고 싶었다.
애초에 권력자들과는 이권을 다툴 일이 없었다.
그들이 헥토르의 밥그릇을 탐하지 않는다면, 서로가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달랐다.
먼 미래.
그림을 그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륙을 정벌한다면, 그 옆을 지키는 헥토르는 과연 행복할까.
‘행복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드미트리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행복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국경 너머로 소문이 들렸다.
헨더슨이 죽으면서 국가 유공 시스템과 같은 제도를 도입한다는 말에, 사람들은 드미트리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이 있었다.
저런 나라의 보호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렇게 베풀 수 있을 만큼의 권력과 재력이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드미트리의 행보를 보면서, 에드윈 헥토르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로만 드미트리와 같이하는 삶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가 말한 주종의 관계가 나쁘게만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고 내밀어 주는 손길에, 에드윈 헥토르는 드미트리와의 미래를 꿈꾸었다.
그리고는.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넘어설 수는 없을지라도, 헥토르의 백성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따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작았다.
에드윈 헥토르는,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헥토르의 미래를 약속해 주신다면, 저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날.
드미트리는 헥토르 왕국을.
아니, 에드윈 헥토르라는 사람을 얻었다.
* * *
바쁜 하루였다.
아침에는 호프만을 만나 골든 뱅크와의 관계가 틀어졌지만, 점심에는 헥토르 왕국과 에드윈 헥토르를 얻었다.
충성의 맹세.
에드윈 헥토르는 무릎을 꿇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고도 끊임없이 의심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양의신공’의 구결과 헥토르의 안정을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
에드윈 헥토르로서는 맹목적인 믿음이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자신이 배신할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빠져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드미트리의 방식이었다.
신뢰는 신뢰를 낳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먼저 믿음을 보여 줌으로써 관계를 확고하게 형성했다.
배신은 걱정하지 않았다.
첩자들이 드미트리를 따른 것처럼.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신뢰했다.
그것은 오만함이 아니다.
근거가 동반되어있는 오만함은, 자신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해가 저물어 갔다.
밖이 조금씩 어두워질 무렵, 드미트리는 예고도 없이 세 번째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은 로만 드미트리와의 독대를 요청했다.
마침내 만남이 이루어지자, 그는 조급함으로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아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최대한 참으려고 했는데, 대체 새로운 검은 언제 만드시는 겁니까?”
발렌티노 후작.
수집가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