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6화 (306/615)

306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1)

발렌티노 후작의 사고는 조금 독특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치고 검술 혁명을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에 감탄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수집가로서의 기대감이 들끓었다.

생각해 보라.

장인(匠人)들이 작품을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경험인데, 로만 드미트리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 나오겠는가.

홀로 방어 진지 하나를 불태우고, 30만 대군을 물리치고, 셰피르를 쓰러트린 모든 과정이 장인에게는 엄청난 영감을 선사할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서. 발렌티노 후작은 애가 탔다.

얼른 로만 드미트리가 대장간에 들어섰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시간이 흘러도 들려오는 소문은 없었다.

하루.

이틀.

해가 뜨고, 저물었다.

어느새 한 달의 시간이 지나갈 무렵, 발렌티노 후작은 와인을 마시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는 못 참겠어!”

탐욕의 수집가라는 별명처럼.

애가 타기 시작하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보통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인물들은 며칠 전에 선약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건만, 발렌티노 후작은 다소 늦은 시간인데도 드미트리로 향했다.

그렇게 이동하는 사이에 해가 저물어 갔다.

본인의 행동이 민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현재.

“아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최대한 참으려고 했는데, 대체 새로운 검은 언제 만드시는 겁니까?”

감정을 분출했다.

맞은편에 앉은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발렌티노 후작은 하소연하듯 속에 담은 말들을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구질구질한 것 같아서, 정말 웬만하면 로만 드미트리 님이 만든다고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크로노스와 전면전을 벌일 때 확답은 하지 않으셨지만, 분명히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요새 잠이 오질 않습니다. 매일 수십 번씩 블레이즈의 검날을 닦으며 신상을 기다리는 제가 있는데,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시고 새로운 검을 만들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절절했다.

결단을 내린 비장한 표정과는 다르게, 한없이 가벼운 발언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웃었다.

재밌는 사람이었다.

크로노스와 드미트리의 전면전은 나라의 명운이 걸린 문제인데도, 그 와중에 ‘검’을 운운하던 독특한 인간이었다.

전생에도 천마 백중혁의 검이라면 돈 보따리를 들고 따라다니는 인간들은 많았다.

하지만 발렌티노 후작만큼 집착이 대단한 존재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처음으로, 전생의 인물들을 압도하는 존재가 바로 이 발렌티노 후작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검을 제작할 생각이었습니다. 최근에 얻은 깨달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시험해 보고 싶은 부분도 있습니다. 한 달만 기다리십시오. 검을 발렌티노 후작님에게 드린다는 약속은 아니지만, 새로운 검을 만들어 최소 한 자루는 발렌티노 후작님이 구매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순간.

발렌티노 후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환한 표정을 보이며, 그는 고개를 열정적으로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물한다는 말이 아닌데도.

발렌티노 후작은, 드미트리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연신 잘 생각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 * *

며칠 뒤.

골든 뱅크는 정말 100만 골드를 보내왔다.

직접 도장을 찍은 서약서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았다간, 골든 뱅크의 이름으로 받아 낸 수많은 서약서의 효력이 약해지는 상황을 걱정했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대로였다.

그들이 만약 100만 골드를 보내지 않았다면 서약을 빌미로 골든 뱅크의 서약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었고, 반대로 100만 골드를 보낸다면 돈만 받고 그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면 끝이었다.

어떤 선택이든.

드미트리로서는 이득이었다.

금화의 악마라고 불릴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골든 뱅크의 방식이, 오히려 호프만의 발목을 붙잡았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눈앞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했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사병들의 훈련을 크리스에게 일임한 채로 공방으로 향했다.

“한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공방 밖으로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중요한 일이 있다면 신호를 보내 상황을 알리고, 그렇지 않은 상황은 네 선에서 모두 처리해도 좋다.”

“알겠습니다.”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익숙한 상황이기에, 이제는 자연스럽게 로만 드미트리가 머무를 환경을 깔끔하게 준비했다.

끼익.

쿵.

공방 안에.

로만 드미트리만이 남았다.

화덕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모루 위에 놓여 있는 망치를 들었다.

‘검을 만드는 행위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반복했던 내 정체성이다. 내가 무인으로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는지, 그리고 현재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검을 통해 투영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발렌티노 후작이 생각한 것처럼 검을 만들어 낼 영감은 차고 넘쳤고,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다크니스’를 만들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래서 한 달의 시간을 잡았다.

그동안 몇 자루의 검을 만들어 낼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 안에 영감을 최대한 쏟아붓고 싶었다.

그리고.

시험해 볼 것이 있었다.

‘화마의 불길.’

화륵.

화르르르르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화덕에 불이 붙었고, 로만 드미트리 주변으로 타오르는 불길이 공방 내부를 뜨겁게 물들였다.

화마의 힘.

전생에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불의 힘을 활용해 검을 제작한다면, 과연 어떤 형태의 검을 제작할 수 있을까.

애초에 발렌티노 후작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머릿속을 장악하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며칠 지나지 않아 공방의 문을 열었을 것이다.

뜨겁지 않았다.

염화신공을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로만 드미트리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빠져들었다.

화르르르르륵.

불길에 휩싸였다.

장관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휘몰아치는 화염 속에서, 마침내 첫 번째 망치질을 시도했다.

카앙-

경쾌한 소리.

한 달 중, 첫 번째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그 시각.

호프만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책상을 내리쳤다.

콰앙!

“로만 드미트리, 겨우 네 녀석 따위가 감히 나를 협박해?!”

골든 뱅크.

역사적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권력의 중추다.

재력(財力)을 7성의 오라처럼 휘둘러 대는 골든 뱅크의 행보에, 감히 제국이라 할지라도 골든 뱅크와의 관계는 원만하게 형성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선을 넘었다.

골든 뱅크 은행장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살고 싶다면 100만 골드를 뱉으라는 전무후무한 만행을 저질렀다.

참담했다.

전대 은행장도, 그 이전의 은행장도.

호프만과 같은 일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가며 특별히 호위에 신경 쓰지 않은 이유는, 드미트리와 같은 권력자일수록 골든 뱅크를 대하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간의 경험을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비굴하게 나오지 않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골든 뱅크를 상대로 이빨을 드러내는 멍청한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

명백한 실수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호프만은 자신이 권력의 안락함에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100만 골드를 보냈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같잖은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예상처럼, 골든 뱅크의 서약서가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변명을 만들어 줄 선례를 허락할 수 없었다.

은행장의 직인이 찍힌 서약서기에.

그것이 설령 협박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들, 호프만은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넌 상대를 잘못 골랐어. 금화의 악마를 적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지금부터 똑똑히 보여 주지.’

수하를 불러들였다.

호프만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기에, 수하는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조아리며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호프만이 말했다.

“지난번에 요청한 자료는?”

“조사를 모두 끝냈습니다. 현재 드미트리 가문과 ‘철제’를 대규모로 거래하는 주요 업체는 네 군데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카이로 왕국의 발렌티노, 크로노스 제국의 제니트, 발할라 제국의 무리엘, 왕국 연합의 빈센트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모두 해당 나라들의 상권을 주도하고 있는 대부호(大富豪)들로서, 그들이 드미트리 철제 유통의 70%를 책임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나머지 30%는, 생각보다 드미트리로 직접 찾아가서 철제를 구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크로노스의 제니트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드미트리와의 거래를 사실상 끊어 버린 상태입니다.”

70%.

유의미한 숫자였다.

자료를 확인하며, 호프만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100만 골드를 확보했다고 안도하고 있겠지. 하지만 거래처가 하나씩 끊기는 상황에서도, 네가 나를 찾아와서 그간의 일을 사죄하지 않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칼을 이기는 힘.

그것이 바로 금화다.

돈이야말로 절대적인 가치임을, 호프만은 자신의 경험으로 확신했다.

“첫 번째 목표는 발렌티노다. 지금 바로, 카이로로 떠날 워프를 예약하라.”

“알겠습니다.”

발렌티노.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인물.

하지만 상인이라면, 골든 뱅크와 그간 맺었던 계약상의 관계를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웃었다.

복수의 시작은.

크로노스도 발할라도 아닌, 바로 최측근의 배반일 것이다.

* * *

카이로스.

발렌티노의 대저택.

호프만의 방문에, 발렌티노 후작은 환한 얼굴로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발렌티노 후작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대부호와 골든 뱅크는 보통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발렌티노 후작은 사적으로 호프만을 만난 일이 많았다.

그런데 접객실에 도착하자마자. 의외의 인물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호프만은 살짝 불편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저분은?”

“파비우스 백작님입니다. 미리 선약이 있어서 대화를 나누다가, 호프만 님에게 소개해 드리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같이 만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혹시라도 불편하시다면, 파비우스 백작님은 먼저 보내겠습니다.”

애매한 상황이었다.

파비우스가 로만 드미트리의 충신임을 알기에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재밌는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파비우스가 보는 앞에서. 발렌티노 후작이 로만 드미트리를 배신한다면, 그건 정말 재밌는 그림이지 않겠는가.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를 옮겼다.

파비우스 백작은 한편에서 지켜보고, 발렌티노 후작과 호프만이 마주 보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호프만이 말했다.

“제가 발렌티노 후작님을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린 것은,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문제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에 로만 드미트리와 큰 트러블이 있었습니다. 이 바닥에서 감정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만, 문제는 로만 드미트리가 제 목숨을 담보로 협박했다는 것입니다. 발렌티노 후작님. 골든 뱅크와 드미트리 가문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골든 뱅크는 지금부터, 드미트리에 복수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크흠.”

발렌티노 후작이 곤란하다는 듯, 침음성을 삼켰다.

기회였다.

호프만은, 틈을 주지 않고 상대를 몰아붙였다.

“발렌티노를 먼저 찾은 이유는 후작님과의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사실 드미트리를 압박하려면 발할라의 무리엘 백작을 먼저 찾아가는 것이 맞습니다만, 먼저 발렌티노 후작님에게 상황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드미트리와의 거래를 끊으십시오. 제 요구를 받아들이신다면 앞으로 십 년간 발렌티노 후작님이 골든 뱅크를 통해 빌린 돈의 이자를 받지 않겠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기한이 끝나자마자 빌린 돈을 모두 토해 낼 생각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당근과 채찍이었다.

대부호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돈으로만 장사하지 않는다.

부채를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장사의 핵심이었고, 발렌티노 후작은 다른 대부호들처럼 골든 뱅크에 빌린 돈이 적지 않았다.

그걸 모두 갚는다는 것은 상당한 압박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부채를 갚는 것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이후에 골든 뱅크와의 틀어진 관계도 생각해야만 했다.

호프만은 돈의 힘을 믿었다.

그런데.

발렌티노 후작은 파비우스 백작을 슬쩍 바라보더니,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아무래도 드미트리를 배신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골든 뱅크에 빌린 돈은 빠른 시일 내로 갚겠습니다. 사실, 이미 이에 대해서 로만 드미트리 님을 통해 언질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드미트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세력들은, 골든 뱅크에 압력을 받을 만큼의 여지를 남기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 선택은, 보시다시피 드미트리입니다.”

“발렌티노 후작님!”

호프만이 눈을 부릅떴다.

당황했다.

발렌티노의 빚이 수만 골드는 될 텐데, 그걸 단번에 갚겠다는 말이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순간.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받아간 100만 골드의 일부가, 어쩌면 발렌티노에게 흘러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들이 골든 뱅크의 돈을 대신 빌려준다면 드미트리를 배신할 명분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호프만이 사나운 기세를 보였다.

“이번 문제를 섣부르게 결정하지 마십시오. 제 제안을 거절한다면, 골든 뱅크는 드미트리뿐만 아니라 발렌티노의 파멸을 원할 것입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적의를 드러내는 상황에, 발렌티노 후작은 오히려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그냥 가십시오. 아니, 이러다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찍혀서 검을 판매하지 않는다고 하면 당신이 책임질 겁니까? 어차피 끝난 사이인 것 같은데, 괜히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얌전하게 물러나십시오. 당신과의 관계보다. 제게는 로만 드미트리 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일이 틀어졌다.

호프만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발렌티노 후작이 문 너머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손님 나가신단다! 정중히 모셔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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