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2)
벌써 두 번째였다.
드미트리에 이은 푸대접에, 호프만은 분노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뒤를 돌았다.
발렌티노의 저택을 바라보며, 씹어뱉듯 말을 토해 냈다.
“감히 나를 이렇게 대한단 말이지.”
파비우스 백작.
그와의 합석은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발렌티노 후작의 설명처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대화 도중에 발렌티노와 파비우스가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명백한 증거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골든 뱅크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고, 발렌티노 후작은 황당하게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상인(商人)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인 인간관계보다는, 명확한 보상을 통한 거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발렌티노 가문이 카이로 왕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지만, 이번 기회에 골든 뱅크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 간다면 어떻게든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다.
‘일개 단체’가 목숨값으로 100만 골드를 내놓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골든 뱅크다.
상인으로서 이해관계를 따졌을 때, 골든 뱅크를 배척하고 드미트리의 손을 맞잡는 것은 실리적인 선택이라 할 수 없었다.
문득.
드미트리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된 사람들의 유대감이 철옹성처럼 단단하다고 말하곤 했다.
‘처음부터 발렌티노 후작을 공략한 것은 내 실수일지도 모른다. 카이로의 반란부터 크로노스와의 전면전까지. 그 과정에서 발렌티노 후작과 로만 드미트리는 상당한 유대감을 쌓았겠지. 발렌티노 후작도 늙었군. 그런 같잖은 유대감에, 발렌티노 가문의 미래를 팔아 버리다니.’
호프만은 진실을 몰랐다.
유대감 때문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의 검을 탐하는 수집욕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을.
어찌 되었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다음 행선지는, 절대 실패할 리가 없었다.
‘다시 발할라로 돌아간다.’
발할라 제국.
그곳은, 골든 뱅크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었다.
* * *
비효율적인 동선이었다.
처음부터 무리엘 백작을 찾아갔다면, 일단 아군을 확보하고 발렌티노 후작을 압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쉬움은 뒤로 미루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무리엘 백작의 뒤로, 눈을 의심케 하는 인물을 발견했다.
“여기서 또 뵙는군요.”
능글맞은 웃음.
마치 자신과 좋은 관계인 것처럼 보이는 살가운 태도에, 호프만으로서는 표정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파비우스 백작이었다.
분명히 발렌티노 가문을 떠나자마자 곧바로 무리엘 백작과의 약속을 잡았는데, 이번에도 한발 먼저 파비우스가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호프만이 물었다.
“저자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먼저 선약이 있었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다른 접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분이 나빴다.
자신을 훑어보는 파비우스 백작의 시선에, 호프만은 무리엘 백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선약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무리엘 백작은 대놓고 파비우스와 합석하자던 발렌티노보다는 상식적인 반응을 보였기에, 금방 감정을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파비우스 백작의 의도야 뻔했다.
발렌티노 후작을 설득했던 것처럼, 무리엘 백작에게 ‘골든 뱅크’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어림없는 소리였다.
무리엘 가문은, 그럴 수 없었다.
호프만이 말했다.
“아버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당장 현역으로 복귀하셔도 될 만큼 매우 건강하십니다. 은퇴하고서 오히려 적적하다면서, 최근에는 매일 텃밭을 일굴 정도입니다. 참, 아버지께서 호프만 님이 보내 주신 선물을 정말 감사히 먹었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대체 그 귀한 약초를 어디에서 구하신 겁니까?”
“세상에 돈으로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귀한 분을 위해, 특별히 제가 힘을 썼습니다, 하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무리엘 가문과 골든 뱅크.
같은 발할라에 뿌리를 내린 세력으로서, 그들은 선대(先代)부터 인연을 맺어 왔다.
선대의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교류하다 보니, 특별한 일이 있으면 서로 찾아보고 챙겨 줄 만큼의 사이가 되었다.
그렇기에.
무리엘 가문을 서둘러서 설득하지 않았다.
카이로나 헥토르와 같은 친 드미트리 출신도 아니고, 발할라 제국의 가문이 골든 뱅크의 부탁을 거절하면서까지 드미트리에 붙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편안한 안방처럼 대화를 나누는 호프만의 모습에서, 무리엘을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보였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차가 바닥을 드러냈을 즈음에, 호프만이 운을 띄웠다.
“제가 무리엘 가문을 찾은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로만 드미트리, 그 녀석이 단단히 미쳤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친 이후로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 모양인지, 거래를 명목으로 찾아간 제 목에 칼을 들이밀며 협박을 했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저는 골든 뱅크의 은행장으로서, 이번 문제를 간과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말할수록, 로만 드미트리에게 당했던 굴욕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앞으로 골든 뱅크는 드미트리와 관련한 모든 거래를 차단하고, 그들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킬 생각입니다. 무리엘 백작님. 드리트리산 철제를 다량으로 거래한다고 들었는데, 그들과의 거래를 중단해 주십시오. 일방적으로 부탁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골든 뱅크의 제안을 들어준다면, 그들보다 낮은 가격에 ‘철제’를 납품해 드리겠습니다. 또한, 저희를 통해 빌린 돈의 이자를 아예 면제해 드리겠습니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경제적 고립.
시작은 무리엘 가문부터였다.
거래를 하나씩 끊어 주력 상품인 철제의 재고가 쌓이면, 그때부터 차근차근 무너트릴 생각이었다.
희열에 차올랐다.
로만 드미트리.
검밖에 모르는 녀석들은, 재력에 짓눌려 봐야 현실을 깨닫는 멍청이였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호프만 님의 부탁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리엘 백작의 거절.
그건, 예상 밖의 전개였다.
* * *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무리엘 백작은 차분하게 본인의 입장을 말했다.
“저도 웬만해서는 호프만 님의 편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상인’이지 않습니까? 상인으로서의 실익을 생각했을 때, 드미트리와의 거래를 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선대의 인연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무리엘 백작이 숨을 크게 골랐다.
호프만이 만남을 요청했을 때부터, 그는 불편한 상황을 예상했다.
“일단 첫 번째로 드미트리의 철제는 대체할 수 없습니다. 무리엘 가문이 드미트리까지 가서 철제를 받아오는 이유는, 드미트리산 철제가 대륙 제일이기 때문입니다. 호프만 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발할라 제국의 전사들이 품질이 낮은 철제를 구매하려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상품으로 대체한다고 할지라도, 저희가 드미트리산 철제를 공급하지 않을 경우 이전처럼 철제 시장을 독점(獨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게 일단, 첫 번째 이유입니다.”
타당한 말이었다.
드미트리산 철제는 최상품이라고 평가받기에, 드미트리 가문은 그만한 부를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골든 뱅크와의 관계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드미트리와는 철제라는 단 하나의 품목만을 거래하겠지만, 골든 뱅크는 다양한 품목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무리엘은 상단 가문이다.
그들은 철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골든 뱅크와의 틀어진 관계는 그들에게 엄청난 피해로 돌아갈 것이다.
철제 산업?
미래를 걸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호프만은, 아직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사실 두 번째 이유가 가장 중요합니다. 발할라는 전사의 나라입니다. 무리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또한 피가 끓는 전사들이고, 로만 드미트리는 얼마 전에 ‘검술 발표회’를 통해 검술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조금 전.
파비우스 백작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 드미트리와의 단절이, 무리엘 가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짝 설명해 주었을 뿐이었다.
“드미트리 가문은 검술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입니다. 그들은 ‘단전’의 개념을 공개적으로 밝혔고, 우호적인 세력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정보 공유를 해 주겠다고 밝힌 상태입니다. 시대의 흐름이 변하고 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리엘 가문이 드미트리와 돌아서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발할라의 전사들은 저희를 위해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들이 앞서 나갈 때, 구시대적인 알렉산드르의 오라 활용법에 매달리기만 한다면 무리엘 가문은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 발할라에서는, 가문이 보유한 전사들의 힘이 모든 분쟁을 해결한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의 말처럼.
실질적인 무력은 중요했다.
발할라에서 분쟁이 일어났는데, 알렉산드르의 오라를 사용하고 있으면 결과는 뻔했다.
드미트리는 선구자였다.
앞으로 치고 나가는 그들의 등에 올라타지는 못할망정, 먼저 배척하는 선택은 차마 택할 수 없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
둘은 달랐다.
크로노스는 황제의 지배력이 절대적이라면, 발할라는 아직 힘에 대한 낭만이 있는 나라였다.
무리엘 백작의 태도가 변했다.
그가 간절하게, 절절한 목소리로 감정에 호소했다.
“호프만 님. 둘 중 하나를 강요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일입니다. 선대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무리엘 가문의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 * *
대화는 결렬되었다.
무리엘 백작을 설득하지 못한 호프만은, 이제야 로만 드미트리가 왜 자신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무공을 믿고 있었던 것이냐.’
검술 혁명.
로만 드미트리는 무형(無形)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현재 대륙을 주도하는 오라 검사들이 드미트리의 ‘무공’을 배우길 바란다는 사실은, 골든 뱅크의 금화만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특히 발할라는 더 그랬다.
호프만은 발할라 출신을 설득하는 게 쉽다고 생각했지만, 무공이 걸린 문제에서 무리엘 백작은 타협하질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대단한 녀석이었다.
골든 뱅크와 척을 지고, 이토록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네 뜻대로만 일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골든 뱅크의 은행장.
혹은, 독사(毒蛇)라고 불리는 인물.
호프만은 포기를 몰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하기에 사람들은 그를 독사라고 불렀다.
로만 드미트리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적이었다.
애초에 크로노스 제국조차 그를 상대로 애를 먹은 것을 보면, 처음부터 그를 설득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발렌티노 후작은 그와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고, 무리엘 백작은 발할라의 정서에 반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마지막 남은 딱 한 명의 대부호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왕국 연합의 대부호인 빈센트는 나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검술 혁명을 주도하고 있다지만, 눈앞의 쌓인 금화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지.’
현재.
호프만은 화가 났다.
미친 듯이 짜증이 났다.
보통은 특별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골든 뱅크의 뜻대로 되었는데, 계속되는 변수는 심기를 건드렸다.
이번 문제는 단순하게 넘어갈 수 없었다.
골든 뱅크의 은행장인 자신이 협박을 받아 100만 골드를 뱉어 냈는데, 아무런 보복도 이루지 못한다면 우스운 선례를 남길 것이 분명했다.
무조건.
철제 산업에 타격을 주고 싶었다.
호프만의 독기가,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다.
‘지금부터는 감당할 수 없는 재력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여 주마.’
마지막 목적지.
왕국 연합의 프랑크에서, 이 짜증 나는 상황의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 * *
첫 번째 만남은 우연이고.
두 번째 만남은 인연이고.
세 번째 만남은 필연(必然)이라는 말이 있다.
평소에는 좋게 받아들일 그 말이, 빈센트 자작의 접객실을 찾은 호프만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허허허, 또 만나네요?”
파비우스 백작.
드미트리의 너구리가, 익살스러운 얼굴로 호프만을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