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3)
호프만으로서는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순간이었다.
발렌티노.
무리엘.
빈센트.
삼국을 돌아다니는 동안, 매번 그 자리에 파비우스 백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게다가 모두 드미트리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던가.
마음 같아서는 실실 웃는 면상을 제대로 후려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목적이 있기에 분노를 억지로 삼켰다.
빈센트 자작이 말했다.
“이것 참, 어느 한 분 약속 시각을 미루겠다는 분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삼자대면의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같은 목적으로 절 찾으시는 것 같은데, 이렇게 같이 이야기를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점잖은 말투와는 달리.
속내가 뻔히 보였다.
철제 산업 문제로 본인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자, 경쟁자인 파비우스 백작과 호프만을 동시에 불러들여 자신의 몸값을 부풀리려는 속셈이었다.
빈센트 자작은 영악했다.
마치 진실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은 가식적이었지만, 그가 가진 재력은 누구도 진실을 지적하지 못했다.
호프만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골든 뱅크의 이름값으로 상대를 압박하겠지만, 지금은 목이 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었다.
‘오냐, 네 뜻대로 따라 주마.’
속으로 웃었다.
상대가 속물이라는 것은, 골든 뱅크에게는 유리한 이점이었다.
호프만이 말했다.
“빈센트 자작님은 세상일에 밝으신 분이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드미트리와 골든 뱅크의 관계는 끝났습니다. 앞으로 어떤 협상으로도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회복할 생각이 없으며, 그것은 골든 뱅크의 ‘협력 업체’도 동일합니다. 사실 합리적인 거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이 매우 불편합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이 가혹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빈센트 자작님을 설득하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런.”
빈센트 자작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묘하게 반짝이는 눈빛은, 갈등이야말로 몸값을 폭등시키는 기폭제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호프만은, 확실한 보상을 제시했다.
“드미트리와의 거래를 중단하십시오. 그 대가로, 빈센트 가문을 ‘골든 라인(Golden line)’의 멤버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 *
빈센트 자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예.”
“허어.”
골든 라인.
그것은 엄청난 특권을 의미했다.
오랜 옛날부터 샐러맨더 대륙의 금융을 주도했던 골든 뱅크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확실한 동반자들에게 골든 라인의 가입을 권유했다.
경계선 너머의 세상.
골든 뱅크와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그들은 골든 라인의 멤버들에게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특혜를 부여했다.
바로 지금처럼.
“아시다시피 골든 라인의 가입은 골든 뱅크와 미래를 같이한다는 의미입니다. 제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앞으로 빈센트 가문이 취급하는 모든 사업에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상품(上品)의 상품들을 저렴한 가격에 매입하게 될 것이고, 유통 과정에서 소모되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골든 라인 소속의 유통 업체를 소개해 드릴 것이며, 기존에 골든 라인에 가입되어있는 멤버들이 빈센트 가문과의 거래를 추진할 것입니다.”
일석이조(一石二鳥).
아니, 그 이상이었다.
단순하게 계산해도, 이게 얼마나 특별한 혜택인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
“골든 뱅크는 대부 업체입니다. 기존에 대출해 드렸던 금액의 이자를 최저 금리로 맞춰 드릴 생각이며, 골든 라인의 멤버들에게는 신용만으로도 사업 자금을 대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만한 기회는 없다고 자부합니다. 골든 라인에 가입한 세력 중에는, 처음부터 부를 이룩한 세력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1년, 2년 해를 거듭할수록 가파른 성장을 보였습니다. 만약 그 영역에 빈센트 가문이 들어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프랑크 왕국의 대부호. 왕국 연합의 대부호라고 불리는 빈센트 가문이, 우물을 벗어나 대해로 뻗어 나갈 기회입니다. 저는 이 기회를 쟁취하라고 확실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할 만한 제안이었다.
상인으로서, 골든 라인의 가입을 거절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행위였다.
다만.
빈센트 가문의 상황은, 복합적인 문제를 계산해야만 했다.
“……정말 좋은 제안임에는 동의합니다. 아마 그 어떤 세력도, 호프만 님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로서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빈센트 가문은 왕국 연합을 무대로 활동하는 세력입니다. 기반 세력이 모두 바로 이곳 프랑크 왕국에 있기에, 정치적인 문제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대격변.
세상이 변했다.
예전에는 프랑크 왕국의 정치적인 문제를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드미트리와 크로노스 제국의 전쟁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프랑크 왕국은 드미트리에 배팅했다.
그런데 프랑크에서 활동하는 빈센트 가문이, 왕국 연합의 수장인 드미트리를 적대하는 골든 뱅크와 손을 맞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끝이다.
엄청난 압력이 들어올 것이고, 프랑크 내의 기반 시설이 단번에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애매했다.
처음에 호프만이 만남을 청할 때는 이것이 기회임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섣부르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빈센트 자작은 이번 기회를 확실한 이득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파비우스 백작과 호프만을 동시에 만나는 속물적인 강수를 두었다.
“호프만 님의 제안은 저희의 근간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입니까?”
문제를 떠넘겼다.
해답을 제시한다면 받아들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파비우스 백작과의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호프만이 웃었다.
예상대로였다.
상대는 속물이었고, 그렇기에 반가웠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대해로 나오십시오. 언제까지 프랑크 왕국이라는 작은 우물에서 활동하실 생각입니까? 크로노스, 혹은 발할라에. 빈센트 가문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반 세력을 갖추어 드리겠습니다. 프랑크를 버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선택지를 넓힘으로써, 프랑크 왕국이 어떤 외압을 가하더라도 버틸 수 있는 확실한 기반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완벽한 해결책이었다.
제국 진출!
황홀한 단어였다.
빈센트 자작으로서는, 이렇게까지 진행되는 대화에 씰룩거리는 입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파비우스 백작님. 골든 뱅크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선을 옮겼다.
이미 골든 뱅크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지만, 그래도 드미트리의 제안을 들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경쟁을 통해.
더 좋은 제안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제가 봐도 좋은 조건이네요. 기회를 잡으십시오, 빈센트 자작님.”
실실 웃으며 말하는 파비우스 백작의 발언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대화에 찬물을 끼얹었다.
* * *
당혹스러웠다.
기껏 설득하러 와서 한다는 말이 저따위라니.
빈센트 자작이 되물었다.
“……제가 골든 뱅크와 손을 잡아도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예.”
파비우스 백작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여유로운 얼굴로 차를 홀짝이며, 당황으로 얼룩진 빈센트 자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드미트리는 골든 뱅크와 같은 조건을 맞추어 드릴 수 없습니다. 정확히는, 드미트리의 손을 맞잡아 달라는 조건으로 빈센트 가문에 특혜를 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오신다면…….”
“그런데 말입니다.”
말을 툭, 끊었다.
분노로 얼룩지는 빈센트 자작의 반응에, 파비우스 백작은 자세를 고쳐잡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빈센트 자작님이 진심으로 걱정되는 마음에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골든 뱅크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이권(利權)을 다투는 과정에서, 오늘과 같은 분쟁이 한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골든 뱅크의 은행장들은 똑같은 말을 내뱉었습니다. 골든 라인을 붙잡아라. 우리와 미래를 같이한다면, 너희 또한 찬란한 미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씰룩, 웃었다.
뻔했다.
골든 뱅크가 어떤 제안을 할지는.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제안이기에, 호프만은 예상 범위 안에서 예상과 똑같은 발언을 내뱉었다.
“호프만 님의 말은 옳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골든 라인의 멤버로서 성공한 세력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실패한 세력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세력들의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또 어떻고요.”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현실을 직시하라는 의미입니다. 골든 라인의 멤버가 되고도 실패한 세력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지금과 같이 ‘경쟁’을 통해 가입한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골든 뱅크가 진심으로 그들의 가입을 바라기에 받아들인 게 아니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조건부로 받아들인 존재들. 그들은 알게 모르게 골든 라인 안에서도 차별을 받았습니다. 겉으로는 적극적으로 약속을 이행하는 것처럼 보이나, 안에서는 지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주도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명백한 선례가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나가떨어진 세력들은, 목소리를 높이지도 못하고 밑바닥에서 명을 달리했다.
“저도, 빈센트 자작님도. 지금 제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증거를 제시해 달라고 말한다면, 저는 역사를 되돌아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골든 뱅크가 지금은 빈센트 가문을 원하지만, 나중에도 지금과 똑같은 마음을 유지한다고 보십니까?”
“어디서 헛소리를……!”
호프만이 발끈했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파비우스 백작의 시선은 빈센트 자작에게 고정되었다.
“드미트리는 다릅니다. 드미트리는, 한번 맺은 관계를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드미트리가 ‘빈센트 가문’에 약속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 * *
분위기가 이상했다.
복잡하게 변한 빈센트 자작의 표정에, 호프만이 목소리를 높였다.
“빈센트 자작님! 저따위 허무맹랑한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골든 뱅크는 신용 하나로 지금의 위치에 오른 세력입니다. 저희는 저희가 내뱉은 말을 천금(千金)같이 여기고, 빈센트 가문과의 미래를 원합니다. 골든 라인의 가입은, 절대 흔하지 않은 기회임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인정했다.
호프만의 제안은 엄청난 기회였지만, 파비우스 백작의 발언은 빈센트 자작을 혼란에 빠트렸다.
‘파비우스 백작의 말이 옳다. 골든 뱅크와의 협력은 매 순간 배신을 걱정해야 하지만, 드미트리는 세간의 소문대로라면 한번 받아들인 관계를 절대 배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세력과의 협력이 빈센트 가문을 위한 미래일까.’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속물들은.
절대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검은 속내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속물적으로 제일 안전한 미래를 택했다.
“……파비우스 백작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빈센트는, 드미트리와 미래를 같이하고 싶습니다.”
결단을 내렸다.
결국.
믿음이 중요했다.
빈센트가 골든 뱅크와 협력하면 엄청난 부가 보장되겠지만, 이미 대부호라 불리는 빈센트 가문에게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골든 뱅크와의 미래는 불안했다.
그와 반대로 드미트리는 새로운 미래를 주도하고 있고, 세간에 떠도는 소문들은 그들이 믿을 만한 존재임을 증명했다.
끝났다.
빈센트 자작마저 회유하지 못한 상황에, 호프만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팍!
쨍그랑!
“이런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테이블을 뒤엎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빈센트 자작의 얼굴에 분노를 토해냈다.
“빈센트! 네 녀석 따위가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해? 골든 라인의 가입은 제국의 대부호들도 줄을 설 만큼의 기회다. 그런데 주제도 모르고 제안을 거절하다니. 내가 약속하지. 빈센트의 미래는 앞으로 드미트리와 똑같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골든 뱅크가, 이 호프만이, 너희를 나락으로 빠트리고 말 것이다.”
홱,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파비우스 백작이 있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원흉은, 바로 저 너구리였다.
“파비우스. 드미트리가 무너지는 날, 네 녀석을 산 채로 붙잡아…….”
“목소리 낮춰.”
“이 새끼가 진짜!”
순간.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다.
평소에는 실실 웃던 파비우스 백작이,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나운 표정을 보였다.
“뒈지기 싫으면, 그 입 다물라고. 이 씨발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