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9화 (309/615)

309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4)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평민들이나 쓸 법한 상스러운 욕에, 호프만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터져 나오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감히 골든 뱅크의 은행장을 상대로 그런 저급한 단어를 사용하다니! 파비우스 백작.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더니, 불과 몇 년 전에는 날 상대로 실실 웃으면서 비위를 맞추었다는 걸 전부 잊어버린 모양이야. 너야말로 입 다물어. 내가 널 찢어 죽여 버리기 전에.”

그의 말처럼.

파비우스 백작과 호프만은 초면이 아니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지만, 파비우스 백작은 호프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노력했었다.

“븅신.”

파비우스 백작이 피식, 웃었다.

다리를 꼰 상태로 발을 까닥거리며, 호프만을 올려보았다.

“호프만.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건 바로 너야. 드미트리는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쓰러트렸어. 그런데 ‘겨우 네 녀석’ 따위가 뭔데 우리보다 우위인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착각하지 마. 손에 쥐고 있는 금화가 아무리 대단한 힘일지라도, 이 세상은 그것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잘 알잖아?”

끼익.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는 웃는 얼굴이라 알아보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건장한 체격은 숨 막히는 긴장감을 유발했다.

“드미트리는 지금 나름대로 선을 지키고 있어. 아주 신사적이라고. 만약 네가 계속 드미트리를 적대하는 발언을 입에 올린다면, 우리로서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어. 크로노스 제국의 병력을 학살했던 것처럼. 네 녀석의 끝을 보도록, 금화보다 무서운 힘을 택해야만 하겠지.”

한 발, 다가갔다.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설마 밖에서 네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골든 나이트(Golden knight)들을 믿는 건 아니겠지? 큭큭큭, 그건 아닐 거야. 골든 뱅크의 은행장이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나대는 걸까. 만약 드미트리가 ‘너’의 암살을 결심한다면, 과연 금화의 힘으로 막을 수가 있을까?”

“……?!”

호프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적당히 소리를 지르면 수그러들 줄 알았는데, 파비우스 백작은 뒤가 없는 사람처럼 물러나질 않았다.

게다가.

‘파비우스의 말대로다. 골든 뱅크는, 드미트리의 암살을 막을 수 없다.’

드미트리.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도, 크리스와 케빈 같은 엄청난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

돈으로 불러들인 고수들로는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대륙 제일의 강국인 크로노스 제국조차도, 로만 드미트리의 게릴라 작전을 막지 못해서 라스칼과 코르타스를 점령당하는 굴욕을 겪지 않았던가.

당황스러웠다.

파비우스 백작.

한때는 카이로스의 너구리라고 불렸던, 지금은 드미트리에 충성을 맹세한 사내.

그는 이렇게 공격적인 인물이 아니다.

권력에 기생해 비위나 맞추는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자존심 때문에 시선을 피하지는 못하지만, 이미 패색이 짙어졌다는 사실을 본인도 모르지 않았다.

탁.

한 발 더.

거리를 좁혔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파비우스 백작이 사나운 얼굴로 호프만을 내려다보았다.

“야.”

사람들은 말했다.

파비우스 백작은.

드미트리의 너구리는, 전형적인 강약약강(強弱弱強)이라고.

고로.

“드미트리와 전쟁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그 눈 깔라고. 이 새끼야.”

파비우스에게 있어, 호프만은 약(弱)으로 분류되었다.

* * *

호프만이 나갔다.

도망치듯 물러나는 그의 뒷모습에, 빈센트 자작으로서는 섣불리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처음 계획은 호프만과 파비우스의 경쟁으로 자신의 몸값을 올릴 생각이었는데, 파비우스 백작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상황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호프만을 어디 뒷골목 사채업자 정도로 취급하는 모습은, 그를 충격에 빠트렸다.

과격했다.

그제야, 드미트리의 진짜 모습이 보였다.

‘내가 상대를 잘못 골랐구나. 드미트리는 이미, 강대국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어.’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듯.

빈센트 자작은 존재감을 죽였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어색한 얼굴로 파비우스 백작에게 나가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탁.

파비우스 백작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당황한 얼굴로 바라만 보자, 방금까지 사나운 표정을 보이던 파비우스 백작이 살갑게 웃었다.

“앉으시지요.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이제 선수들끼리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그게 무슨.”

빈센트 자작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만 깜빡였다.

사고 회로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파비우스 백작의 갑작스러운 변화도 변화인데, 대체 무슨 대화를 하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파비우스 백작이 말했다.

“드미트리는 그렇게 각박한 나라가 아닙니다. 골든 뱅크와의 단절은 빈센트 가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텐데, 저희가 설마 ‘신뢰’만을 운운하겠습니까. 당연히 그만한 보상을 해 드려야지요. 물론 애초에 골든 뱅크를 택하셨다면 이런 대화도 하지 않았겠지만,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드미트리는 우호적인 세력에게 확실한 보상을 부여합니다. 입만 나불대며, 같이 미래를 약속하자는 그런 양아치 같은 부류와는 다르다 이 말입니다.”

태도가 변했다.

너무나도 호의적인, 방금까지 험악하게 소리를 지르던 모습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빈센트 자작님. 드미트리에게 바라는 점들을 솔직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왜일까.

따뜻한 호의에, 빈센트 자작은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드미트리의 너구리.

웃는 얼굴 뒤에 어떤 모습이 숨겨져 있는지를 알기에.

드미트리를 적으로 돌리지 않은 것이, 빈센트 자작으로서는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호프만.

그는 본거지로 복귀했다.

휘황찬란한 건물과 자신을 깍듯하게 모시는 하인들이 무사 귀환을 반겨 주었지만, 엄청난 무력감에 주변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골든 뱅크의 은행장. 평생 권력자로서 살아가며, 호프만은 단 한 번도 이번과 같은 굴욕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늘.

사람들은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중립(中立)을 유지해야 하는 골든 뱅크의 특성상 귀족의 작위는 없었지만, 어느 나라의 귀족이든 골든 뱅크의 은행장이라는 이름값에 고개를 조아렸다.

크로노스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대륙 제일의 강대국도 자신을 인정해 주는데,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화가 났다.

이번 문제.

단 한 번의 굴욕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드미트리와 관련한 소문이 퍼져 나가면, 골든 뱅크의 위상이 깎여 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선조들은 말했었지. 만약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에 막힌다면, 그때는 대대로 내려오는 골든 뱅크의 비밀을 확인하라고. 설마, 내가 은행장일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를 악물었다.

굴욕적이고 참담한 기분이었지만, 호프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파비우스.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골든 뱅크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하고야 말 것이다.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 서재 뒤편에 있는 금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대대로 계승되어 온 골든 뱅크의 비밀 상자가 있었다.

슥.

단검을 들었다.

손가락을 찔러 핏방울을 내고는, 자물쇠에 있는 움푹한 틈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화악-

화르르르르르륵.

파란 불빛이 일었다.

마치 불처럼 일렁이는 그것은 조금도 뜨겁지 않았고, 호프만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개봉했다.

안에는 짤막한 글귀와 어디론가 연결할 수 있는 마법 통신기가 있었다.

대륙의 미스터리 중.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골든 뱅크의 존재에 의문을 보였다.

그들은 대체 어디에서 나타났으며, 어떻게 막대한 부를 이루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최초의 은행장은, 분명히 일반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확신은 있었다.

호프만이 마법 통신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알렉산드르 님. 당신의 종이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선대의 비밀.

호프만은, 마침내 골든 뱅크의 존재 의미를 마주했다.

* * *

그로부터 한 달 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로만 드미트리가 예정한 시간이 다가오자, 발렌티노 후작은 이른 아침부터 드미트리를 방문했다.

아침 7시.

“혹시 로만 드미트리 님께서 공방에서 나왔느냐.”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접객실에서 쉬고 계시면, 나오는 대로 제가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다. 반드시, 제일 먼저 연락해야만 한다.”

한스의 말에.

발렌티노 후작은 간절한 표정을 보였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엔, 마치 첫사랑을 바라보는 듯한 아련함이 있었다.

아침 8시.

“아직도 나오지 않았느냐.”

“예.”

아침 9시.

“아직도…….”

“예.”

아침 10시.

“혹시…….”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매시간.

발렌티노 후작은 한스를 찾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표정은 실망감으로 물들었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거나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기다리는 한 달이, 발렌티노 후작으로서는 정말 억겁(億劫)의 시간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웠다.

로만 드미트리가 분명히 엄청난 작품을 만들어 내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때부터 매일 방에 틀어박혀서 오늘만 기다렸을 정도로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결실을 확인할 때였다.

오랜 기다림에 많이 야위었지만, 눈빛만큼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더는 접객실에서 기다릴 수 없다. 공방 앞에서. 로만 드미트리 님이 공방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어서 길을 안내해다오.”

“불가능합니다.”

“아니, 그냥 기다리기만 하겠다는데…….”

“죄송합니다만, 이번 부탁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스는 타협을 불허했다.

공방 앞.

관계자 외 출입 금지였다.

발렌티노 후작은 어쩔 수 없이 접객실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고, 분명히 이른 아침에 도착했건만 어느새 창밖으로 해가 저물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불길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염없는 기다린 끝에 문이 열렸고, 환희에 찬 얼굴이 단번에 실망감으로 물들고 말았다.

안으로 들어선 사내.

그는 바로 한스였다.

“아무래도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카이로스로 돌아가시면, 로만 도련님이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니! 돌아가지 않겠다!”

발렌티노 후작은 단호했다.

그가 말했다.

“드미트리에 숙소를 잡고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니, 로만 드미트리 님이 나오면 곧바로 연락해다오.”

발렌티노.

끈질긴 그의 집착은,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 * *

며칠이 지났다.

예정된 시간을 지난 상황에, 한스로서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걸까.’

그동안.

공방에서 여러 번 작업했지만, 예정된 기한을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불길했다.

매일 드미트리를 찾는 발렌티노 후작이 로만 드미트리의 안부를 물었기에, 불길한 상상은 점점 몸을 부풀렸다.

그렇게 한 5일 정도 지났을 때.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에,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확인하기 위해 펠릭스를 대동했다.

“펠릭스 님. 마법을 통해, 공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공방.

펠릭스는, 곧바로 마나를 일으켰다.

‘감응(感應).’

특별한 마법은 아니었다.

마나를 흘려보내, 공방 내부의 마나를 느껴 보기 위함이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마나의 생기가 넘칠 테니, 그것만으로도 최소한 생사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펠릭스가 눈을 부릅떴다.

공방 안으로 마나가 스며들자마자, 충격적인 느낌을 전달받았다.

“……이, 이게 무슨.”

공방 안과 밖.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밖은 너무나도 평온한 것에 반해, 안에서는 엄청난 양의 마나가 대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파르르 떨리는 눈빛.

펠릭스는, 넋을 잃은 채로 공방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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