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0화 (310/615)

310화 역작(力作) (1)

첫날.

로만 드미트리는 의외의 문제에 직면했다.

화륵.

화르르르르륵.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처음 철을 녹이는 과정에서, 과도한 열기에 녹아내리는 걸 넘어서 변형을 일으켰다.

변수였다.

화덕을 이용한 방식은 익숙한 체계가 있는데, 화마의 불길은 중간이 없었다.

불을 약하게 일으켰을 때는 철에 충분한 열기를 전달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철을 녹일 만큼의 힘을 끌어올리면 지금 보이는 모습처럼 변형이 일어났다.

게다가 화마는 일반적인 불길과는 철의 반응이 달랐다.

그런 이유로 벌써 강철을 여러 번 폐기했다.

초기 작업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불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은 실패작으로 직결되는 크나큰 문제였다.

전투와는 달랐다.

살의를 가지고 누군가를 해할 때는, 사실 불의 강도를 이토록 세심하게 컨트롤할 이유가 없었다.

열기가 약할지라도 무언가를 태울 정도면 충분했고, 극성으로 끌어올려 상대가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라스칼에서의 전투도 그랬다.

일만의 병력을 화마의 불길에 몰아넣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굳이 불을 섬세하게 다루지 않았다.

불을 일으켜 건물을 불태우면서부터.

통제를 벗어난 불길은, 끝까지 지켜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내지 않았던가.

재밌는 상황이었다.

제멋대로 넘실거리는 불길이, 오히려 로만 드미트리를 자극했다.

‘내게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통제를 따르지는 않는다는 건가.’

끝없는 산맥 지하.

로만 드미트리는 화마의 본체를 마주했다.

강렬한 열기로 들끓는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와 자신이 천명(天命)으로 묶여 있다고 말했다.

최근.

운명의 소용돌이가 로만 드미트리를 집어삼켰다.

대륙을 정벌하려는 존재가 알고 보니 중원 무림 출신인 알렉산드르였고, 신탁을 받았다는 성녀 이사벨은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을 요구했다.

사실 늘 의문이었다.

자신이 왜 샐러맨더 대륙의 로만 드미트리로 빙의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운명의 소용돌이에 자신 또한 하나의 퍼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명으로 묶여 있다는 화마의 말처럼. 누군가의 의도로 인해, 천마 백중혁이라는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무엇을 의도했든, 로만 드미트리는 모든 상황을 자신의 발아래 굴복시킬 것이다.

“어디 한번 끝까지 버텨 보거라.”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불길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면, 짓눌러 굴복시키면 될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염화신공.’

천마 백중혁의 근본이었다.

* * *

백중혁으로 살던 시절.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산의 꼭대기에서, 절경을 내려다보며 문득 인간으로서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삶의 밑바닥에서 모두를 굴복시키겠다고 말하던 어린아이는, 너무 이른 나이에 정점의 자리에 오르고 말았다.

그때부터 삶의 원동력이었던 투쟁심(鬪爭心)이 증발해 버렸다.

무림의 그 어떤 고수도 백중혁의 자리를 넘보지 못했고, 엄청난 명성을 떨치는 신성들도 단칼에 목이 날아갔다.

세월이 흘렀다.

정점에 오르고 십 년 정도 지났을 때, 사람들은 백중혁을 천외의 존재로서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늘 위의 하늘.

투쟁은 인간의 영역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싸우다가도, 백중혁의 기침 한 번이면 바닥에 고개를 조아리고 몸을 벌벌 떨었다.

천하십대고수? 그따위 명성들은 의미가 없었다.

뼛속 깊이 새겨진 백중혁에 대한 공포는, 그가 살아 있는 한 감히 무림의 정상은 올려다보지도 말라는 교훈을 남겼다.

그래서였을까.

백중혁은 무공을 연구했다.

천마신공과 천마검법을 더욱 발전시켰고,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문파의 무공들도 차례로 섭렵했다.

어떤 사람들은 말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지만 백중혁과 같은 천재가 무료한 삶을 공부로 해소했을 때, 끝이 없다고 말하던 배움은 결국 끝을 보이고 말았다.

적수가 없음은 당연했고, 아무것도 이룰 것이 없는 삶을 영위할 이유조차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지루한 삶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자신의 모습에, 백중혁은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약.

불사(不死)를 원했다면 가능했을지도 몰랐다.

백중혁이 터득한 무공에는 불사의 실마리가 있었으나, 자연스럽게 늙어 가는 세월을 받아들였다.

죽음은.

마지막 꿈이었다.

우화등선마저도 거절한 것은, 죽음만큼은 인간으로서 끝을 맺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화륵.

화르르르르르르르륵.

불길이 타올랐다.

화마의 불길에 완전히 휩싸인 채로, 로만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표정을 보였다.

‘좋구나.’

새로운 삶.

새로운 목적.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느꼈다.

통제를 벗어나는 힘은 로만 드미트리의 심기를 자극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백중혁의 삶에는 허락되지 않는 목적이었다.

바르코, 베네딕트, 크로노스, 알렉산드르 등등.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오며 자신을 위협하는 적들이 매번 나타났지만, 치열한 삶에 흔들리기는커녕 아직도 투쟁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은 삶의 원동력을 부여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삶의 목적이 없다면, 천하를 손아귀에 움켜쥐더라도 작은 철창에 갇힌 기분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다.

카앙-!

불꽃이 튀었다.

넘실거리는 불길을 강하게 휘어잡으며,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불길을 한곳에 집중했다.

지금부터는 화마와의 싸움이었다.

이것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면, 극성으로 끌어올린 불길은 공방 내부를 불태워 버릴 것이 분명했다.

염화신공.

극한으로 발현했다.

내부의 마나가 들끓으며, 화마와 완전히 동화되었다.

화륵.

화르르르르르르륵.

붉게 타오르는 머리.

만약 이 광경을 드워프 갈색 바위가 지켜보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화마는 인간, 아니 그 누구의 통제에도 따르지 않는 힘입니다. 신께서 세상에 불의 힘을 허락하셨을 때, 불은 인간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부여하면서도, 세상 모두를 불태워 버리는 재앙(災殃)으로서의 면모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불길이 어떻게 신도 아닌 한낱 인간의 통제를 따르겠습니까. 일 년? 십 년? 백 년? 시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통제하려 하지 말고, 불길을 받아들이십시오. 화마는 그런 힘입니다.”

통제 불가.

그는 단언했다.

드워프로서의 기나긴 삶은.

역사가 기억하는 기록들은, 화마의 불길이 인간으로서는 다룰 수 없는 영역임을 명확히 말했다.

그러나.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겨우 하루의 시간이 지났을 때.

로만 드미트리의 손아귀에서 휘몰아치는 불길이, 점점 눈에 띄게 안정되기 시작했다.

* * *

굴복했다.

휘어잡았다.

불의 열기가, 로만 드미트리의 의지를 따랐다.

‘너는 나의 것이다.’

화마와의 만남.

그때부터 이미 관계는 정립되었다.

천명을 말하던 화마는 로만 드미트리의 소유가 되었고, 지금부터는 완벽하게 통제 안에 들였다.

염화신공의 능력이 아니었다.

하늘에 닿았던 백중혁으로서의 경험이, 화마의 불길을 강하게 억압했다.

그 결과.

치이이이이이익-

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첫 번째 검을 만들었다.

겨우 며칠.

생각보다 빨랐다.

날카롭게 번들거리는 검은 명검(名劍)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표정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불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첫 번째 검을 완성했을 때는, 이전보다 발전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시.’

검을 한편에 두었다.

그러고는.

작업을 재개했다.

카앙!

카앙! 카앙!

불이 넘실거렸다.

화마가 통제를 따르면서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기술을 깨우쳤다.

화덕의 불길을 이용하는 방식과는 달랐다.

화덕의 열기를 받아들여 강철을 두드리는 것이 이전의 방식이었다면, 화마의 불길을 사용하자 강철의 내외부 온도를 섬세하게 컨트롤할 수 있었다.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다양하게 실험했다.

정확히 어떠한 온도가, 최상의 품질을 만들어 내는지를 확인했다.

작업 속도는 빨랐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면서부터,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빠르게 원하는 형태를 완성해 나갔다.

그렇게.

두 번째 검을 완성했다.

이미 첫 번째 검을 완성했을 때부터, 이전에 제작했던 다크니스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부족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었다.

화마를 다루는 기술이 완벽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결과물 또한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졌다.

불에 휩싸인 채로 강철을 미친 듯이 두드렸고, 공복으로 지낸 시간이 벌써 열흘이 넘었는데도 시간의 개념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인간으로서의 기본 욕구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는. 백중혁이라는 존재는, 무언가를 이룩함으로써 살아가는 그런 존재였다.

카앙-!

근육이 요동쳤다.

일련의 과정에, 근육의 형태도 작업에 적합하게 변해 갔다.

완전히 몰두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마침내 세 번째 검을 완성했을 때.

불길에 휩싸인 검을 바라보며, 강한 확신을 얻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화마를 완전히 길들였다.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자신이 공방에 들어온 목적을 실현할 차례였다.

* * *

그때부터였다.

펠릭스가 확인한 상황이 펼쳐졌다.

공방 내부는 완전히 불길에 타올랐지만, 신기하게도 그 불길이 공방을 불태우지는 않았다.

경악스러울 정도의 컨트롤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화염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자신이 의도한 타이밍에 따라 강철에 열기를 전달했다.

카앙!

카앙, 카앙!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쌓여 갔다.

쌓여 가는 집념만큼이나 시간이 흘렀고, 로만 드미트리가 예정했던 한 달의 시간도 지나고 말았다.

하지만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지금 행하고 있는 방식이 옳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신의 손끝에서 완성되고 있는 결과물을 확인하며, 로만 드미트리는 작업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결국.

예정한 시간보다 보름이 더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툭.

공방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 * *

드미트리의 한 여관.

발렌티노 가문의 기사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만 카이로스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벌써 보름입니다. 가문의 대소사는 뒤로 미뤄 둔 채로, 이곳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지금 발렌티노 가문에는 영주님이 필요합니다. 산처럼 쌓인 일들이, 영주님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돌아갈 수 없다.”

단호했다.

기사의 말처럼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발렌티노 후작에게는 돈보다 중요한 꿈이 있었다.

“나는 이 순간을 고대해왔다. 처음 로만 드미트리 님의 검을 확인했을 때, 수집가로서 반드시 이분의 컬렉션(collection)을 모으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로만 드미트리 님이 공방에 들어섰다. 그런데 만약 지금 자리를 떴다가. 정말 혹시라도 나보다 먼저 검을 쟁취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나는 엄청난 상실감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갑자기 금주도 하시면서, 눈에 띄게 안색이 나빠지셨습니다.”

발렌티노는 애주가였다.

검을 모으는 것처럼, 명주(名酒)를 즐기는 것 또한 그의 취미였다.

발렌티노 후작은 타오르는 갈증을 느꼈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강력한 소신을 말했다.

“언제 로만 드미트리 님의 검을 확인하는 거룩한 순간이 찾아올지 모르는데, 술에 취해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나에 대한 배반이다. 절대,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서 검을 받아올 때까지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검을 쟁취했을 때. 블레이즈와 같이 전시한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때 내가 아껴 두었던 와인과 함께 그 순간을 즐길 것이다.”

순간.

기사가 한숨을 내뱉는 건 착각이었을까.

대부호 발렌티노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이럴 때 보면 철없는 아이 같은 모습을 보였다.

방법이 없었다.

벌써 보름을 기다린 고집을.

아니, 탐욕의 수집가라고 불리는 사람의 고집을 어떻게 꺾는단 말인가.

그때였다.

여관 문이 벌컥 열리며, 또 다른 기사가 나타났다.

“영주님! 로, 로만 드미트리가 드디어 공방에서 나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당탕!

“당장 드미트리 성으로 안내하라!”

발렌티노 후작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황급히 여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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