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1화 (311/615)

311화 역작(力作) (2)

지난 보름.

발렌티노 후작은 하염없이 로만 드미트리를 기다리며, 기대감에 불을 붙이는 말들을 들었다.

“로만 도련님이 이렇게까지 기한을 넘기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공방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작업이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마나를 통해 공방 내부를 확인한 결과, 엄청난 양의 마나가 대폭발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피닉스의 마법사로서 불의 힘에 익숙한 저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고, 그렇기에 어떤 상황이라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스와 펠릭스였다.

두 사람의 말은, 하나의 결론으로 직결되었다.

‘불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피닉스의 마탑주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이라니! 로만 드미트리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엄청난 작업을 진행 중인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예정한 시간을 보름이나 지날 이유가 없잖아. 아아, 빨리 확인하고 싶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만들려고, 이토록 공을 들이는 걸까.’

샐러맨더.

블레이즈.

다크니스.

로만 드미트리가 제작한 세 개의 검은, 발전을 거듭할 때마다 감히 비교가 불가할 정도의 완성도를 보였다.

샐러맨더보다는 블레이즈가, 블레이즈보다는 다크니스가 검으로서 월등히 뛰어났다.

그렇다면.

이번에 제작할 검은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주는 모습이, 장인들이 보여 주는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느껴졌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기다림의 고통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고, 한달음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다는 내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했을 때, 한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했다.

“……죄송합니다만, 로만 도련님은 공방에서 나오시자마자 연무장으로 향하셨습니다. 지금은 바로 만나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아.”

비틀.

몸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은 발렌티노 후작은, 마치 전 재산을 잃은 것처럼 절망적인 표정을 보였다.

이건 정말이지.

그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이었다.

* * *

연무장 위.

로만 드미트리가 존재했다.

햇볕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검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으로 완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생에도 이만한 검을 만들지는 못했다.’

백중혁의 검들.

당대 무림을 떠들썩하게 했던 명검들도, 이와 같은 완성도를 보여 주지는 못했다.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의 기술력이 뛰어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염화신공과 화마의 불길을 활용한 작업은, 검을 만드는 장인으로서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도달했다.

슥.

아름다웠다.

검을 바라보자, 하나의 영감이 떠올랐다.

‘염화신공을 기반으로 하는, 화마의 불길을 연상시키는 검법.’

작업을 끝내고.

곧바로 연무장을 찾아온 이유였다.

공방에서 강철을 미친 듯이 두드리며,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무공에 대한 갈망이 끓어올랐다.

검을 겨누었다.

가상의 적을 떠올리고는,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일초식, 타오르는 불길을 받아들인다.’

화륵.

화르르르륵.

검에서 붉은 기운이 일었다.

그것은 실제 화염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강렬한 열기를 동반해 눈앞의 적을 단번에 베어 버렸다.

동시에 절단면이 새카맣게 타 버렸다. 더 이상의 출혈은 없지만, 끔찍한 고통에 적이 비명을 질러 댔다.

일초식, 화(火).

기본적인 공격이었다.

이후 주변에서 다수의 적이 나타나자, 로만 드미트리는 검에서부터 분출하는 열기를 폭발시켰다.

‘이초식, 타오르는 불길로 적들을 휩쓸어 버린다.’

휘잉.

화르르르르르륵!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동반한 화염은 주변을 그대로 휩쓸었고, 특별히 검에 닿지 않은 적들조차 뜨거운 불길에 무사할 수 없었다.

상당한 파괴력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동시에 공격하던 적들이 불길에 휩싸이며, 수적 우위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초식, 화풍(火風).

이름을 지어 나갔다.

연상되는 이름으로 초식을 완성해 나가는 그때, 가상의 적들이 사그라지며 거대한 존재가 나타났다.

괴물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달려들어,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삼초식, 화염의 힘을 응축시켜 일점을 꿰뚫는다.’

화르르르르르르륵.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새빨갛다 못해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열기가, 거대한 존재의 심장을 관통했다.

퍽-

비틀.

괴물이 비틀거렸다.

단단한 외피로도 막아 내지 못했다.

마치 용암이 땅을 뚫고 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모습처럼, 뜨거운 열기는 외피를 녹여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그 안의 심장을 집어삼켰다.

괴물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무너졌다.

아무리 거대한 존재일지라도, 심장을 잃은 순간부터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다.

삼초식, 열화(烈火).

이제 마지막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수백 마리로 늘어난 괴물의 존재에 마나를 폭발시켰다.

‘사초식, 극한의 폭발.’

콰앙!

화륵, 화르르륵.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사초식, 화마(火魔).

재앙이 닥쳤다.

넘실거리는 마나가 불길로 변했고, 불길은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주변을 완전히 휩쓸어 버렸다.

화풍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열화의 열기를 화풍처럼 사용하는 힘이었고, 적들은 단순히 불에 타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새카만 재가 되어서 바스러지고 말았다.

그것을 끝으로.

검을 내려놓았다.

“이것의 이름은 염화검법으로 한다.”

염화신공에 뿌리를 둔, 화마의 불길을 활용한 검법.

새로운 검법이 탄생했다.

무료한 삶을 살아가며 메말라 버렸다고 생각했던 새로운 무공에 대한 갈망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면서 살아났다.

염화검법은 로만 드미트리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천마검법이라는 완전무결(完全無缺)한 무공을 터득했기에, 염화검법으로 천마검법을 대체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이것에 적합한 주인이 떠올랐다.

검을 거두었다.

지금부터는, 검의 주인들을 찾아갈 차례였다.

* * *

다크니스.

실험작 세 개.

그리고,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완성한 검.

그중 마지막 검을 제외한 네 자루의 검은 주인을 모두 정한 상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일단 다크니스의 주인부터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한스가 그의 걸음을 막았다.

“……도련님. 발렌티노 후작을 먼저 만나면 안 되겠습니까? 벌써 보름 전부터 드미트리에 머물며 도련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간절한지 옆에서 더는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하루 더 기다리라고 말한다면. 발렌티노 후작은 절망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공방 밖의 상황.

로만 드미트리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발렌티노 후작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기에, 그를 먼저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알겠다. 발렌티노 후작에게 안내해다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한스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발렌티노 후작이 그토록 바라던, 로만 드미트리와의 만남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 * *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

발렌티노 후작도, 로만 드미트리도.

서로의 안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곧바로 ‘새로운 검’에 대해서 말하기를 바랐다.

발렌티노 후작이 말했다.

“그래서, 검은 완성하셨습니까?”

욕망에 차오른 얼굴.

마른침을 자꾸만 삼켰다.

로만 드미트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이 순간에, 발렌티노 후작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 뛰었다.

“예.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습니다.”

눈짓을 주었다.

한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리 준비한 검을 대령했다.

“발렌티노 후작님과 약속했던 대로, 검을 구매할 기회를 드릴 생각입니다. 방식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경매입니다. 충분한 값을 치른다면 검의 주인이 되겠지만, 제 검을 저렴한 가격에 넘길 생각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검을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네 자루의 검 중.

첫 번째 실험작이었다.

이미 경매라는 방식은 예상했기에, 발렌티노 후작은 떨리는 손길로 검을 받았다.

“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수많은 수집품을 모으다 보면,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자연스럽게 진짜를 알아보는 안목이 생길 수밖에 없다.

로만 드미트리의 검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낼 만큼의 자태를 보였다.

매끄러운 검날에 날카로운 예기는 심장을 서늘하게 했고, 언뜻언뜻 드러나는 붉은 기운은 독특한 상징처럼 보였다.

무엇보다도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나를 잘 받아들이는 검들은 특유의 반응이 있는데, 로만 드미트리의 검은 그와 부합한 반응을 보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측정기를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슬쩍, 무언가를 꺼냈다.

마나 감응도를 측정하기 위함이었다.

최근 한 달 전에 개발된 신상품이었는데, 5단계로 나누어져 있는 감응 측정은 최고의 정확도를 자랑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발렌티노 후작은 오늘을 위해 특별히 거금을 들여 측정기를 구매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검은, 단순히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공을 들일 가치가 있었다.

화악.

마나가 스며들었다.

단계에 따른 현상은 간단했다.

안으로 스며든 마나가 얼마나 흡수되느냐에 따라 단계를 구분하는데, 처음에는 1단계에 부합하는 마나를 불어넣었다.

검이 영롱하게 빛났다.

1단계의 마나를 모두 흡수하고도 부족하다는 듯이 빛나는 모습에, 발렌티노 후작은 속으로 웃음을 보였다.

자신이 인정한 로만 드미트리가 제작한 검이라면, 최소한 3단계 정도는 큰 문제 없이 받아들이리라고 예상했다.

예상대로였다.

2단계, 3단계.

마나를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4단계부터는 완전히 다른 수준이기에, 이번만큼은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화악-

“……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1단계와 마찬가지로 마나를 남김없이 먹어치웠고, 이 정도라면 이미 검의 가치는 증명하고도 남았다.

발렌티노 후작은 망설이지 않고 5단계를 실행했다.

측정기의 제작자가 말하길 5단계부터는 세기의 보물이라고 표현했는데, 이윽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를 경악에 빠트렸다.

5단계조차도.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조금의 불안정함도 없는 검의 모습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역사에 길이 남을 보물을 만들었구나.’

심장이 뛰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에, 이만한 검을 경매에서 낙찰받기 위해서는 얼마를 투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블레이즈의 낙찰액은 1200골드다.

그에 두 배인 2400골드면 가능할까?

턱도 없다.

수천 골드의 단위로는, 검의 낙찰을 확신할 수 없었다.

발렌티노 후작이 물었다.

“……혹시 검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검의 이름은 써드 노-네임(third no-name)입니다.”

그 말에.

발렌티노 후작의 표정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이런 명검의 이름이 노-네임이라고요?”

그건,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이었다.

* * *

세 개의 검.

그것은 마지막 한 자루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세 개를 통틀어 무명(無名)이라고 불렀으나, 각자의 주인을 찾아가야 하기에 각기 다른 이름을 붙였다.

퍼스트, 세컨드, 써드. 검의 완성도에 따라 순위를 매겼고, 발렌티노 후작이 확인한 검은 가장 처음에 만들었으나 기술적인 수준이 떨어지기에 써드 노-네임이라 칭했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세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지막 한 자루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기에 명명한 이름이지만, 받아들이는 발렌티노 후작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써드 노-네임은 이미 충분히 보물이라고 할 만한 명검이었다.

그런데 이런 검을, 노-네임이라고 부르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세 번째라니.

발렌티노 후작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마나 감응 측정에서 무려 5단계가 나온 검의 이름이 써드 노-네임이라니요. 검에는 그에 부합하는 이름도 중요합니다. 이전까지는 샐러맨더, 블레이즈, 다크니스와 같은 명검에 부합하는 이름을 쓰시더니, 이번에는 왜 이런 안타까운 선택을 하신 겁니까?”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얼굴이었다.

수집가로서 살아가다 보니,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물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로만 드미트리는 진실을 말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저는 총 네 자루의 검을 만들었습니다. 이 써드 노-네임은 마지막 한 자루를 만들어 내기 위한 첫 번째 실험작이었고, 그렇기에 그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저는 안타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험하는 과정의 의미를 담았기에, 오히려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잠깐 사고회로가 멈추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의 퍼즐들이 제 자리를 찾아갔다.

“……그러니까 그 말은. 네 자루의 검 중, 이 써드 노-네임이 제일 하품(下品)이라는 의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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