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4화 (314/615)

314화 역작(力作) (5)

익숙한 느낌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케빈의 시선에, 크리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과 똑같았어. 너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를 경쟁자로 바라보았지.”

케빈과의 대결.

처음이 아니었다.

초반에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때만 하더라도, 비장한 결심과는 다르게 이렇다 할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이 많았었다.

그래서 따지듯 물었다.

대체 지켜보는 것만으로 무엇을 배울 수 있냐는 말에, 로만 드미트리는 황당하게도 케빈과의 대결을 제안했다.

그때.

케빈은 엉망으로 얻어터졌다.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크리스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끝까지 하시죠.”

건방졌다.

주제를 몰랐다.

나중에야 로만 드미트리가 전음으로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정말 자신을 이겨 보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케빈의 시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날의 일로 서열은 완벽히 정리되었다.

케빈은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단 한 번도 하극상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간혹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마주할 때면 그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강한 열망.

복잡한 감정이었다.

시기심이든, 열등감이든, 승부욕이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케빈은 크리스의 존재를 언젠가 넘어서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없는 자리에는 크리스가 훈련을 총괄하다 보니, 대부분은 크리스를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케빈도 훈련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크리스가 외치는 구령에 따라 검을 휘둘러 놓고도, 막상 서열이 부각되는 자리에서는 크리스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였다.

크리스는.

진실을 모르지 않았다.

알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태도, 어투 등등.

케빈은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냈지만, 크리스는 단 한 번도 그 감정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반응하지 않았는지 알아? 같잖았기 때문이야. 어린아이가 얼굴을 붉히면서 달려든다고 해도, 성인은 어린아이의 존재를 의식하고 대응하지 않아. 그와 비슷한 얘기지. 내게 있어 케빈이라는 존재는, 드미트리의 악귀라고 불리는 검사는. 처음 만났던 그때와 똑같이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어린아이에 불과해.”

슥.

검을 들었다.

노골적으로 퍼스트 노-네임을 보여 주는 상황에, 케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케빈. 나는 갈 길이 멀다. 너 따위에게 따라잡힐 만큼, 내 포부는 작지 않다는 의미야.”

화악-

오라가 일었다.

진심이었다.

서열을 넘보는 존재에게, 자신의 위치를 증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라.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실력으로 증명해 주마.”

탁.

한 발 물러나는 로만 드미트리.

그게 신호였다.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이.

타닥.

콰르르르르르릉.

케빈이, 빠르게 공간을 파고들었다.

* * *

빨랐다.

날랜 짐승처럼 달려드는 케빈의 모습에, 크리스는 검을 뻗었다.

‘섬전(閃電).’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적당히 할 생각은 없었다.

순간적으로 공간을 관통하는 공격에, 마치 케빈의 얼굴이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팟-

피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흘려보내더니, 케빈은 오라를 폭발시키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섬전을 피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처음 만났을 때의 케빈은 정답을 알고도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현재의 케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다만.

크리스도 발전했다.

크리스의 검이 기묘하게 꺾이더니, 뱀처럼 케빈의 목덜미를 물었다.

서걱.

섬전과 조나단의 비기.

방향을 꺾는 기술이었다.

이번만큼은 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케빈의 눈이 빨갛게 물들며 갑자기 몸을 틀었다.

경악스러운 장면이었다.

달려드는 속도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자, 목덜미를 물려던 검이 잔상을 훑고 지나갔다.

스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회피였고, 뒷발이 땅에 닿자마자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마나 쇄도.

대시(dash)였다.

코앞에 치고 들어온 케빈은,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곧바로 몰아붙였다.

카앙-

카카카카캉!

격렬한 충돌이 일었다.

머리를 노리는 공격이 막히자 옆으로 파고들며 옆구리를 공격했고, 크리스는 빠르게 검을 회수하며 공격을 막아 냈다.

그와 동시에 오히려 케빈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케빈은 몸을 젖히면서 공격을 흘려보내더니, 스프링처럼 몸을 튕기면서 이번에는 크리스의 심장 부근을 노렸다.

카앙!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이었다.

서로 상대를 물어뜯겠다는 듯이,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훅.

콰르르르르르르릉.

크리스의 오라가 공간을 갈랐다.

스치기만 해도 육체가 찢겨 나갈 것만 같은 섬뜩한 소리를 동반했지만, 케빈은 오라로 일렁이는 공간에 뛰어드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둘 다 무공을 기반으로 오라를 사용하기에, 결국 더 강한 오라를 사용하는 크리스가 위력적인 면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통을 참았다.

케빈은, 핏물을 머금은 채로 웃음을 보였다.

확-

눈앞이 번뜩였다.

이번에도 크리스의 공격을 피해 내더니, 크리스의 얼굴을 향해 오라를 뿌렸다.

카앙.

예상대로.

크리스의 반응은 빨랐다.

공격을 막아 내자 케빈은 상대의 사각을 파고들며, 상대의 틈을 연쇄적으로 공략했다.

머리를 노렸다가 하체를, 하체를 노렸다가 등 뒤를, 등 뒤를 노렸다가 명치를.

상대의 주변을 짐승처럼 날래게 파고들며,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날카로운 이빨을 보였다.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크리스의 반격은 케빈의 목숨을 노렸지만, 케빈은 어떻게 알았는지 크리스의 공격에 반응해 냈다.

그때였다.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또 한 번의 섬광.

케빈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번만큼은, 크리스의 공격을 코앞에서 버텨 낼 자신이 없었다.

“인정하지. 확실히 너는 예전과는 달라졌다.”

오라를 헤치며.

크리스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나운 얼굴의 그는, 진심으로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다.”

아직.

크리스는, 전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 * *

피부가 따끔했다.

크리스를 마주하는 이 순간에, 케빈의 본능은 상대가 얼마나 위험한 적인지를 끊임없이 경고했다.

그러나.

물러날 수 없었다.

이날을 위해, 케빈은 악착같이 노력했다.

‘나는 크리스 본인보다도 크리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동안.

크리스를 쓰러트리기 위해 끊임없이 관찰했다.

크리스가 어떤 검술을 사용하는지, 검술을 사용할 때의 버릇은 없는지, 크리스 특유의 습관을 파악하면서 가상의 대련을 진행했다.

덕분에 첫 번째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섬전은 보고 반응하는 것이 불가능한 공격이지만, 근육의 움직임과 섬전 특유의 자세를 파악해 몸을 틀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미리 훈련되지 않았다면, 첫 번째 공격에 머리가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이후에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미리 파악한 정보들을 기반으로, 크리스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꽈악.

검을 움켜쥐었다.

크리스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여유가 넘치는 반응에, 빨갛게 물드는 눈빛이 케빈을 점점 광기에 빠트렸다.

“건방 떨지 마, 이 새끼야.”

타앗.

콰르르르르르르릉.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공간을 파고들며, 크리스의 머리를 베었다.

카앙-

공격이 막혔다.

크리스는 곧바로 반격을 시도했고, 그가 보이는 근육의 움직임은 명백한 의도를 전달했다.

‘오른팔.’

경악스러울 정도의 감각이었다.

말이 근육의 움직임이지, 정말 미세한 신호들을 조합해서 케빈은 상대가 어떤 의도를 행하려는지를 알아차렸다.

거기에 귀혼마공 특유의 예민한 감각까지.

케빈은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내면서 다음 공격을 시도하려고 했는데, 오른팔에서 일어나는 화끈한 통증에 눈을 부릅떴다.

팟-

피가 튀었다.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도, 크리스의 검은 오른팔을 얕게 훑고 지나갔다.

‘어깨.’

이번에는 어깨였다.

검을 높이 치켜든 크리스가, 검을 내리찍으며 연계 공격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의도를 알아채고 반응했는데, 어느새 어깨를 베어 내는 검에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서걱.

통증이 일었다.

빨랐다.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듯한 반응은 허세가 아니었고, 크리스는 케빈이 미처 반응하지 못할 만큼의 압도적인 스피드를 보였다.

전율이 일었다. 드미트리의 이인자.

크리스는 실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존재였고, 자신이 왜 드미트리의 섬광이라고 불리는지를 눈앞에서 직접 증명했다.

강했다.

그래서 가치가 있었다.

크리스를 쓰러트려야만, 퍼스트 노-네임의 주인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크르르르륵.”

눈이 빨갛게 물들었다.

광기에 번들거리는 얼굴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카앙!

카카카카카카캉!

격렬하게 부딪쳤다.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고, 크리스가 빠르게 반격하는데도 불구하고 케빈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움직임으로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공격이 적중하지 않았다.

크리스가 한발 먼저 반응하며 흘려보냈는데, 시간이 갈수록 케빈의 공격이 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였다.

확-

콰르르르르르릉.

바로 눈앞을 가로질렀다.

케빈은 크리스를 몰아넣더니, 얼굴을 옆으로 틀며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흘려보냈다.

대담했다.

얼굴이 관통당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케빈은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달려드는 것을 택했다.

드미트리의 악귀.

괴물이었다.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빛이, 마침내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천마검법 전반부 일초식.’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릉.

전력을 폭발시켰다.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크리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끝이다.”

크리스의 영역.

거리에 들어섰다.

케빈의 공격이 제대로 시도되기도 전에.

세상이 번뜩였다.

‘일섬(一閃).’

팟.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가슴팍이 불에 타는 듯한 뜨거운 통증에, 케빈의 시야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 * *

케빈을 내려다보았다.

원했던 승리를 거두었지만, 크리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빈민가 소년이 이렇게 강해지다니.’

방금의 대결.

진심으로 감탄했다.

케빈은 자신의 대응을 예상해서 숨 돌릴 틈 없이 몰아쳤고, 만약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웃을 수 없었다. 케빈과 자신은 시작점이 다르다.

처음부터 오라 검사였던 자신이, 빈민가 소년에 불과했던 케빈에게 추월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짜증이 났다.

처음 대결했던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을 받고도 일방적으로 패배했던 존재가, 어느새 자신을 위협할 만큼 성장해 버렸다.

사실 케빈의 성장을 모르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드미트리의 악귀라고 부르듯, 케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예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케빈이 자신에게 열등감을 보이는 것처럼, 케빈과 자신의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척.

검을 겨누었다.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가슴팍에서부터 피를 뚝뚝 흘리는 케빈은, 목에 겨눠지는 검에 눈물을 보였다.

“……끄윽, 끄으윽.”

이를 악물었다.

억지로 울음을 삼켜 내고는 있지만, 눈물이 가득 차오른 케빈은 대결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고집을 보였다.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패배했다.

결국은 넘어서지 못한 벽에, 드미트리의 악귀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제야 알았다.

케빈은 아직 어리다는 것을.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주기 싫다는 듯이 울음을 삼켜 낸 그가, 크리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끝났다.

크리스의 승리였다.

분명히 기뻐해야 할 상황에, 크리스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상대로도 패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현실에 안주하는 순간, 저 순수한 열망을 상대로 무릎을 꿇는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더는.

케빈이, 빈민가의 소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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