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전쟁 포로 (5)
브라이튼 남작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지 몰랐기에, 그는 다급하게 물러나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공격…… 컥?!”
서걱.
피가 튀었다.
명령을 채 내뱉기도 전에, 번쩍이는 불빛이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에 목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핏물과 가쁜 숨소리를 내뱉으며 어떻게든 다음 말을 이어 가려고 했지만, 흐릿해지는 브라이튼 남작의 시야로 자신을 지나치는 크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남작님!”
“이익! 공격하라!”
브라이튼 가문의 기사들.
그들이 발끈했다.
일제히 오라를 일으키며, 크리스를 필두로 달려드는 드미트리의 병사들을 향해 살의를 보였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장관이었다.
크리스는 브라이튼 남작을 처리하고는 가장 먼저 적들과 맞닥트렸고, 사방에서 폭발하는 오라는 단번에 그의 존재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오라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크리스는 달려드는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더니, 오라를 단번에 베어 버리고 그 너머에 있는 적들의 머리를 날렸다.
“크악!”
“으아악!”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 펼쳐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크리스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십수 명의 사람들이 명을 달리했고, 뒤따라 도착한 케빈이 적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기사, 병사 가릴 것 없이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막으라면서 동시에 공격을 시도했지만, 적들의 공격이 뒤엉키는 상황에서 케빈은 경이로운 움직임을 보였다.
확-
콰르르르르릉.
고개를 틀어 공격을 피했다.
곧바로 상대의 품을 파고들며 턱밑을 검으로 쑤셔 버렸고, 양옆을 노리는 공격은 절묘한 위치로 동시에 막아 내더니 적들의 머리를 날렸다.
그러고는 머리를 젖혔다.
악에 받친 브라이튼의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지만, 그들은 케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겁에 질린 눈빛을 보였다.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이건, 맹수와 초식 동물의 싸움이었다.
적들이 두렵다는 생각에 살짝 망설이는 반응을 보이자, 케빈은 어김없이 적들의 심장에 검을 쑤셔 넣었다.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귀신처럼 상대와의 거리를 허용하지 않았고, 득달같이 밀려드는 공격에도 물러서질 않았다.
드미트리의 섬광과 드미트리의 악귀. 명성,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두 존재가 선봉에 나서는 모습은, 드미트리에게 있어 매우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아레스.
새로 합류한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을 받들어 빠르게 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제이슨을 고문할 때.
뮤네즈 백작은 참담한 광경을 바라보며, 턱밑까지 차오르는 공격 명령을 억지로 꾹꾹 억눌렀다.
분노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겁을 먹었다.
이 순간만 지나가면, 로만 드미트리의 분노와 자신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 분노를 표출할 상대가 필요할 뿐이다. 드미트리의 포로들을 고통스럽게 고문한 맥히튼 남작과 제이슨만 처리한다면, 그때는 조용히 물러나겠지. 아무리 로만 드미트리일지라도 연속해서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을 바랄 리는 없다. 참자, 이번만 참자.’
동부 전선 최전방.
뮤네즈 백작은 이곳의 지휘관으로 발령받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대단한 애국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드미트리와의 전쟁으로 생긴 공백.
당분간은 동부에서 전쟁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든든한 후원자인 장인의 입김으로 한 1년 정도만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을 쌓고자 했다.
그렇기에.
멤피스 후작도 ‘동부의 귀족’들에 뮤네즈 백작은 배제해 주었다.
수도로 돌아가면 탄탄대로의 미래가 보장되는 상황.
전면전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은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빌어먹을.’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상황에.
성을 향해 달려드는 아레스의 모습에.
결단을 내렸다.
“전군. 드미트리를 공격하라!”
“공격하라!”
팟.
푸슈슈슈슈슉.
화살이 발사되었다.
수백의 화살이 하늘을 수놓았고, 크로노스의 워 메이지들이 마나를 끌어 올리며 마법을 발현했다.
“인페르노.”
“파이어 캐논.”
“라이트닝 스피어.”
화륵.
화르르르르르르르륵.
빨갛게 일어나는 화염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고, 간신히 벗어난 병사들은 몸을 관통하는 전기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마법을 피했다고 해도 화살 공격에 고슴도치가 되어 버렸다.
성벽의 이점을 살려 시도되는 공격은 상당히 위력적이었지만, 그러한 공격에도 아레스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마법은 피했고.
화살은 검으로 쳐 내 버렸다.
아레스는 성벽에 거의 도달했을 때, 허리춤에서 단검 몇 자루를 뽑아 들더니 그대로 던졌다.
팍.
파파파팍.
성벽에 박혔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아레스가 땅을 박차는 순간, 사람들은 경악스러운 광경을 목격했다.
파팟-
타타타탁.
아레스가.
단검의 손잡이를 마치 발판처럼 사용해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상식이 붕괴되는 장면이었다.
겨우 단검이 아레스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거니와, 그 좁은 공간을 밟고 하늘로 뛰어오르는 모습은 눈을 의심하게 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레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현실로 만들어 내더니, 순식간에 적들로 득실거리는 성벽 위로 떨어졌다.
“고, 공격해!”
“죽어!”
콰르르르르릉.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때부터.
학살이 시작되었다.
번뜩.
“컥?!”
“크악.”
아레스가 적진을 파고들었다.
밀려드는 적들을 쉬지 않고 베어 버렸고, 마법사들의 공격은 피하거나 시체를 방패막이로 삼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전쟁이 들끓는 공간에서 아레스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사람들이 발할라의 신성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기 전부터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완성된 형태의 전사로 발전해 있었다.
그런 그가.
로만 드미트리의 가르침을 받았다.
약간의 가르침만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성벽을 타고 올라간 과정은 새로운 마나 활용법을 접목한 방식이었다.
확실히 아레스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게다가 전사로서의 과감한 면모는, 크로노스 제국의 기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드는 상황에 적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렸다.
그러고는.
번뜩.
콰르르르르릉.
성문을 지탱하는 사슬을 잘라 버렸다.
쿵.
쿠르르르릉.
해자(垓子) 위로 내려앉는 성문.
아레스가, 혼자만의 힘으로 성문을 열었다.
* * *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아레스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했기에, 전장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직접 증명했다.
충격적이었다.
적들은 물론이고.
드미트리의 병사들도 놀란 표정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외에, 이와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존재는 없었다.
저벅저벅.
활짝 열린 길을.
로만 드미트리가 걸었다.
머리 위로 작렬하는 화살과 마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그렇게 활짝 열린 성문을 통해 안으로 진입했다.
성문 너머로 겁에 질린 적들의 표정이 보였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서로의 등을 떠밀다가, 한 존재가 먼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자 용기가 들불처럼 번졌다.
현실을 외면했다.
상대가 한 명이라는 사실에.
수백, 수천의 병력이 힘을 합친다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할지도 모른다는 자기 암시를 걸었다.
그렇게.
콰직!
“크악.”
처음 달려들었던 기사가 검과 함께 그대로 베어졌다.
로만 드미트리는 검을 통해 오라를 발현하지 않았는데도, 오라를 발현한 검과 기사의 갑옷을 마치 종이처럼 찢어발겼다.
곧바로 다른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한 존재를 향해, 마치 어둠이 밀려드는 것처럼 공격이 들이닥쳤다.
훅.
푸확!
피하고.
적의 가슴팍을 베었다.
비명이 울려 퍼지면,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의 팔마저 베어 절망의 늪에 빠트렸다.
베고, 베고, 또 베었다.
오라는 적극적으로 발현하지 않았다.
아주 일말의 오라만 사용할 뿐, 육체적인 능력만으로 적진 한복판에서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였다.
그것은 적에 대한 자비가 아니었다.
강력한 오라로 단번에 소멸시키는 것은 고통 없이 죽는 너무나도 편한 방법이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일부러 적들의 명을 단번에 끊지 않았다.
이번 싸움.
복수를 위한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하고 세상에 알린다면.
그때는 이와 같은 참상(慘狀)이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릴 것이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해하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설령 상대가 크로노스 제국이라 할지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를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선례란 그런 의미였다.
상대에 예외를 두지 않고 확고한 태도를 보였을 때, 충격적인 선례는 다른 이들에게 경고를 부여할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드미트리를 건드리지 말라는 확실한 경고를.
뒤이어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크로노스 제국은 휴전 협정 때문에 동부에 많은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너무나도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고통을 호소하던 캐롤의 모습이 드미트리 병사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그들도 로만 드미트리와 마찬가지로 잔인한 면모를 보였다.
그들 또한.
드미트리의 방식에 물들었다.
적들에게 있어, 인간으로 남기를 희망하지 않았다.
“……끄, 끝났어. 드미트리를 막는 건 불가능해.”
뮤네즈 백작이 절망했다.
로만 드미트리.
저 괴물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8서클 마법사인 셰피르와 30만 대군을 동원했을 때도 패배했기에, 이제야 성벽을 믿고 수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인지를 알았다.
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죽음의 공포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는 생각에, 그는 병력의 지휘를 포기하고는 황급히 걸음을 돌렸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도주!
그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부관들을 뿌리치며, 마구간에서 말을 하나 챙겨 곧바로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이 보였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자신은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순간.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불길이 번졌다.
마치 생명이 있는 존재처럼, 성문을 집어삼키는 불길이 앞길을 막아 버렸다.
뮤네즈 백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그제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분노를 마주한 그 순간부터,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 * *
크로노스의 대회의실.
그곳을 향해, 한 사내가 성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벌컥!
문을 거칠게 열었다.
안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 크로노스 귀족들의 모습에, 사내는 예의를 차리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멤피스 후작! 이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크로노스가 일방적으로 공격당했는데, 휴전 협상을 유지하겠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입니다!”
사내의 정체.
크로이트 후작이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권력자 중 하나.
최근에는 멤피스 후작에게 밀려서 한발 물러난 모습을 보였지만, 뮤네즈 백작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뮤네즈 백작은 그의 사위였다.
금지옥엽의 딸이 선택한 사내였기에, 크로이트 후작도 뮤네즈 백작을 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 사위가 죽어 버렸다.
분노를 감출 수 없는 상황에, 휴전을 유지하겠다는 크로노스의 결단은 분노를 제대로 자극했다.
“대체 언제부터 크로노스가 이렇게 겁쟁이였습니까? 적들이 국경을 침범했고, 크로노스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가겠다니요. 이번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드미트리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는다면, 대륙 전체가 크로노스의 나약함을 비웃을 겁니다.”
목소리를 높였다.
분노를 토해 냈다.
만약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당장에 회의실을 엎어 버릴 기세였다.
멤피스 후작이 말했다.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어떻게 복수하실 생각입니까?”
“그게 무슨……!”
“현명하게 생각하십시오, 크로이트 후작님. 크로노스는 항상 섣부르게 움직였다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습니다. 베네딕트 후작을 내세워 카이로의 반란에 가담했을 때, 발할라 제국의 축제를 끝내고 기습적으로 공격했을 때, 드미트리를 직접 공격했을 때, 그리고 최근 발발했던 드미트리와의 전면전까지. 크로노스는 그때마다 항상 필요 이상의 힘을 동원했습니다. 분명히 내부에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 전력이었으나, 결과는 충격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싸늘한 반응이었다.
멤피스 후작은 상석에 몸을 기대며, 크로이트 후작을 보았다.
“저도 화가 납니다.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선례는 우리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고, 그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어중간한 준비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크로노스의 역사.
승리로 장식되었다.
단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던 크로노스가, 지금만큼은 유일한 예외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세를 고쳐잡았다.
사나운 눈빛으로 크로이트 후작을 올려보며, 멤피스 후작이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를, 대체 어떻게 벌하시겠다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