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전쟁 포로 (6)
멤피스 후작의 발언.
부정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동안 무엇을 예상했든, 매번 그것을 뛰어넘는 과감한 행보로 승리를 쟁취했다.
특히 발할라와 크로노스가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발할라의 축제에 참여한 일은,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증명했다.
객관적인 전력 차이에는 조금도 휘둘리지 않았다.
분명히 드미트리의 힘만으로 두 제국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도, 그는 기어코 개인의 능력으로 상황을 뒤집었다.
크로이트 후작도 인정했다.
다시 한번 극단적으로 치달을 각오를 하지 않는 한, 로만 드미트리를 벌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압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존재인지는. 그동안 크로노스의 이름값에 벌벌 떨던 존재들과는 다르게, 로만 드미트리는 물러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크로노스 제국입니다. 크로노스의 정체성(正體性)은 군림하는 것에 있고, 상대가 어떤 존재이든 간에 우리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바로 로만 드미트리처럼 말입니다!”
일련의 상황.
머리로는 이해했다.
멤피스 후작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지만, 크로노스는 상식으로 통용되는 나라가 아니다.
“드미트리와 휴전 협상을 체결했을 때. 저는 그 선택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저와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적과의 타협을 받아들였습니까? 단순히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적의 뺨을 때려도, 상대가 무릎을 꿇고 잘못을 시인하게 만드는 나라가 크로노스였습니다. 남들이 크로노스의 불합리함을 아무리 비난해도. 우리는, 크로노스 제국이 그런 강대국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최근.
크로노스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패배로 얼룩지는 역사에, 크로이트 후작은 멍하니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 없었다.
“진실을 말해 주십시오. 크로노스 황제 폐하가 왜 안식에 들어가셨는지, 그리고 일 년 뒤에 무엇을 계획하고 계시는지. 저희에게 진실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이번만큼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강경했다.
멤피스 후작을 바라보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대회의실에 모인 귀족들은 숨을 죽였고, 멤피스 후작은 아무 말도 없이 크로이트 후작을 바라보았다.
대화는 단절되었다.
크로이트 후작은 분명히 본인의 생각을 밝혔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 시간이 갈수록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녕, 그렇게 나오시겠다는 겁니까? 알겠습니다. 저는 영지로 돌아가, 저와 뜻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겠습니다.”
홱.
걸음을 돌렸다.
분노한 얼굴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멤피스 후작은 크로노스 황제의 대리인이었고, 아무리 황제 본인이 아닐지라도 그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항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크로노스 황제의 권위는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계속되는 패배는,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권위를 점차 무너트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슥.
무언가를 뽑는 소리가 들렸다.
크로이트 후작이 이상한 기색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강렬한 충격이 그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푹!
복부를 관통하는 검.
눈을 부릅떴다.
격하게 흔들리는 시야에, 광기로 얼룩진 멤피스 후작의 얼굴이 보였다.
* * *
피를 울컥, 뱉어 냈다.
힘을 잃어 가는 육체에 무릎을 꿇으며, 크로이트 후작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대, 대체 왜?”
크로이트 가문.
제국의 실세다.
아무리 조금 밀려났다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처리할 존재는 아니다.
안쓰러운 손길로 검을 빼내려는 움직임에, 멤피스 후작은 더욱 힘껏 찔러 넣으며 이죽거렸다.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 크로노스 제국의 근간은 모두 황제 폐하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데 황제 폐하의 명령에 의문을 가지는 네 녀석 같은 존재를, 내가 왜 살려서 돌려보내야 하지?”
푸확.
검을 뽑았다.
분출되는 피에, 크로이트 후작은 바닥에 쓰러지며 초점을 잃어 갔다.
“카스트로.”
“예.”
“황제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명한다. 지금 당장 병력을 보내, 크로이트 가문과 관련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단순히 혈족(血族)의 관계를 떠나, 평소에 크로이트와 뜻을 통하며 친분을 유지했던 존재들도 숙청 명단에 포함한다. 이는 크로노스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이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존재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처리해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크로노스 랭킹 1위.
왕실 기사단의 수장인 카스트로가, 덤덤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로이트 가문이, 이렇게 허망하게 몰락할 줄은 다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멤피스 후작이 고개를 돌렸다.
귀족들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하자, 피로 물든 웃음을 보였다.
“크로이트는 멍청한 녀석이다. 크로노스 제국의 귀족으로서 태어나, 제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망언을 내뱉었다. 명심하라. 크로노스 제국의 역사는 단 한 번도 패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상대들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처럼 상당한 위엄을 떨치는 존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어김없이 무릎을 꿇고 크로노스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귀족들의 뒤를 걸었다.
사나운 목소리에,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에, 귀족들은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만약 그 누구든 크로노스의 승리에 의구심이 생긴다면. 대륙의 역사를 돌아보아라. 크로노스가 그동안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크로노스가 어째서, 대륙 제일의 강대국이라고 불리는지를. 로만 드미트리가 상대한 전력은 크로노스의 일부일 뿐이다. 멍청하고 한심한 녀석들은 그 일부를 무너트린 것만으로도 크로노스를 이긴 것처럼 벌써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지만, 크로노스의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다. 승리는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일이다. 다만, 어느 정도로 승리할지를 황제 폐하께서 결정하실 뿐이고, 로만 드미트리는 그분의 분노를 자극했다.”
1년.
카운트는 시작되었다.
크로노스 황제가 다시 한번 병력을 일으켰을 때, 그때는 그 무엇으로든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황제 폐하를 믿어라. 역사가 반복되듯, 승리의 역사는 크로노스 제국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인정했다.
크로노스는.
단 한 번도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부만으로도 대륙을 압도했기에, 사람들은 감히 크로노스 제국을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고개를 조아렸다.
사람들은 깨달았다.
멤피스 후작.
그가 어떻게 실세로서 자리를 잡았는지를.
그 자리에 오를 만큼 뛰어난 능력과 잔인한 면모를 보유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황실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 현재의 멤피스 후작을 만들었다.
크로노스 황제가 가장 선호하는 황실의 개.
멤피스 후작은 본인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든, 권력의 앞잡이로서 본인의 역할에 충실했다.
상석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시는, 멍청한 크로이트 후작처럼 제국의 저력을 의심하지 마라.”
무심한 표정으로, 얼굴에 묻은 핏물을 벅벅 닦아 냈다.
* * *
드미트리의 행보.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처음 소문이 퍼질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드미트리에서 들려온 소식에 소문의 진위를 의심했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를 공격하다니!”
“……정말 이대로 휴전 협상을 무효화시키려는 걸까.”
“로만 드미트리는 확실히 예사 인물이 아니야. 크로노스 제국이 드미트리의 포로들을 숨겼다고 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병력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버렸잖아. 문제는 크로노스 제국의 대응이야. 실제로 전쟁을 선포할 의도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제국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과감한 행보가,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미친. 로만 드미트리가, 크로노스의 영토에서 포로들을 고문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대!”
“크로노스 제국이 순순히 포로들을 내놓은 거야? 확실히 세상이 변하기는 했네. 우리가 아는 크로노스 제국이라면 적반하장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게 정상인데,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니까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하는구나. 사실 생각해보면 휴전을 위해 50만 골드를 내놓기까지 했는데, 본인들의 문제로 전쟁을 재개할 수는 없지.”
“이걸로 휴전 협상은 유지되는 건가.”
얼마 뒤.
2차 충격이 사람들을 덮쳤다.
드미트리의 공격.
약속을 이행하고도 최전방 방어 진지를 함락시켰다는 말에, 일반 사람들로서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선을 넘었구나.”
“끝났어. 이제 제2차 대륙 전쟁을 막을 방법은 없어.”
“이게 결과적으로 드미트리에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드미트리의 사람이라면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충성심은 강해지겠네. 드미트리의 포로들을 숨기고 고문했다는 이유만으로, 직접 크로노스의 국경을 넘어 공격을 감행한 거잖아.”
제2차 대륙 전쟁.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전쟁을 확신했다.
크로노스가 이렇게 공격을 당했는데, 휴전 협정을 끝까지 지킬 이유는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전쟁을 준비하는 것과는 다르게, 크로노스 제국은 그 어떠한 액션도 보이지 않았다.
* * *
세상이 난리였다.
전쟁 가능성에 대해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말이, 에드윈 헥토르의 귓속으로도 흘러들어 왔다.
‘대체 로만 드미트리 님은 어떻게 그런 과감한 판단을 내리는 걸까.’
상황을 달리 보았다.
만약.
자신이 로만 드미트리의 입장이었다면, 똑같은 방법으로 드미트리의 포로들을 되찾아 올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다.
정말 전쟁으로 번진다면 드미트리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기에, 되도록 ‘휴전 협상’의 내용을 들먹이며 포로들을 되찾을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게 상식적인 생각이었다.
예민한 문제이니만큼 피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적을 상대로도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바로 국가 간의 정치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파격을 행했다.
국경을 넘었고.
포로들과 관련한 자들을 죽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최전방 방어 진지를 불태웠지만, 크로노스 제국은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힘의 차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동안 확실한 결과를 보였기에, 제아무리 제국이라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를 자극했다가는 본인들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제국을 제외하고는 절대 동등한 입장으로 여기지 않았던 크로노스가, 휴전에 이어 한발 뒤로 물러났다.
감탄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매번 에드윈 헥토르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렇다고 드미트리에게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휴전 협상부터 이번 문제까지. 타협을 허락하지 않았던 크로노스가 자신들의 분노를 최대한 억제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계속되는 패배에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확실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자존심을 어느 정도 포기하겠다는 의미겠지. 만약 크로노스 제국이 다시 한번 대륙 정벌의 야망을 드러낸다면. 드미트리와 크로노스. 뜨거운 불과 같은 존재들이 서로 물러섬 없이 정면으로 부딪쳐, 대륙의 판도를 결정할 것이다.’
확신이었다.
앞으로의 미래에, 사람들이 드미트리를 찬양하는 소식이 그리 즐겁게만 들리지는 않았다.
세상이 빠르게 변했다.
이전의 세상은 약자의 자리가 허용되었다면, 앞으로는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으면 국가의 명운이 위험할 것이다.
‘지금 내 수준으로는 헥토르를 보호할 수 없다. 강해져야만 한다. 드미트리를 도와서, 크로노스 제국의 야망을 저지할 수 있도록.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강해질 필요가 있다.’
걸음을 옮겼다.
에드윈 헥토르 왕자가 아니라.
지금은, 마법사로서 치열한 시간을 보내야 할 때였다.
* * *
같은 주제.
같은 정보.
하지만 그에 관한 생각은 달랐다.
에드윈 헥토르는 크로노스에 대한 걱정이 커진 반면, 프랑크 국왕은 다른 포인트에 집중했다.
“으흐흐흣. 프랑크 왕국은 현명한 국왕에 의해 부흥기를 맞이하는구나!”
선택의 갈림길.
프랑크 국왕은 드미트리를 택했다.
그때는 왕국 내부에서 말이 많았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도 모자라 최근 크로노스 제국을 압도하는 행보는 그를 즐겁게 했다.
권력의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원래는 크로노스와 발할라, 대륙의 양대 산맥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데, 지금은 그들 사이에 드미트리가 있었다.
새로운 권력.
드미트리의 위상이 변했다.
앞으로 그들을 중심으로 변할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빠르게 밑 작업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드미트리에게 잘 보일 방법은?”
상대는 사미르 백작이었다.
프랑크 국왕이 신뢰하는 존재.
그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고, 지금은 그 결과물을 확인할 차례였다.
“때마침 드미트리에 특별한 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행사?”
“예.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사람들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려 드미트리 가문의 삼남(三男)인 로렌 드미트리가, 얼마 전에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 A클래스로 승격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일 뒤에 승급식이 예정되어 있는데, 아주 높은 확률로 드미트리 공작이 그 자리에 참석할 것 같습니다.”
“그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미가 당겼다.
확실히 로렌 드미트리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드미트리 가문에서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프랑크 국왕이 말했다.
“지금 당장 회의를 소집하라! 드미트리가 무엇을 좋아할지, 회의를 통해 결정할 것이다.”
강렬한 열망으로 타오르는 눈빛.
그건 단순히.
프랑크 왕국에만 해당하는 현상이 아니었다.
D-day 5일.
이번 포로 사건과 맞물려, 샐러맨더 대륙의 관심이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를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