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파란만장한 승급식 (2)
헨리 앨버트!
시대의 흐름을 상징하는 인물!
사미르 백작은 자리에 앉으며, 본론보다는 먼저 팬심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
“정말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날 그곳에 있었다>를 읽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한동안 작품을 수십 번 반복해서 읽다 보니, 마치 제가 ‘그날’ 남부 전선에 같이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대체 어떻게 그런 대단한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겁니까?”
순수한 의도였다.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의 저자를 만났기에, 명작의 탄생 배경을 들어 보고 싶었다.
헨리 앨버트가 머리를 긁적였다.
부끄럽다는 듯이 반응하면서도, 입 밖으로 내뱉는 발언은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글쎄요. 처음 작품을 집필할 때만 하더라도, 제가 전장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가감 없이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다들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알지만,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시발점인 ‘남부 전선의 전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날의 일은 지금도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헥토르가 후방 진지를 함락시키고 워프 게이트를 점령했을 때, 카이로 왕실은 그들과의 협상을 준비했으나 로만 드미트리만큼은 달랐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본인이 로만 드미트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을 보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횃불들이 주변을 밝히는 산속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행보를 보여 주었습니다. 단 한 명이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헥토르의 별이라 불리는 에드윈 헥토르가 병력을 밀어 넣으며 로만 드미트리를 제압하려고 했지만, 아침이 밝았을 때 산은 시체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그날에,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현장에서 목격했는데, 그걸 어떻게 책으로 남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군요!”
사미르 백작이 무릎을 탁, 쳤다.
진심으로 감탄했다.
책에서도 설명되었지만, 남부 전선에서 벌어진 일은 남자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리액션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일까.
헨리 앨버트는, 신나서 묻지도 않은 것들을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후속작을 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로만 드미트리가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저 존재가 대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도 저희와 똑같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왜! 왜 로만 드미트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까. 그 이유는 바로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에 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이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대화가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남부 전선에서의 전투. 모두가 항복을 말할 때, 로만 드미트리는 승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카이로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크로노스를 등에 업은 베네딕트 후작의 승리를 말했지만, 결과는 로만 드미트리가 압도적으로 반란을 제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이와 같은 선택들은 반복됩니다. 모두가 아니라고 말할 때, 로만 드미트리는 결과로 증명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이 상식을 벗어나는 압도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고, 그렇게 쌓여 나간 결과가 현재의 로만 드미트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로만 드미트리니까 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인정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믿음입니다. 외부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를 갈고 닦았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본인이 옳다고 믿는 일을 행했습니다. 세상 사는 일이 모두 그렇습니다. 주변에서 떠드는 말에 휘둘려 본인의 방향성을 잃는 사람들은, 그렇게 시대의 흐름에 묻힐 뿐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시대의 반항아입니다. 주류를 따르지 않았기에 비난받았고, 주류를 따르지 않았기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아!”
그동안.
헨리 앨버트는 로만 드미트리에 빠져 살았다.
처음에는 알량한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로만 드미트리를 진심으로 인정했다.
그는 본받아 마땅한 대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삶의 모티브로 삼으면서, 헨리 앨버트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자신감이 넘쳤다.
과감하게 일을 행했다.
<그날 그곳에 있었다>와 <전설은 어떻게 탄생했는가>는, 삶을 관통하는 깨달음을 통해 탄생했다.
그는.
예전의 헨리 앨버트가 아니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이자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의 전임 교수인, 그야말로 명망 높은 인물로 탈바꿈했다.
“이렇게 직접 명강의를 듣게 되다니. 정말 무한한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사미르 백작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부터는.
본론을 말할 차례였다.
헨리 앨버트의 호감은 충분히 얻었으니, 조심스럽게 본론을 물었다.
“……사실 제가 헨리 앨버트 교수님을 찾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로렌 드미트리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어서입니다.”
그 말에.
헨리 앨버트는 방긋 웃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 저보다 로렌 드미트리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 * *
불과 몇 년 전.
헨리 앨버트는 초라한 인간이었다.
가문만 믿고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동하며 살았고, 그렇기에 인간관계가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고 바뀌었다.
세상에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이 있음을 알았고, 자신이 초라한 인간일지라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곁에 두면 비슷하게는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인간관계에 엄청난 신경을 썼다.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이왕이면 웃는 얼굴로 친절을 베풀었다.
그리고 전임 교수로서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 입성했을 때.
로렌 드미트리에게 큰 공을 들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 그와 대화를 나누었고, 덕분에 로렌 드미트리는 마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어느 날.
로렌 드미트리가 말했다.
“……요새 자꾸만 자괴감이 들어요. 둘째 형은 아카데미 기록을 모두 갈아 치우며 수석으로 졸업한 로드웰 드미트리이고, 첫째 형은 모두가 아는 대륙 제일의 검사인 로만 드미트리예요.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형들 발끝이나 쫓아갈 수 있을까요? 드미트리가 전쟁을 벌일 때 아무도 저를 필요로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 자리에서 왜 악착같이 노력해야만 하는 걸까요.”
하소연이었다.
자괴감에 빠져 내뱉는 말에, 헨리 앨버트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만약 로렌 드미트리였다면. 드미트리의 삼남으로서, 그 부담감을 이겨 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자신이 없었다.
로렌 드미트리는 그래도 형들과 비교해서 모자랄 뿐이지,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 내에서는 천재라고 불리는 부류였다.
그에 비해. 헨리 앨버트는 어떤가.
아예 아무런 재능도 없어서 집안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그였지만, 지금은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의 전임 교수가 되었다.
만약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로렌 드미트리에게 해 줄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지금의 헨리 앨버트는, 현실적인 조건에 절망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로렌. 너희 형들이 대단한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네 삶을 갉아먹을 뿐이야.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학생들 대부분은 너보다 뛰어나지 않아. 그렇기에 하위 클래스에 있는 거고, 그들은 네가 형들을 우러러보는 것처럼 널 바라보고 있어.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만족하라는 의미가 아니야. 인간이란 항상 완벽할 수 없고,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들은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살아가야만 해.”
헨리 앨버트.
로렌 드미트리.
평범한 인간이었다.
둘 사이에 형성되는 공감대에, 헨리 앨버트는 싱긋 웃었다.
“봐. 나 같은 사람도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해 먹고 살잖아. 그러니까, 비교에 휘둘리지 말고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그렇게 살아간다면, 설령 남들보다 뒤처질지언정 불행하지는 않을 거야.”
그날.
헨리 앨버트는 친구를 얻었다.
로렌 드미트리와 좋은 관계를 맺었고, 그때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헨리 앨버트는 사소할지라도 인간관계에 조금 더 신경을 썼다.
명망 높은 교수님.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헨리 앨버트의 명성은,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의 후광 때문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사미르 백작의 물음.
너무나도 쉬운 문제였다.
헨리 앨버트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기꺼이 선물을 내주었다.
“로렌 드미트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선물이 아닙니다. 지금,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심사. 로렌 드미트리는 A클래스로 승급하고도 빠르게 다음 단계를 바라기에, 성장에 뒷받침이 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정말 좋아할 겁니다. 제가 알고 있는 로렌 드미트리는 성장에 목마른 상태거든요.”
완벽한 대답이었다.
정확히 방향성을 말해 주는 대답에, 사미르 백작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헨리 앨버트의 호의는, 그의 머릿속에 오랜 시간 남아 있을 것이다.
* * *
승급식 하루 전.
드미트리 일가(一家)가 카이로스에 도착했다.
워프 게이트의 불빛이 가라앉고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카이로스가 열광의 도가니로 물들었다.
“와아아아아아!”
“드미트리! 드미트리!”
“로만 드미트리 님! 존경합니다!”
“꺄악-!”
난리가 났다.
카이로와 드미트리.
두 국가는 운명공동체였다.
드미트리 공국이 애초에 카이로에 뿌리를 두었다는 사실을 떠나, 베네딕트 후작의 반란부터 시작해서 크로노스와의 전면전까지 두 국가는 힘을 합쳤다.
그렇다 보니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의 영웅으로 추대받을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카이로 왕국은 베네딕트가 반란을 일으켰을 시점에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드미트리! 드미트리!”
“드미트리! 드미트리!”
나아가는 길을 따라.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익숙한 듯 걸음을 옮겼지만, 아버지인 드미트리 공작은 이와 같은 환호가 낯설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열광적인 반응은, 드미트리의 위상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한참을 걸었다.
마침내 카이로 왕궁에 도착했을 때, 다니엘 카이로는 문 앞까지 나와 드미트리의 손님들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 *
자리를 옮겼다.
가볍게 서로의 안부를 물은 다니엘 카이로는, 느닷없이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참, 세상일이라는 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카이로 왕국이 제국의 끄나풀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릴 때, 저는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연락했습니다. 저의 편이 되어 달라고요. 물론 드미트리의 힘만으로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카이로 왕가와 드미트리.
모호한 사이가 되었다.
드미트리는 분명 카이로부터 비롯된 나라였지만, 다니엘 카이로는 드미트리를 하대할 수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카이로는, 드미트리를 다스릴 자격이 없었다.
“베네딕트 후작의 반란과 크로노스 제국의 위협에서, 카이로 왕국은 드미트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자유를 누리지 못했을 겁니다. 드미트리가 새로운 왕국 연합을 선포했을 때. 저는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드미트리 공작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지만, 다니엘 카이로는 시작한 이상 끝을 볼 작정이었다.
“그동안 생각이 많았습니다. 헥토르, 움베르토, 레드포드, 프랑크. 그들은 드미트리가 새로운 왕국 연합의 리더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건 카이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미트리 공국. 정확히는 로만 드미트리 님만이, 앞으로 급변하는 미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했다.
카이로의 꼴이 우습게 되었다고.
드미트리에게 권력을 부여했는데, 너무 커지는 바람에 이제는 공국이라는 말이 무색하다고 말이다.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다니엘 카이로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드미트리의 발전에 기분 나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얻은 긍정적인 효과에 집중했다.
카이로 왕국은 허수아비에 불과한 나라였다.
크로노스, 발할라, 그리고 베네딕트 후작을 중심으로 한 중앙 정부가 왕실을 흔들었고, 다니엘 카이로는 본인의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상황을 바꾸어 준 것은.
로만 드미트리였다.
살 만해졌다고 해서, 숨통이 트였다고 해서, 다니엘 카이로는 멍청하게 권력을 주장할 생각은 없었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그 흐름에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죄악이다.’
결단을 내렸다.
사람들이 비웃는 모습을 무시했다.
카이로를 위해, 정녕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했다.
드미트리는.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보다도 더 높이 올라갈 존재였다.
“현 시간부로 드미트리 공국을 독립국(獨立國)으로써 인정하고, 훗날 드미트리가 제국의 칭호를 얻었을 때, 카이로 왕국은 드미트리를 지탱하는 신하의 나라로 남고자 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카이로와 드미트리의 미래입니다.”
새로운 관계 정립.
다니엘 카이로가,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