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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화 (325/615)

325화 파란만장한 승급식 (4)

끼익.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사내는 당당한 걸음으로 드미트리 일가를 향해 다가갔다.

“드미트리 공작님. 아드님의 승급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슬쩍.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이름을 잘 모르는 것 같은 눈치에, 사내가 먼저 신분을 밝혔다.

“저는 움베르토 왕국의 크리스틴 백작이라고 합니다.”

“크리스틴!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있습니다. 움베르토의 귀족분이, 카이로스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긴요. 드미트리의 삼남이 승급식을 치른다는 소식에, 오로지 축하 목적으로 방문했습니다.”

“허허, 그렇습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크리스틴 백작의 의도는 너무나도 노골적이었지만, 드미트리 공작도 사람인지라 아들의 성과를 축하해 주는 사람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눈치 게임의 승리였다.

먼저 말을 걸었기에 제법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던 크리스틴 백작이, 문득 떠오른 것처럼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아 참, 로렌 드미트리 도련님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선물이요?”

“예. 승급을 축하하는 의미로 드리는 것이니, 그리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인에게 눈치를 주었다.

하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를 대령했는데,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는 자태를 보였다.

“움베르토 왕국의 장인이 만든 검입니다. 실전보단 오늘과 같은 ‘행사’에 사용되는 검인데, 드미트리의 명성에 걸맞게 큰 공을 들였습니다. 외관은 순금으로 장식했으며,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석으로 중간중간에 포인트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검이 드미트리 가문을 위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드미트리의 문양과 로렌 드미트리 도련님의 이니셜을 새겨 넣었습니다. 크으,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의 말처럼.

너무나도 화려한 검이었다.

언뜻 보아도 수백 골드는 투자한 것 같았고, 크리스틴 백작은 완벽한 선물을 준비했다는 생각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였다.

드미트리가 아무리 대부호라고 할지라도.

로렌 드미트리와 같은 나이에 이만한 선물을 받는다면, 신나서 허리춤에 차 보는 등의 행동을 보여 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로렌 드미트리의 반응이 이상했다.

검에 관심을 보이기는커녕, 조금은 부담스럽다는 표정으로 검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당황했다.

이게 대체 무슨 반응이란 말인가!

크리스틴 백작은 로렌 드미트리의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했고, 장인이 완성한 결과물에 반드시 먹힌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반응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대놓고 싫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로렌 드미트리가 자신의 선물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설마 사치품을 싫어하는 건가.’

큰일이었다.

큰돈을 들이고도 환심을 사지 못했다면, 그간의 노력은 의미가 없었다.

그때였다.

“하하하, 정말 좋은 검이군요. 그 검을 들고 오늘 행사에 참석했다면, 정말 멋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미르 백작.

그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 * *

크리스틴 백작의 선물.

부담스러워하는 로렌 드미트리의 표정을 확인하자마자, 사미르 백작은 지금이 기회임을 알았다.

“로렌 드미트리 도련님의 승급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도 크리스틴 백작님과 마찬가지로, 빈손으로 올 수 없어서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틴 백작님이 준비한 명검과는 다른 느낌의 선물이라 좋아하실지는 잘 모르겠네요.”

겸손을 떨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는데, 둥그런 형태의 팔찌와도 같은 것을 네 개나 준비했다.

“최근에 오라 검사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마법 아티팩트입니다.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로렌 드미트리 도련님에게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웃돈을 주고 구매했습니다. 일단 효과를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팔목과 발목에 각각 착용하는 것인데, 사용자의 신체에 따라 크기가 자동으로 조절됩니다. 그리고 무게를 설정한다면, 10kg부터 시작해서 100kg까지 다양하게 무게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티팩트가 있어요?”

방금과는 달랐다.

살짝 관심을 보이는 로렌 드미트리의 반응에, 사미르 백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헨리 앨버트의 말처럼 로렌 드미트리는 발전과 관련한 것에 관심을 보였고, 훈련을 위한 마법 아티팩트는 당연히 탐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무게 조절 기능만 있었다면 사미르 백작은 이것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매료시킨 진정한 포인트는, 바로 마나 순환 능력이었다.

“이 아티팩트의 가장 큰 강점은 마나 순환 능력이 탑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오라 검사들은 마법진을 활용해 체내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마나 순환 훈련을 진행하는데, 이 마법 아티팩트를 착용하면 마법진을 활용한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주기적으로 마나를 순환시키며 불순물을 걸러 줍니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아이템이지요. 찬란한 보검은 아닐지라도, 로렌 드미트리 도련님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이와 같은 아티팩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눈빛이 변했다.

마나 순환이 언급되는 순간부터, 로렌 드미트리는 마치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눈빛을 보였다.

먹혔다.

확신이 들었고, 선물을 건네자마자 밝은 웃음을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반응의 차이가 극명했다.

크리스틴 백작의 선물은 감사하다는 말뿐 영혼은 없었지만, 사미르 백작의 선물은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보일 만큼 신나 보였다.

완벽한 전개였다. 미리 며칠 전 카이로스에 방문했던 노력이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선물은 프랑크 국왕 폐하가 특별히 준비해 주셨습니다. 직접 승급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로렌 드미트리 도련님의 승급을 축하한다는 말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다 기분이 좋네요.”

“당연히 좋을 수밖에요. 이렇게 찾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제 아들을 위해 이런 선물도 준비해 주시다니. 제가 크게 대접하겠습니다!”

드미트리 공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만약 이대로 끝났다면.

사미르 백작은 마무리마저 완벽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드미트리 공작님. 저희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뒤이어 나서는 귀족들.

승급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 * *

그야말로 선물 공세였다.

헥토르 왕국 출신의 베르크 남작은, 앞선 상황을 보고도 당당한 음성으로 말했다.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께서 특별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다들 테르칸이라고 아십니까?”

“……테르칸이요? 한때 헥토르의 소드마스터라고 불렸던, 헥토르 제일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미르 백작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베르크 남작이 씨익 웃었다.

“맞습니다. 헥토르 제일검. 그분이 살아 있을 적에, 어떤 방법으로 훈련했는지를 기록한 훈련 일지(日誌)가 있습니다. 대대로 헥토르 왕실의 소유로 보관되던 것인데,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이 드미트리 가문에 큰 빚을 진 것이 있어서 이것을 선물로 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최근에 검술 혁명이 일어나면서 예전의 방식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테르칸 님의 훈련 일지라면 로렌 드미트리 님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사미르 백작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테르칸의 훈련 일지!

그건 보물이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왕실의 보물을, 설마 로렌 드미트리를 위해 그냥 갖다 바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는.

경쟁하듯 나서는, 또 다른 귀족이었다.

레드포드 출신의 얀센 자작이었다.

그도 만만치 않은 선물을 준비했다.

“다들 대단한 선물을 준비하셨네요. 저희도 어떤 선물을 준비할지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만, 레드포드 국왕 폐하께서 드미트리 가문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면서 로렌 드미트리 님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힐끗.

시선을 주었다.

처음 나섰던 크리스틴 백작처럼 하인이 무언가를 가져왔는데, 그것이 무려 수레 하나의 규모였다.

쿵.

“훈련에 필요한 마법 아티팩트 12종, 마법 스크롤 30장입니다. 일 년은 충분히 사용하실 수 있는 분량이니, 마음껏 사용하시면 저희가 떨어질 즈음에 새로운 것들로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드미트리에게 받은 은혜를 갚는 일이니, 전혀 부담스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입이 떡 벌어졌다.

수레에 가득 찬 마법 아이템들.

사미르 백작의 선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그것들 전체의 가격은 천 골드를 훌쩍 넘었다.

소문으로 들었다.

론돈 백작이 국왕의 자리에 오른 이후, 레드포드 왕국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으며 재정적으로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그래도 이만한 선물을 준비할 줄은 몰랐다.

처음에만 해도 주도권을 완전히 휘어잡았다고 생각했던 사미르 백작은, 선물이 차례로 공개될수록 존재감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저는…….”

“특별히 선물로…….”

난리가 난 귀족들.

사미르 백작이 한 발 물러났다.

마법 아티팩트를 준비하며, 프랑크 국왕에게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했는데 꼴이 우습게 되었다.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다른 귀족들.

그들 또한, 헨리 앨버트를 통해 조언을 들었다는 것이다.

“에휴.”

한숨이 나왔다.

괜히.

프랑크로 복귀하기 싫어지는 사미르 백작이었다.

* * *

그로부터 보름 뒤.

드미트리는 공국에서, 드미트리 왕국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날.

드미트리 공작은 ‘국왕의 자리’에 오르며, 자신을 바라보는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는 너의 것이다. 드미트리가 제국의 칭호를 선포할 때, 그날 이 자리를 물려주도록 하겠다.”

처음에는 왕위(王位)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 로만 드미트리가 현장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기에, 지금은 시기상조라 판단하고 왕위를 거절했다.

그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드미트리 공작이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드미트리를 주도하는 사람은 로만 드미트리임을 다들 알았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각국의 국왕과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찾아와, 승급식 때보다도 더한 만남의 장을 형성했다.

그날의 만남에.

사람들은 확신했다.

앞으로 대륙은 드미트리 왕국.

아니, 로만 드미트리가 주도할 것이라고 말이다.

* * *

시간이 흘렀다.

대륙이 안정을 되찾았다.

드미트리 포로 사건 이후로 크로노스 제국은 너무나도 조용했고, 드미트리를 비롯한 왕국 연합은 빠르게 새로운 체계를 갖추어 갔다.

문제는 발할라 제국이었다. 발할라 제국은 최근에 문제가 많았다.

모랄레스의 죽음 이후로 은둔 생활을 하던 비에토 공작이 본격적으로 움직였고, 발할라 황제파와 비에토 공작파로 나뉘어 치열한 대립을 벌이고 있었다.

낭만을 잃은 자들.

그들이 낭만을 찾기 위해,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왕국 선포 후.

반년 뒤.

드미트리의 끝없는 산맥에서, 수풀로 우거진 산속을 바라보며 병사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소식 들었냐?”

“뭔데?”

“발할라 황제가 비에토 공작의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해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던데. 그래서 요새 발할라의 분위기가 매우 흉흉해. 일반 백성들은 비에토 공작을 지지하고 있지만, 발할라 황제가 갖춘 힘이 워낙 대단하잖아. 이대로 발할라에서 내란이 일어난다면, 드미트리까지 영향을 받게 되겠지.”

“빌어먹을 제국 놈들. 발할라든, 크로노스든. 제발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져서 다 쓸어 버렸으면 좋겠네.”

발할라 제국.

사람들의 큰 관심사였다.

비에토 공작이 은둔 생활을 접으면서 계속 문제를 일으키던 관계가, 마침내 전쟁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발할라의 내란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카이로 왕국과는 다르게 수천, 수만의 병력이 부딪치는 규모가 아니라,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다.

씁쓸했다.

이제 조금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전쟁이라니.

병사들은 몇 마디 더 주고받고는, 경계 근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였다.

부스럭.

“누구냐!”

“암구호를 말하라!”

수풀 너머.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은 번개같이 반응하며 무기를 겨누었고, 후방에 있는 병사는 곧바로 마법 통신을 보낼 준비를 끝냈다.

끝없는 산맥.

사실 특별히 경계할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방심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수풀을 뚫고 나타난 한 사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오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상황을 보고한 뒤에 일부는 주변을 경계하고, 일부는 사내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야윈 얼굴이었다.

사내는 병사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를 ……주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목소리가 작았다.

귀를 기울이자, 사내가 말하려는 바가 들렸다.

“……루나를 ……도와주십시오.”

루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성녀 이사벨의 나라.

끝없는 산맥 너머, 유일하게 인간들이 터전을 형성한 곳.

그곳의 이름이 바로 루나였다.

그 말인즉.

사내의 정체는, 루나 왕국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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