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6화 (326/615)

326화 아르카디아의 붕괴 (1)

말을 전한 직후.

사내는 의식을 잃었다.

치료사가 추정하기로는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린 상태로, 무리하게 끝없는 산맥을 넘어오다가 몸이 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외에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

며칠 동안 가벼운 음식을 먹이면서 몸을 회복시키자, 삼 일 정도 흘렀을 즈음에 사내가 스스로 병상에서 걸어 나왔다.

그날.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드미트리의 수뇌부들이 모두 자리한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목적을 물었다.

“루나 왕국의 사람이 어째서 끝없는 산맥을 넘어왔지?”

“일단 목적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루나 왕국의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내의 이름은 케이든.

루나 왕국의 기사였다.

그는 슬픔으로 물든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부터 3개월 전. 루나 왕국의 여왕이자 성녀이신 이사벨 님과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사실 드미트리와 크로노스의 전면전이 끝난 직후. 이사벨 님은 루나 왕국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크로노스가 계획하고 있는 모종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샐러맨더 대륙에 남았습니다. 저도 이사벨 님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확실한 것은 이사벨 님과의 연락이 끊기면서, 루나 왕국을 보호해 주던 신성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끝없는 산맥 너머.

아르카디아는 극심한 추위로 얼어붙었다.

생명체가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고, 그렇기에 이사벨의 탄생은 신의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이사벨 님의 신성력은 얼어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부여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성력의 부재로 한기(寒氣)를 막을 수 없게 되자, 추위에 얼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할 뿐만 아니라 식량의 문제도 생겼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 아르카디아는 지금 몰락하고 있습니다. 루나 왕국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사벨 여왕님이 무사한지를 확인하고 그분을 구해야 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사벨 여왕을 찾아 주길 바라는 것이냐.”

“예.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였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는, 간절한 심정을 대변했다.

상대는 크로노스 제국이다.

이사벨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원흉은 무조건 그들일 텐데, 샐러맨더 대륙에서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도 물러나지 않을 인물은 로만 드미트리밖에 없었다.

이사벨의 존재. 케이든의 부탁이 아닐지라도 한번 알아볼 가치는 있었다.

이사벨은 ‘알렉산드르의 정체’를 알려 준 인물이기에, 그녀가 막으려 했다는 모종의 음모는 드미트리의 미래와도 관련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알겠다. 이사벨 여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표정이 대번 밝아졌다.

우렁차게 소리치며, 고개를 수차례 숙였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부탁을 받아들였는데도, 케이든은 물러나지 않고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용건이 또 있는 건가.”

“사실은…….”

망설였다.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으나, 이 또한 해결해 줄 사람이 없었다.

“루나 왕국. 아니, 아르카디아 대륙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신성력의 부재는 아르카디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루나 왕국을 비롯한 이종족들도 굶주림을 호소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2개월 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죽어 나가는 생명체들이 속출하자, 이종족 중 한 종족이 평화 조약을 어겼습니다.”

평화 조약.

이종족들의 평화를 약속했던 그것이 찢겨 나가는 순간, 아르카디아는 피와 살육으로 물들고 말았다.

“한때는 회색 황무지(荒蕪地)의 방랑자라고 불리던 종족. 오크들이, 다른 종족들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 * *

지금으로부터 열흘 전.

샐러맨더 대륙이 평화를 누리고 있는 그때, 루나 왕국의 일곱 번째 저장고가 적들의 공격을 받았다.

“막아!”

“이곳은 절대 안 돼! 어떻게든 막아야 해!”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늘 위로.

푸슈슈슉.

수백 발의 화살이 발사되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짐승의 털로 만든 옷을 두른 병사들이, 악에 받친 얼굴로 화살을 끊임없이 발사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는 좀처럼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눈보라를 꿇고 달려드는 존재들은, 추위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명체인 화이트 울프(white wolf)를 타고 있었다.

크륵, 크르르륵.

크아아악!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마나를 끌어 올리더니, 화살을 매개체로 폭발시켰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

오라가 휘몰아치는 화살이, 그대로 화이트 울프를 관통했다.

퍽!

깨개갱.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화이트 울프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지자, 그 위에 타고 있던 건장한 체격의 괴물도 같이 나뒹굴었다.

그것으로 괴물의 생명은 끝났다.

화살은 그를 적중하지 않았지만, 뒤이어 달려드는 존재들이 바닥에 쓰러진 괴물의 안위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괴물을 짓밟았다.

순식간에 피가 터지고 살이 찢겨 나가는데도, 괴물들은 달려드는 목적 하나에만 집중했다.

결국.

그들이 마침내 성문 앞까지 도달했다.

“취익, 나를 따르라!”

가장 선두에 있는 괴물.

인간과 똑같은 이족보행이지만, 거친 피부와 돼지를 연상시키는 외관을 보유한 종족.

케이든이 언급했던 오크였다.

그는 달려드는 속도를 늦추지 않더니, 자신의 몸집만 한 거대한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는.

콰르르르르르릉.

오라를 일으켰다.

결렬하게 들끓는 오라를 단번에 폭발시키더니,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성문을 향해 그대로 휘둘렀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성문이 부서졌다.

마법으로 겹겹이 보호한 것인데도, 오크의 강렬한 한 방 앞에서는 버텨 내질 못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절망스러운 표정을 보인 이유였다.

선두에 선 오크는 일반 오크가 아니라 회색 황무지의 오크들을 이끄는 오크 로드였고, 그락사르라는 이름은 인간들에게 절망을 선사했다.

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그락사르는, 거친 울음을 토해 내며 도끼를 휘둘렀다.

“취익, 모조리 죽여라!”

콰직!

“크악.”

학살의 시작이었다.

지휘관을 비롯한 오라를 사용하는 검사들이 그락사르를 공격했지만, 그락사르의 압도적인 무력은 그들을 허수아비처럼 간단하게 도륙해 버렸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가로막는 적들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내리는데, 땅에 흘러내리는 핏물에서는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곱 번째 저장고가 함락되었다.

그락사르는 포로로 붙잡은 이들을 무릎 꿇리고는, 속속들이 도착하는 오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취익, 식량으로 삼을 ‘인간’들을 비롯해서 저장고에 있는 모든 식량을 확보하라.”

“취익, 알겠습니다.”

식량이라는 표현에.

루나 왕국의 사람들이 창백하게 질린 표정을 보였다.

그들은 기도를 빌었다.

이 극악무도한 존재들로부터, 제발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하지만.

“아악!”

“크아아악!”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비명에, 사람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그들은 더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 * *

케이든의 발언.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오크가 전쟁을 선포했다는 말에, 상황을 지켜보던 콘라드 자작이 물었다.

“아르카디아는 이종족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화합의 땅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라니요. 이종족간의 평화 협정에는, 그 어떠한 제약도 존재하지 않는 겁니까?”

“……예. 평화 협정은 믿음의 증표일 뿐입니다. 서로 분란이 일었기에 그것을 중재하고자 그러한 약속을 맺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르카디아의 종족들은 서로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참담한 표정을 보이며, 뒷말을 이었다.

“분란의 시작은 새로운 오크 로드가 등극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락사르’라는 이름의 오크는 매우 호전적이고 항상 아르카디아의 환경에 불만이 많았었는데, 이사벨 님이 실종되면서 상황이 악화되자 곧바로 주변에 있는 이종족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나 왕국의 영토를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르카디아의 붕괴.

화합이 깨졌다.

눈이 하얗게 쌓이던 땅이 피로 물들었고, 사람들은 굶주림보다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그락사르의 목적은 오크를 제외한 모든 종족의 ‘식량화’이며, 이사벨 님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만들어 둔 저장고를 전부 차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 이대로 있다가는 아르카디아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저희를. 루나 왕국을 구해 주십시오.”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식량으로 전락한 인간들의 현실은, 절망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은 차가웠다.

“루나 왕국을 도와주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끝없는 산맥을 넘어야 하고, 혹한의 추위를 이겨 내야 하며, 그로 인해 드미트리가 겪을 위험들을 감수해야만 한다. 우리가 어째서. 그간 교류하지도 않았던 루나 왕국을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이사벨 여왕을 찾는 문제와는 달랐다.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크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무심한 표정으로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케이든이 절망스럽다는 표정을 보였다.

이해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을 충분히 공감하지만, 끝없는 산맥을 넘어왔을 만큼 그의 의지는 간절했다.

“이해합니다. 드미트리로서는 크나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락사르의 존재가 언제고 드미트리도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그락사르의 방법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식량화한 이종족을 모두 먹어 치우고, 저장고의 식량마저 바닥을 드러낸다면, 그때는 끝없는 산맥 너머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이용하십시오. 아직 루나 왕국의 전력이 건재할 때, 저희를 활용해 훗날의 위험을 통제하십시오.”

그리고.

드미트리를 찾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사벨 님이 샐러맨더 대륙에 남겠다는 결정을 내리셨을 때. 저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거나 아르카디아가 붕괴한다면, 그때는 ‘로만 드미트리 님’을 찾아 충성을 맹세하라고요.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루나 왕국을 구해 주신다면, 루나 왕국은 끝없는 산맥 너머를 통제하는 문지기가 되어 영원히 드미트리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며 절절하게 말했다.

루나 왕국의 충성 맹세.

케이든의 강렬한 의지에, 드미트리로서도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 * *

잠시 케이든이 물러나고.

드미트리만의 회의가 진행되었다.

로렌스 자작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은, 케이든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루나 왕국의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락사르가 아르카디아의 땅을 점령하고 나면, 분명히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끝없는 산맥을 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 시기입니다. 지금이야 크로노스 제국과의 휴전 협상으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지만, 만약 그들이 대륙 정복의 야욕을 드러냈을 때 그락사르가 끝없는 산맥을 넘어오면 문제가 커집니다.”

“맞습니다. 차라리 그 전에, 그락사르를 처리하고 위험 요소를 없애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찬성파.

그들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크로노스와 오크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상황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그 전에.

그락사르를 처리하고 루나 왕국을 문지기로 세운다면, 확실히 최악의 상황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과 기름처럼, 콘라드 자작의 반대파는 다른 의견을 말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끝없는 산맥 너머의 오크들. 그들이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대규모 군대가 끝없는 산맥을 넘어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넘어온다고 한들, 저희는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해서 최소한의 피해로 적들을 막아 내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그들을 토벌하겠다고 끝없는 산맥을 넘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산을 넘는 리스크는 물론이거니와, 사시사철 땅이 얼어붙어 있는 그 땅에서 우리는 그곳을 터전으로 삼은 괴물들과 싸워야 합니다. 승산이 희박합니다. 이긴다고 한들, 피해가 막심할 겁니다.”

“이건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입니다. 루나 왕국은 드미트리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 저희가 희생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갑론을박(甲論乙駁)이 펼쳐졌다.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둘 다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한 가지를 선택한다면, 콘라드 자작의 의견에 힘이 실렸다.

끝없는 산맥 너머.

적의 땅이다.

충분한 준비 없이, 최악의 상황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루나 왕국은 타국일 뿐이다.

아르카디아의 가혹한 환경을 감당하면서까지 전쟁을 치르기에는, 그들과의 유대감이 깊지 않았다.

게다가.

‘발할라 제국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지금은 관망하는 것이 옳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케이든의 제안을 들으면서, 로만 드미트리는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루나 왕국을 외면하자는 전제는 ‘한파’라는 악재가 매우 컸다.

한파에 익숙하지 않은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괜히 아르카디아에 발을 들였다가, 승리는커녕 엄청난 피해를 받고 돌아올 수도 있었다.

한파.

그 단어가 익숙했다.

백중혁으로 살아가던 시절.

정파 무림만큼이나 무림 정벌을 방해하던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사파 무림도, 혈마교도 아니었다.

세력은 앞선 두 세력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단 한 가지의 강점이 그들의 존재를 성가시게 만들었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땅.

추위를 강점으로 활용하던 세력.

그들은 바로.

북해빙궁(北海氷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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