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아르카디아의 붕괴 (3)
루나 왕국.
그곳에는 루나를 대표하는 세 명의 검사가 있었다.
왕실 기사단장 레오.
설원(雪原)의 검사 자이로.
백색의 날다람쥐 케이든.
단순히 실력적인 부분에서 케이든은 앞에 두 명보다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루나를 대표하는 검사라고 불리는 만큼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4성의 오라 검사.
눈 위를 빠르게 움직이며 적을 몰아붙이는 검술은, 적어도 아르카디아에서만큼은 실력자라 불릴 만했다.
그런데.
케이든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출발 당일.
루나 왕국으로 떠날 29명의 병사가 나타났는데, 그들의 면면이 케이든을 자극했다.
‘……하나같이 강해 보이는데?’
케이든은 평생 아르카디아에서 살았다.
루나 왕국을 위해 끝없는 산맥을 넘었을 뿐, 사실 드미트리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지는 못했다.
크리스와 케빈.
둘 정도는 알았다.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었기 때문인데, 둘을 제외하고도 만만해 보이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 시선에 닿은 인물은 프레드였다.
분명히 일반 사병의 신분인데, 기세만으로도 프레드를 단번에 쓰러트릴 자신이 없었다.
그 옆에는 로건이 있었다.
건장한 체격에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하자, 로건 또한 자신의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레스를 보았다.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는 상황에, 케이든은 마른침을 삼켰다.
‘드미트리에 이만한 강자가 있다니.’
황당했다.
자신은 루나 왕국에서 레오와 자이로 다음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검사인데,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도 벌써 5명을 쓰러트릴 수 없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병사들도 일반 병사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막말로 루나 왕국 소속이었다면 왕실 기사단의 일원이 되고도 남을 사람들이, 일반 병사의 신분으로 케이든의 눈앞에 존재했다.
충격적이었다.
이 정도의 실력자들이라면.
30명이라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로만 드미트리가 등장했을 때, 케이든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척척-
병사들이 도열했다.
압도적이라고 생각했던 아레스조차도, 드미트리의 악귀라고 불리는 케빈조차도, 로만 드미트리의 등장에는 각 잡힌 모습을 보였다.
병사들의 존재감이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묻혀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발하는 강렬한 존재감을 마주하니, 이사벨이 왜 그를 찾아가라 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정말 어쩌면.
드미트리에 도움을 청한 것이, 루나 왕국을 살리는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예를 갖추는 케이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케이든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 *
일주일 전.
루나 왕국의 상황은 참담했다.
이사벨의 대리인이자 루나의 대사제인 세바스찬이, 케이든으로부터 보고받은 상황을 전해 주었다.
“드미트리가 루나 왕국을 도와주기 위해, 로만 드미트리를 포함해 30명의 인원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겨우 30명입니까?”
“그래. 하지만 드미트리도 위험을 감수한 선택이다. 드미트리는 연달아 전쟁을 치렀고, 최근에는 발할라 제국에서 내란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우리가 일부 조건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직접 움직이는 것으로 결정했다. 드미트리가 도착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2주 뒤. 그때까지는 최대한 수성에 집중한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케이든이 떠나던 날.
루나 왕국의 사람들은 간절하게 기도했다.
신이 루나를 버리지 않았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영웅처럼 나타나 루나 왕국을 구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30명이라니.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바스찬은 로만 드미트리가 직접 움직인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강조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최근.
곳곳에서 참담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락사르를 필두로 수만의 오크들이 아르카디아의 이종족들을 학살했고, 식량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흔적은 루나 왕국을 공포에 빠트렸다.
단순히 죽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크들에게 패배했다간 가축처럼 길러질 수도 있는 상황에, 루나 왕국은 케이든이 좋은 소식을 전해 주길 바랐다.
기대감이 컸기에.
절망감도 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루나 왕국의 사람들은, 아무런 교류가 없었던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을 바라는 것만으로도 과한 욕심임을 알았다.
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드미트리가 위험을 부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해하나, 30명의 인원은 절망적인 마음을 달래 주지 못했다.
그때였다.
“대사제님. 30명의 인원으로는 수만의 오크를 상대로 대세를 바꿀 수 없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를 믿고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루나 왕국으로서는 결단을 내려 대응해야만 합니다.”
설원의 검사.
자이로였다.
자이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수뇌부들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사벨 여왕님의 말대로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대단한 검사일 겁니다.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로만 드미트리만 믿고 루나 왕국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루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입니다. 비록 화합의 땅에서 루나가 전쟁을 치를 일은 많지 않았지만, 아르카디아에서 유일한 인간들의 나라로서 저희는 항상 루나의 영토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자이로. 이건 현실적인 문제다. 수만의 오크들을, 루나만의 힘으로 이길 방법은 없다.”
세바스찬이 걱정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루나 왕국.
사실, 샐러맨더 대륙을 기준으로는 상당히 작은 나라였다.
매서운 추위에 출산율이 높지 않았고, 카이로 왕국과 비교해도 인구수가 많지 않은 나라가 바로 루나였다.
게다가 루나의 역사에서 전쟁은 흔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태생부터 전사의 핏줄을 타고난 오크들을 이길 확률은 희박했다.
하지만.
자이로의 생각은 달랐다.
“인정합니다. 루나의 전력으로는 절대 그락사르의 오크 부대를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루나만의 힘으로 전쟁을 끝내자는 말이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2주 뒤에 도착합니다. 그때까지 멍하니 지켜보면서 루나의 저장고를 하나씩 빼앗기는 것보다는, 로만 드미트리가 도착했을 때 적을 섬멸할 완벽한 판을 만들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루나의 힘으로 상황을 주도한다면, 우리는 악의 무리를 무찌를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루나의 힘으로 오크들을 무찌릅시다!”
사람들이 동조했다.
자이로가 보여 주는 강렬한 열망에, 그들은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성벽 너머로.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분노는 이미 한계치에 도달했고, 로만 드미트리를 믿을 수 없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후우.”
세바스찬이 숨을 크게 내뱉었다.
대사제의 이름으로도 들끓는 분위기를 진정시킬 수 없다면, 가장 최선의 상황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래. 어떤 방법으로 오크들을 상대할 생각이지?”
* * *
촤르르륵.
지도를 펼쳤다.
자이로는 오크들에게 함락당한 일곱 번째 저장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현재 그락사르의 오크들은 이곳에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패턴을 보았을 때, 그들은 앞으로 며칠 안으로는 다음 목표를 향해 떠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섯 번째 저장고겠지.”
저장고.
이사벨의 축복을 받은 땅을 의미했다.
이사벨은 일부의 땅을 추위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했고, 루나 왕국의 사람들은 저장고라고 일컫는 땅에 농작물을 심었다.
그렇게 루나 왕국이 보유한 저장고는 총 여덟 개가 있었다.
그락사르의 오크들은 그중 두 개를 함락시켰고, 이제는 다른 저장고들을 노릴 확률이 높았다.
자이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락사르는 매우 호전적인 존재이기에, 본인이 움직이는 동선에 따라 걸리는 존재들을 먼저 공격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락사르가 바라는 것은 오크를 제외한 모든 이종족의 식량화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설인(雪人)의 영토에 발을 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인.
이종족 중 하나였다.
3m가 넘어가는 거대한 키에 털로 뒤덮인 외모, 그리고 강력한 괴력은 오크를 포함해 전투적인 측면에서 매우 뛰어난 종족이었다.
대신 그들의 개체 수는 상당히 적었다.
기껏해야 수백의 설인들로는, 오크들의 공격을 받는 순간 이렇다 할 반항도 못 하고 전멸할 것이다.
자이로가 한 곳을 가리켰다.
설인의 영역으로 향하는 길목에, 양쪽 절벽으로 인해 제한적인 공간이 있었다.
“바로 이곳. 오크들은 이곳을 지나칠 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먼저 공격을 감행한 경우는 없기에, 그락사르는 안일하게 병력을 움직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설인들에게 미리 연락해서 이곳에 매복한다면, 분명히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습니다. 협소한 공간을 설인들이 막고. 우리가 위에서 때를 기다렸다가 눈사태를 일으킨다면, 오크들로서는 눈사태를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오크들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의미 없이 2주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분명히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로는 설원의 검사다.
눈 위에서 싸우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의 말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한 끝에, 세바스찬은 대세를 따랐다.
“……알겠다. 단, 명심하거라. 만약에 작전이 실패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이번 작전으로 상당수의 병력을 잃는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자이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나서는 사내들.
세바스찬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이사벨의 존재가 너무나도 그리워지는 그였다.
* * *
계획대로였다.
절벽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자이로는, 멀리서 오크들이 진군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락사르. 이곳이 네 무덤이 될 것이다.’
몇 년 전.
자이로는 그락사르를 만난 경험이 있었다.
각 종족을 대표해서 싸우는 자리였는데, 그날 서로 무기를 섞은 자이로는 그락사르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가졌다.
평화스러운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무를 추구하는 존재들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락사르를 좋게 평가했으나, 이번 전쟁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역겨웠다.
그락사르는 이종족들과 웃고 떠들면서, 그들을 언제든 ‘식량’으로 삼을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단순히 피해를 입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눈사태를 일으켜 오크들을 혼란에 빠트린 다음, 가능하다면 직접 그락사르를 처리해 버릴 생각이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반전의 불씨를 살릴 수 있다.
현재 오크들은, 그락사르라는 구심점이 없다면 그리 강력한 존재가 아니었다.
마침내.
오크들이 도착했다.
그들이 절벽 안의 길목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설인들이 몸을 일으켰다.
“크아아아아악!”
“취익, 적이다!”
“취익, 설인들이 나타났다.”
콰직.
설인이 거대한 손을 휘둘렀다.
가장 먼저 이동하던 오크의 몸을 단번에 터트리더니, 설인이 살의로 들끓는 포효를 터트렸다.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전신이 무기인 설인은 팔을 휘두르며 오크의 육체를 찢어발겼고, 오크들은 일제히 달려들면서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날아올라 설인의 몸에 무기를 꽂았다.
퍽.
피가 튀었다.
설인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빨갛게 충혈된 눈은 상처보다는 몸에 매달린 오크를 먼저 노렸다.
콰직.
잔인한 광경이었다.
순식간에 수북하게 쌓인 눈이 피로 물드는 광경에, 하얀 옷으로 위장한 자이로는 침착하게 때를 기다렸다.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설인들은 눈사태가 일어나도 종족 특유의 능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지만, 오크들은 그대로 파묻혀 눈 속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러니 충분히 뜸을 들여야만 했다.
적들이 더 깊숙이 들어오도록, 많은 숫자가 눈사태에 휩쓸릴 수 있도록.
그런데.
상황을 살피는 자이로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뭔가 이상했다.
적들의 선두에는 항상 그락사르가 있었는데, 아무리 살펴도 그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불길한 상상이 일었다.
그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끔찍한 비명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크악.”
“악!”
“저,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락사르를 필두로, 수많은 오크들이 절벽으로 올라오는 길목을 통해 나타났다.
“취익, 예상대로 잔머리를 굴리는구나.”
그제야 알았다.
함정에 빠진 것은.
그락사르가 아닌, 자이로 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