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9화 (329/615)

329화 아르카디아의 붕괴 (4)

전투가 벌어졌다.

오크들과 혼란스럽게 뒤얽히는 상황에, 자이로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라면 모두 전멸이다.’

뒤로는 절벽.

유일한 길목은 그락사르가 막고 있었다.

개개인의 무력과 머릿수 모두 오크들이 압도하는 상황이기에,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문득 세바스찬의 당부가 떠올랐다. 만약 작전에 실패한다면.

어떻게든 병력을 살려 보내야, 로만 드미트리가 루나 왕국에 도착했을 때 반전의 불씨를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뒤늦은 후회가 일었다.

수성이 최선인 것을 알면서도, 성벽 밖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의 비명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저장고는 신성한 땅이다.

이사벨의 축복을 받은 땅과 식량을 내줄 수 없다면서, 그곳을 지키겠다고 남은 사람들이 뼛조각만 남긴 채로 바닥을 뒹굴었다.

그때의 참담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뼛조각에 달라붙은 살점을 내려다보았을 때, 자이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락사르는 생각보다 영악했고, 의도적으로 설인의 영토를 노리며 자이로의 함정을 유도했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오라를 일으켰다.

검을 강하게 움켜쥐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가 길을 열겠다! 명령을 내리면, 그때는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다른 방법은 없었다.

길을 열어야만 했다.

자이로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수북이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박힐 법도 한데, 마나를 퍼트린 발은 눈 위를 얕게 밟으며 그대로 추진력을 얻었다.

놀라운 마나 컨트롤이었다.

눈이 쌓인 공간에서는 움직이는 행위 하나하나에 섬세함이 필요했고, 자이로의 경험은 펑펑 내리는 눈 속에서 빛을 발했다.

파팟.

콰르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했다.

오크들이 사나운 이빨을 보이며 달려들자, 하얗게 일어나는 오라가 그들의 육체를 베어 버렸다.

번뜩.

“크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이로는 가장 먼저 달려드는 오크의 가슴팍을 베어 버리더니, 더는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곧바로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는 빠르게 스텝을 밟았다.

동료들의 복수를 하겠다는 듯이 달려드는 오크들의 모습에, 눈 위를 사뿐사뿐하게 밟으며 그들의 허점을 순간적으로 파고들었다.

서걱.

퍽.

팔을 베고, 심장을 부숴 버렸다.

극한의 추위에 오라가 얼어붙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적절한 온기로 오히려 오라의 날카로움을 증폭시켰다.

살짝 얼어붙은 오라의 칼날. 그것에 닿는 절단면은 빠르게 얼어 버렸다.

“와라, 이 돼지 새끼들아.”

콰릉.

콰르르르르릉.

자이로.

루나 왕국을 대표하는 5성의 오라 검사.

그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눈이 내리는 환경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적들을 도륙하며 눈 위를 피로 물들였다.

설원의 검사라는 명성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하얀 오라를 흩뿌리며 날뛰는 모습에, 루나의 병사들은 힘을 냈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자이로를 믿고 따른다면, 분명히 살아 나갈 기회는 있었다.

그때였다.

그락사르의 모습이 보였다.

자이로는 전력을 폭발시키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지금이다! 도망쳐라!”

시간을 끌 요량이었다.

자신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많은 병사를 살려 보내는 것이 자이로의 최우선 목적이었다.

콰르르르르르릉.

달려들었다.

길목을 버티고 있는 그락사르의 모습에, 이를 악물며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로부터 피어오르는 오라가 빛을 일으켰다.

그것은 바닥에 쌓인 눈에 반사되어 그락사르의 시야를 방해했다.

설원의 검사라고 불리게 한 기술 중 하나였으며, 변칙적인 기술은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취익, 같잖은 수작을 부리는구나.”

순간.

자이로는 보았다.

빛을 정면으로 맞은 상태에서, 사나운 눈빛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락사르의 눈빛을.

그리고 그 위로.

오라가 들끓는 도끼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로부터 폭발하는 오라는, 자이로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6성의 오라가 분명했다.

‘……설마.’

확실했다.

몇 년 전.

그락사르는 자이로와의 대결에서 힘을 숨겼다.

벼락이 떨어지듯 내리꽂히는 도끼에, 자이로는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콰앙!

콰콰콰콰쾅!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자이로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 * *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걸까.

눈을 떴을 때, 자이로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컴컴한 동굴이었다.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천장에 뚫린 조그마한 틈으로 달빛이 들어와, 내부 상황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흑, 흑흑.”

“우린 전부 끝났어.”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일곱, 여덟 번째 저장고의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루나 왕국이 구해 주리라고 믿었던 그들은, 처참한 몰골로 끌려온 자이로의 모습에 절망에 빠졌다.

자이로는 루나 왕국을 대표하는 검사다.

그가 오크들의 손에 끌려왔다는 것은, 단순히 한 인간의 패배가 아니라 루나 왕국이 오크들에게 완전히 패배했다는 뜻이었다.

절망이 전염되었다.

사람들이 숨이 넘어갈 듯 울며, 애써 가혹한 현실을 외면했다.

그때였다.

끼익.

감옥의 문이 열렸다.

오크들이었다.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고, 자이로는 오크들을 공격하고 싶었으나 다리를 다친 모양인지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오크들은 묘한 얼굴로 인간들을 살폈다.

그중 하나는 그락사르를 따르는 간부 오크였는데, 자이로가 기억하기로는 ‘칼로트’라는 이름의 오크가 분명했다.

칼로트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한 사내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콱.

“으악!”

“취익, 이번에는 이 녀석이 좋겠어.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게, 다른 녀석들보다는 먹을 맛이 나겠지.”

사내가 발악했다.

머리를 움켜쥔 손을 잡아 뜯으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지만, 칼로트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사내를 질질 끌고 갔다.

사내의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가 자이로와 시선을 마주치자, 간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자이로 님!”

그제야 알았다.

칼로트는.

사내를 식량으로 쓰고자 했다.

자이로는 순간 치밀어오르는 화에, 땅바닥을 기어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런 개새끼들아!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 그 사람은 놔주고, 나를 잡아먹으란 말이다!”

악에 받쳤다.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강했더라면.

이 사람들을 구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모한 판단은 사람들을 나락에 빠트렸고, 자신마저도 인간 식량으로 전락하는 꼴이 되었다.

자이로는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심장을 태워 버릴 것만 같은 죄책감에, 차라리 눈앞에서 사람들이 식량으로 끌려가는 것보다는 자신이 대신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칼로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자이로를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취익, 우리가 왜 네 녀석을 죽이지 않은 줄 알아? 고기의 싱싱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죽이고 나서 저장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살려 두는 게 낫거든. 취익, 그러니까 먼저 죽겠다고 발악하지 마. 언젠가는 네 녀석이 살아 있는 채로, 살점을 하나하나 발라 버리는 날이 찾아올 테니까.”

그러고는.

끼익.

쿵.

철창을 닫았다.

점점 멀어지는 비명에, 자이로는 고개를 떨구었다.

끝났다.

자신의 멍청한 실수로 인해, 루나 왕국은 반전의 불씨마저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빠르게 텔레포트 포인트를 이동하던 케이든은, 루나 왕국으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케이든. 지금 이곳의 상황이 좋지 않다.

자이로가 병력을 이끌고 기습 작전을 시도하던 도중, 적들의 함정에 빠져 병력을 모두 잃어버렸다.

현재 자이로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락사르의 오크들은 곧바로 ‘루나의 요새’로 진격하고 있으며, 이대로라면 네가 도착하기도 전에 공격을 받을 것이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케이든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체 왜! 내가 분명히 싸우지 말라고 했잖아!”

화가 났다.

겨우 2주다.

조금만 기다리면 병력을 이끌고 도착할 텐데, 자이로는 그 기간을 참지 못하고 실수를 저질렀다.

이해는 했다.

30명의 숫자는 그에게 확신을 부여하지 못했을 테고, 설인과의 연계는 상황을 반전시킬 몇 안 되는 기회였다.

하지만 세상은 결과가 중요하다.

자이로는 그날부로 생사가 묘연하고, 병력 대부분이 죽거나 포로로 붙잡혔다는 사실에 케이든은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물은 엎질러졌다.

지금은,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필요했다.

‘루나의 통신은 며칠 전에 보낸 것일 테니, 한시라도 빨리 루나 왕국으로 가야만 한다.’

머나먼 거리.

루나 특유의 환경.

그로 인해 통신은 정상적이지 못했다.

만약 ‘워프 게이트’와 같은 좌표 설정을 연결하면 두 대륙 간의 연결이 원활하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한 상태였다.

실시간으로 루나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케이든은 일단 간절한 목소리로 통신을 남겼다.

“어떻게든 버티세요. 최대한 빠르게 가겠습니다.”

툭.

통신을 남겼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갔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 * *

원래 예정은 1주였다.

텔레포트 포인트의 간격을 고려한 시간 계산이었는데,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으로 케이든은 겨우 5일 만에 아르카디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매서운 추위가 케이든을 덮쳤다.

시야를 방해하는 눈보라에 뼛속 깊이 파고드는 추위는, 이곳부터가 아르카디아의 세상임을 말해 주었다.

케이든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이곳에서 딱 하루만, 루나의 방식을 훈련하고 이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의외의 부탁이었다.

이유를 묻자,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대로 루나 왕국은 지금 매우 위급한 상황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루나 왕국의 요새에 도착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문제는 아르카디아의 환경이 전투 시에 분명히 엄청난 어려움을 선사하리라는 것입니다. 수북이 쌓인 눈은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을 묶을 테고, 오라를 아무런 생각 없이 일으켰다간 얼어붙는 상황에 오라가 부서질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우리가 상대할 존재는 그동안 아르카디아의 추위 속에서 살아남은 오크들입니다.”

속이 탔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이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루나를 살리겠다고, 극한의 추위에 적응하지 못한 드미트리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설득했다.

원래의 계획은 시간만 넉넉했다면 추위로 겁을 주고, 한 3~4일 정도는 루나에서 가르치는 기술들을 터득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만한 시간이 없었다.

하루라도 속성으로 가르치고 길을 떠난다면, 오크들과 맞닥트렸을 때 최소한 눈 속에서 당황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케이든. 전에도 말했을 텐데. 아르카디아의 추위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걸음을 서둘러라. 루나의 요새가 함락당한다면, 그때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명심하라. 우리는 도움을 줄 뿐, 선택은 내가 한다.”

케이든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왜.

드미트리의 안위를 걱정하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단 말인가.

오기가 생겼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직 아르카디아의 무서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현실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여기에서 루나의 요새까지는 하루 정도가 걸립니다. 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저는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이동할 생각입니다. 만약 힘드시다면, 언제든 제 이름을 부르십시오.”

백색의 날다람쥐.

그 별명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적어도 눈 위에서만큼은, 케이든의 속도를 따라잡는 존재는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케이든은 전령(傳令)으로 선택받았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기에, 그는 끝없는 산맥을 넘어서 로만 드미트리를 만났다.

‘눈 위에서 달리다 보면 현실을 알게 되겠지. 수북이 쌓인 눈을 달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뒤늦게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그때라도 루나의 방식을 가르치고 이동하면 될 거야.’

생존의 문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드미트리를, 이대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케이든이 앞서 걸었다.

“잘 따라오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휘잉.

강하게 부는 눈보라.

이윽고.

케이든을 비롯한 드미트리의 병력이, 눈보라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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