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아르카디아의 붕괴 (5)
한때.
루나 왕국의 사람들은 한 가지 주제에 의문을 표했다.
설원의 검사 자이로와 백색의 날다람쥐 케이든 중, 눈밭 위에서 누가 더 빠른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다.
대부분은 케이든의 손을 들었다.
하지만 자이로도 눈밭에서만큼은 대단한 존재감을 보였기에, 어쩌면 자이로가 승리할지도 모른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둘은 대결을 펼쳤다.
10km를 달리는 경주였는데, 결과를 확인한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자이로가 절반을 막 지나쳤을 즈음에, 케이든이 압도적인 스피드로 결승선에 도달한 것이다.
그때부터 백색의 날다람쥐라는 명성은 더욱 공고해졌다.
적어도 눈이 펑펑 내리는 아르카디아에서만큼은, 모든 종족을 통틀어 케이든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존재는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케이든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히 자신은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데,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단 한 명도 뒤처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말이 되지 않았다.
눈으로 쌓인 땅은 발이 푹푹 꺼지기 마련이고, 건장한 사내일수록 이동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루나 왕국은 대대로 ‘눈 위를 이동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다.
어떤 방식으로 눈을 밟아야 덜 빠지는지.
특히 오라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표면만 살짝 밟아서 폭발적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건 하루 이틀의 가르침으로 터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예민한 컨트롤은 그만큼 고된 훈련을 동반해야 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와 병사들은 곧잘 따라붙었다.
슬쩍 바닥을 확인했는데,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정말 미세한 족적(足跡)만이 남았다.
‘눈 위를 어떻게 이동해야 하는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저 정도의 흔적으로 눈 위를 이동할 수는 없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르카디아의 방식을 드미트리에 알려 준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마 로만 드미트리의 말처럼, 드미트리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건가.’
믿기지 않았다.
케이든이 사용하는 방식은, 루나의 유구한 역사가 만들어 낸 산물이었다.
드미트리와 같은 사계절이 존재하는 땅에서, 루나에 버금가는 기술이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로만 드미트리를 비롯한 병사들은 강추위와 시야를 방해하는 눈보라에도 그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추위에 적응하기 위한 아무런 훈련도 진행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빠르게 움직이기는커녕, 춥다면서 동굴에라도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진실을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다.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
그는 족적조차도 남지 않았다.
눈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보다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을 제쳐 가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자신이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빨리 달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터. 현실을 외면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 지금부터는 빠르게 루나 요새에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이대로라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루나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한참을 달렸다.
목적지를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케이든은 마법 통신기로부터 연락이 도착했다는 신호를 받았다.
삑.
[케이든. 적들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생사를 건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세바스찬이 보낸 메시지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적들이 우리의 마법 통신을 방해하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우리의 의도를 간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끌면 변수가 생기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다. 그락사르를 필두로 수만의 오크들이 모두 이곳에 도착했다. 어쩌면, 네가 도착하기도 전에 루나는 함락당할지도 모른다.]
손이 떨렸다.
마법 통신을 방해했다니.
이제야 의문스럽던 상황이 이해되었다.
아르카디아에 도착한 순간부터는 마법 통신이 원활해야 하는데, 지난 연락의 답신이 도착하지 않았었다.
그락사르는 루나의 의도를 알아챘다.
시간을 끌었다간 로만 드미트리라는 지원군이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는 처음 계획과는 달리 모든 저장고를 지나치고 루나의 요새로 향했다.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루나는 약했다.
수만의 오크를 상대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연락.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케이든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미안하다. 이곳을 포기하고, 너라도 살아남아라.]
확실했다.
루나는 이미, 적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 * *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오크.
인간들이 기르는 가축인 돼지의 얼굴은 한 그들은, 야만적이고 멍청한 족속일 것이라고 말이다.
자이로의 안일한 계획은 그런 편견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오크들은 뒤를 생각하지 않는 과감함을 보였지만, 그들의 수장인 그락사르는 겉으로 비추어지는 것보다 신중했다.
자이로를 처리하고.
그는 곧바로 포로들을 심문했다.
산 채로 뜯어먹히는 상황에, 정신이 나간 병사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로,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가 저희를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드미트리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겨우 30명의 지원군을 보내 준다는 사실에, 자이로 기사님이 루나만의 힘으로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함정을 팠던 겁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살려 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고통 없이, 한 번에만 보내 주십시오.”
그락사르가 상황을 파악했다.
로만 드미트리.
생소한 이름이었다.
루나 왕국은 그래도 이사벨을 통해 샐러맨더 대륙의 정보를 전해 들었지만, 그락사르는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있었다. 병사들이 말하는 뉘앙스에서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기대감을 느꼈다.
그는 분명히 일반적이지 않은 존재일 테고, 겨우 30명의 인원이라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변수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취익, 칼로트. 곧바로 루나 요새로 향한다.”
“취익, 알겠습니다.”
전략을 바꾸었다.
적들이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다면.
애초에 루나 요새에 있는 본대(本隊)를 쓸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본대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전쟁을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디테일을 더했다.
주술사를 동원해, 마법 통신을 방해했다.
마침내 루나의 성벽이 보였다.
그락사르는 지체하지 않고,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취익, 나를 따르라.”
“크악!”
“크르르르륵.”
생각보다 이른 시기였다.
그락사르와 오크들이 달려드는 모습에, 루나의 성벽 위에 공포에 질린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빠르게 자리를 찾으며 화살을 발사했다.
성벽에 걸리는 사다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올라오는 것을 막았고, 어떤 병사는 기름을 뿌린 뒤에 횃불을 던졌다.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아무리 눈이 펑펑 내리고 눈이 쌓여도, 기름에 붙은 불은 오크들의 몸을 불태워 버렸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그락사르가 오라를 일으켰다.
빨간 오라가 일어나며 성문을 공격했지만, 일곱 번째 저장고를 공격할 때와는 결과가 달랐다.
콰앙!
부서지지 않았다.
아무리 힘껏 내리쳐도, 성문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블레스(bless).”
성벽 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대사제 세바스찬의 모습이 보였다.
루나 왕국은 전체적으로 국력이 약하고, 병사들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은 나라다.
하지만 이사벨이 존재했을 때 그들이 강력했던 이유는 바로 신의 축복 때문이었다.
세바스찬은 성문에 축복을 불어넣어 강철보다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한 기운이 병사들 전체로 퍼져 나갔다.
“죽어!”
“신이시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병사들이 힘을 냈다.
성벽으로 올라서는 오크들의 급소에 무기를 찔러 넣으며, 그들은 이전보다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루나.
신성 왕국의 저력이었다.
그들이 아르카디아에서 유일한 인간들의 나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이었고, 이사벨의 축복을 발현했을 때는 일반 병사들조차도 엄청난 괴력을 보였다.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세바스찬의 신성력도 강력했다. 축복이 병사들을 감쌌다.
아무리 싸워도 체력이 떨어지지 않았고, 오크들의 공격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들은 신을 외치면서 적과 함께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치열했다.
수만의 오크가 밀고 들어가는데도, 수천의 병사가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자이로라도 있었다면.
아니, 왕실 기사단장 레오가 이사벨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조금은 더 버텼을지도 모른다.
그락사르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성벽 위에 올라서자마자 달려드는 병사들을 단번에 베어 버렸고, 십수 명의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모습에 병사들이 겁에 질린 표정을 보였다.
축복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락사르가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살기는, 루나의 병사들에게 참담한 현실을 직시시켰다.
“취익, 루나의 역사는 오늘부로 끝이다.”
그락사르가 학살을 벌였다.
그리고는.
콰앙!
성문을 지탱하던 사슬을 잘라 버렸다.
쇠사슬이 풀리며 내려앉는 성문 위로, 까맣게 득실거리는 오크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끝났다.
대사제 세바스찬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이시여.”
그것은.
케이든이 아르카디아에 도착하기 직전인, 불과 하루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타닥, 타닥.
루나의 요새가 불타올랐다.
폐허가 된 땅에는, 사람들의 비명만이 울려 퍼졌다.
“까약!”
“사, 살려 주십시오. 한 번만 살려…… 크악!”
퍽.
머리에 몽둥이가 작렬했다.
오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빌던 사내는, 눈동자가 풀리더니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졌다.
피가 흘렀다.
오크, 칼로트는 표정을 찌푸렸다.
“취익, 성가신 새끼들. 우리는 산 채로 너희를 보관할 생각이다. 그러니까, 죽음을 자초하지 마라.”
전쟁 도중에 죽은 사람들.
그들의 시체는 이미 식량으로 확보한 상태였다.
얼음 창고에 비축한 시체들은 오랫동안 식량의 역할을 해내겠지만, 그락사르는 되도록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많이 확보하기를 바랐다.
인간들에 대한 자비가 아니었다.
전쟁의 끝은 결국 이종족들의 몰살로 끝날 수밖에 없기에, 인간을 가축처럼 키워서 미래를 대비할 생각이었다.
루나의 요새.
새로운 저장 창고였다.
그락사르는 다른 종족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고, 칼로트를 비롯한 무려 일만의 오크들은 루나의 요새를 맡아 상황을 정리했다.
시체들을 얼음 창고로 옮기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축사(畜舍)로 지정한 곳에 내던졌다.
그리고 나중에 드미트리의 지원군이 찾아올지도 모르니, 성문을 보수하고서는 마치 ‘루나’가 건재한 것처럼 외관을 그럴듯하게 꾸몄다.
함정이었다.
가족을 인질로 잡힌 병사가 연기를 한다면, 멍청한 인간들은 속아 넘어갈 확률이 높았다.
“……루나는 끝났어.”
포로 중 한 명.
스미스라는 이름의 사내가 절망적인 얼굴로 말했다.
오크들을 토벌하겠다던 자이로는 자신들과 똑같은 가축의 신세가 되었고, 세바스찬은 격렬한 반항 끝에 그락사르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주요 인물들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여왕 이사벨과 왕실 기사단장 레오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기에, 루나 왕국에 희망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케이든이 로만 드미트리를 설득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늦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포함해 겨우 30명의 인원으로, 그락사르를 처리하기는커녕 칼로트가 버티고 있는 루나의 요새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은 무려 일만의 오크들이 지키고 있지 않은가.
스미스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넋을 잃은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그때였다.
“취익, 칼로트 님! 인간들이 나타났습니다!”
“취익, 로만 드미트리. 그 녀석이구나!”
성벽 위.
망을 보던 오크가 상황을 보고했다.
칼로트는 비릿한 웃음을 보이며, 미리 지정했던 병사의 뒷덜미를 잡아 앞으로 끌고 갔다.
“취익, 인간. 너는 지금부터 연기를 할 것이다. 마치 이곳이 아직 적들에게 함락당하지 않은 것처럼, 최대한 성벽 가까이 다가오게 만들어라. 그렇게만 한다면. 취익, 너와 너희 가족들은 살려 주마.”
“아, 알겠습니다.”
칼로트가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마법 방해를 뚫고, 이곳의 상황이 마법 통신을 통해 전달되었을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었다.
멍청하게 다가온다면 그대로 성벽 위에서 공격해 쓸어 버릴 것이고, 그게 아닐지라도 30명의 인원으로 1만의 병력이 지키는 루나의 요새를 뚫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들뜬 마음이 들었다.
샐러맨더 대륙의 인간은 어떤 맛일지, 칼로트는 성벽으로 향하며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부터는.
승자의 권리를 즐길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