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1화 (331/615)

331화 30명의 지원군 (1)

통신을 확인한 직후.

케이든은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그는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며 진실을 말했다.

“……루나의 요새가 무너졌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사실상 전쟁은 끝났다.

처음부터 수적으로 열세였던 전쟁이었고, 그렇기에 루나의 요새만큼은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그런데 루나의 요새가 무너지고 말았다.

세바스찬과 자이로의 생사는 확인할 수 없었고, 루나의 병사들은 식량으로 전락해 버렸을 것이다.

요새를 버리고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루나의 요새에는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기에,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곳을 지킬 것이다.

“더는 남아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루나의 요새가 무너졌다는 것은, 상황을 반전시킬 조금의 병력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르카디아까지 먼 걸음을 해 주신 것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보답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루나 왕국의 미래는 이미 끝났습니다.”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만일의 가능성을 위해, 끝까지 싸워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신을 모시는 독실한 신자(信者)로서, 그는 선의를 베풀어 준 드미트리가 무의미하게 희생하지 않길 바랐다.

어떻게든 루나의 기술을 가르치려는 것도.

지금 이러한 선택도.

이기적이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루나의 요새 안에는 몇만의 오크들이 버티고 있을 텐데, 30명의 병력을 데리고 그곳을 무너트리고 루나의 사람들을 되찾아 달라는 것은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다.

그것은 선의를 배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조건부라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루나의 안위를 챙겨 주었는데, 케이든은 뻔히 보이는 미래에 드미트리까지 지옥으로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이대로 헤어지면.

케이든은 홀로 루나로 향할 생각이었다.

아마 죽을 것이다.

오크들에게 붙잡히면 산 채로 살점이 발라지는 끔찍한 신세로 전락하겠지만, 루나의 기사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할 것이다.

참으로 인생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다.

어릴 적에 자신이 검을 수련할 때만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필요하지도 않은 일에 왜 그렇게 노력하냐는 말을 했었다.

아르카디아는.

평화로운 세상이다.

전쟁이 없기에 무기도 필요하지 않았고, 요새(要塞)의 건설은 무의미한 행위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렇게 루나의 미래는 끝났다.

아르카디아는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

단 한 번의 배반은, 단 한 번의 전쟁은 불신을 낳아 버렸다.

그때였다.

“내가 말했었지. 선택은 내가 한다고.”

순간.

당황한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이사벨이 협력을 제안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거절했었고, 루나를 구해 달라고 고개를 조아렸을 때도 로만 드미트리는 철저하게 선을 그었다.

그것이 케이든이 기억하는 모습이었다.

승산이 없는 전쟁이라면, 그 진실을 알았을 때 망설임 없이 물러날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였다.

그런데.

“드미트리와 루나가 계약을 체결한 그 순간부터, 루나는 드미트리의 속국(屬國)이 되었다. 케이든. 루나의 명운은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약해 빠진 소리는 집어치우고, 지금부터 루나의 요새에 대해 아는 모든 정보를 말하라.”

로만 드미트리는.

루나를 버리지 않았다.

* * *

심장이 요동쳤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자신은 분명히 루나의 요새가 무너졌다고 말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문제는.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말하면 옆에서 말리는 것이 정상인데, 그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담담히 받아들였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지원군으로 30명을 보내겠다고 말할 때부터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드미트리는 자신이 예상한 범위를 훌쩍 넘어섰다.

더는 진심을 숨길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루나 왕국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케이든이 말했다.

“루나의 요새는 사실 요새라고 부를 뿐이지, 수성에 그리 적합한 형태는 아닙니다. 성벽 자체도 낮은 편이고 내부도 그리 넓지 않아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루나는 인구수가 많은 나라가 아닙니다. 보통은 요새 인근에 있는 마을에서 주민들이 생활하고, 식량과 같은 주요 물품들은 요새 안에서 관리합니다. 만약 그락사르의 오크들이 루나의 요새를 함락시켰다면. 그들 전부가 요새에서 생활하지는 못할 겁니다.”

“근거는?”

“그락사르는 다른 종족들의 식량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덟 번째 저장고를 공격했을 때도 제압을 위해서는 살상을 서슴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는 사람들을 포로로 붙잡고 최소한의 식량만 먹이면서 남겨 두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다른 종족들을 가축으로 기르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루나의 요새 안에는 단순히 수만의 오크들뿐만 아니라, 포로로 붙잡힌 루나의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 많은 인원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부 오크들은 밖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로.

가설은 두 가지였다.

“오크들의 선택지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루나의 요새 내외부에 병력을 포진시키고 전열을 정비하거나, 아니면 일부 병력을 남기고 다른 종족을 공격하려고 떠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락사르는 매우 호전적인 존재입니다. 전쟁을 시작한 이상, 아르카디아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쉴 새 없이 움직일 것입니다. 실제로 전쟁을 선포한 초반부터 지금까지. 그락사르는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며 주변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말을 할수록.

머리가 맑아졌다.

로만 드미트리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샐러맨더 대륙과는 다르게 정보가 많지 않기에, 충분한 정보를 위해서 케이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일까.

케이든도 어느새, 이 말도 안 되는 전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전자일 경우에는 사실상 루나의 요새를 탈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후자일 경우에는, 딱 하나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얼음 창고로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얼음 창고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동굴을 의미하는데, 루나 왕국은 그곳에 얼음을 쌓아 두고 식량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 동굴의 비밀 통로가 밖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곳을 활용한다면, 성벽을 무너트리지 않고도 루나의 요새 안으로 몰래 진입할 수 있습니다.”

아는 바를 모두 말했다.

선택은 로만 드미트리의 몫이었다.

사실.

비밀 통로를 언급하기는 했어도, 수만의 병력이 득실거리고 있을 루나의 요새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묵묵히 따르고 싶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병사들처럼, 그가 하려는 일을 지지했다.

이윽고.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겠다.”

* * *

휘잉.

바람이 불었다.

시야를 방해하는 눈보라를 뚫고, 세 명의 사내가 루나의 요새를 향해 걸어갔다.

성벽 위.

칼로트에게 목덜미를 붙잡혔던 병사는, 점점 다가오는 사내들의 모습에 공포를 참으며 소리쳤다.

“멈춰라! 이곳은 루나의 영역이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성벽 뒤로.

칼로트와 오크들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 병사의 가족을 죽일 수 있도록 무기를 겨누었고, 공포로 물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자 차마 칼로트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의 지원군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루나 왕국을 구해 주기 위해서 온 것이지만, 이미 루나의 미래는 끝났다.

탁.

걸음을 멈추었다.

사내들이 성벽 위를 올려다보자, 병사가 말했다.

“신분을 밝혀라.”

“나는 드미트리 왕국의 로만 드미트리다. 루나의 요청에 따라, 루나를 도와주기 위해 왔다.”

나머지 두 명.

크리스와 케빈이었다.

병사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살피더니,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보였다.

“드미트리의 지원군은 30명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왜 너희는 세 명밖에 없지? 그리고 드미트리에 갔던 케이든 기사님은 어디에 있고?”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같잖은 연기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어색한 말투는, 굳이 진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돌아가는 상황이 훤히 보였다.

“지금부터 루나의 사람들은 들어라!”

순간.

목소리를 높였다.

병사가 당황한 표정을 보이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본래의 목적을 이어 갔다.

“루나는 드미트리의 속국이 되었다. 너희는 드미트리에 귀속되었으며, 현 시간부로 나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을 따른다. 너희가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병사도.

칼로트도.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생각했던 시나리오에서, 이와 같은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투쟁한다면. 내가 너희를 구할 것이다.”

그때였다.

성벽 위에서.

오크들이 고개를 들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일까.

“취익, 공격하라!”

칼로트가 바락 소리를 지르자, 오크들은 미리 준비했던 화살을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발사했다.

그 순간.

‘천마검법 전반부 일초식.’

번뜩.

일격.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성문을 베어 버렸다.

* * *

비밀 통로.

신호를 기다리던 케이든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옆에 있는 맥버니라는 이름의 동료에게 물었다.

“……이 작전이 성공하리라고 보십니까?”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

충격적이었다.

적들의 동태를 파악해서 후자일 경우에, 로만 드미트리를 포함한 소수의 인원이 성문에서 시선을 끌겠다고 말했다.

그 사이에 나머지 병력은 비밀 통로로 침투. 최우선 목적은 포로들의 해방이었다.

포로들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락사르.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

포로들을 확보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들이 다시 자유를 되찾는다면 루나 왕국은 그만큼 전력을 회복할 수 있다.

그것이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는 그림이었다.

내부에서 포로들과 같이 병력을 일으킨다면, 겨우 30명이었던 병력이 순식간에 수백 배로 불어날 수 있다.

그리고 정면 대결.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미션이었다.

겨우 세 명으로 시선을 끄는 것도 말도 안 되거니와, 비밀 통로로 침투한다고 한들 내부 경비들을 제압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적으로 포로들을 풀어 준다고 할지라도.

무기와 체력 상태가 여의치 않은 그들을 데리고, 만 명이 넘어가는 오크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래서 물었다.

작전의 성공을 묻는 물음에, 맥버니는 덤덤하게 반응했다.

“예, 물론입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맥버니.

남부 전선을 시작으로 수많은 전쟁을 경험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믿고 따르며, 맥버니는 이번 작전보다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수차례 승리로 이끌었다.

게다가 로만 드미트리는 혼자만의 힘으로 라스칼의 일만 병력을 몰살시킨 전적이 있었다.

요새 탈환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든 드미트리의 승리는 의심하지 않았다.

강한 확신.

케이든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의 믿음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 진심으로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이 궁금해지는 그였다.

‘만약 그가 정말로 이번 작전을 성공시킨다면…….’

속국의 신분.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가라는 이사벨의 당부를 그리 공감하지 못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루나를 버리지 않았다.

아르카디아를 통제하기 위해 루나 왕국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루나의 요새가 무너진 순간부터는 약속의 의미를 상실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약속의 중요성을 외면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이사벨이 신의 대리인이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진정한 의미의 왕이었다.

이사벨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허락하지 않았던 케이든이, 새로운 방식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루나를 통솔하는 로만 드미트리.

평화가 무너진 아르카디아에서, 그것은 가장 이상적인 미래였다.

그때였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지금이다.”

마침내, 예고했던 신호가 떨어졌다.

* * *

콰르르르르르릉.

성문이 부서졌다.

성벽 위, 성문 너머.

오크들이 난리가 났다.

득실거리는 그들이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는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가자.”

“예.”

뒤따르는 크리스와 케빈.

그들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전혀 조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시야를 가득 메우는 적들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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