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30명의 지원군 (2)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는 수천의 오크들.
그들을 향해 다가가는 세 명의 인간.
숨 막히는 긴장감에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그때, 칼로트가 거대한 대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취익, 적은 겨우 세 명뿐이다! 죽여라!”
그제야.
오크들은 현실을 직시했다.
상대가 아무리 성문을 일격에 베어 버렸다지만, 겨우 세 명의 인간으로 이 많은 오크들을 감당할 수는 없다.
오크들이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취익, 공격하라!”
“취익, 죽여라!”
장관이었다.
시야 가득 오크들이 밀려들었다.
크리스와 케빈이 뒤에서 검을 뽑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는 한발 먼저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번뜩.
“꾸엑.”
“컥.”
선두에서 달려들던 오크들이 피를 뿜어 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공격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화끈한 통증과 동시에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런데도 오크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은 숨통이 끊어지지 않은 동료의 얼굴을 짓밟으며, 그대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새빨간 오라를 폭발시켰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오크 전사들의 전매특허였다.
살의(殺意)로 번들거리는 일격을 시도하자, 로만 드미트리는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닥트렸다.
콰직.
오크 전사가 눈을 부릅떴다.
오라로 일렁이는 검이 단번에 부서지더니, 가슴팍이 베이며 비틀거렸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앞으로 치고 나가며 머리를 날려 버렸다.
뒤이어 달려들던 오크들도, 어떻게 반항할 새도 없이 신체 부위들이 베여 나갔다.
푸확.
피가 튀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적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사방에서 오크들이 공격해 왔지만,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은 어떤 방향에서든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훅.
콰르르르릉.
뒤에서 도끼가 지나쳤다.
고개를 틀어 피하더니, 로만 드미트리는 밀고 들어오는 상대의 턱 밑에 검을 쑤셔 넣었다.
동시에 상단과 하단을 노리는 공격도 있었다.
하단을 공격하는 무기는 발로 밟아 버렸고, 그것을 발판 삼아 위로 솟구쳐오르며 오크의 머리를 찍어 버렸다.
분명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움직임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혼란스럽게 뒤얽히는 상황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천마군림보.
일보를 내디뎠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들을 향해, 로만 드미트리가 오라를 폭발시켰다.
‘천마검법 중반부 일초식.’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적들이 소멸(消滅)했다.
일순간 공간이 휑하게 변할 정도로, 단번에 적들을 쓸어 버렸다.
경이로운 무력이었다.
오크들이 로만 드미트리에게 완전히 압도되었을 때, 뒤이어 들이닥친 크리스와 케빈도 발군의 무력을 보였다.
이번 작전.
케이든이 아는 것과는 달랐다.
본래의 목적은 로만 드미트리가 시간을 끄는 것이었으나, 그는 자신을 따라나선 두 존재에게 명령을 내렸다.
“포로들을 구출한다고 해서 우리의 안전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동료들의 도움을 기다리지 마라. 우리의 최우선 목적은, 눈앞에 맞닥트린 적들을 모조리 도륙하는 것이다.”
위험한 일이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크리스와 케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미친 듯이 살육을 벌였다.
크리스의 빠른 공격에 오크들은 피를 흩뿌리며 길을 열었고, 케빈은 적들이 들끓는 공간을 파고들어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학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나아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둘은 이를 악물었다.
콰직.
오크의 머리를 부쉈다.
얼굴에 튀는 피에, 케빈은 피로 물은 얼굴로 사나운 이빨을 보였다.
“모조리 죽여 주마.”
광기(狂氣)가 폭발했다.
루나의 성문.
세 명의 사내는, 그들만의 전쟁을 시작했다.
* * *
그 시각.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작전을 시작했다.
비밀 통로에 진입해서 안으로 이동하는데, 미끄러운 바닥과 위로 올라가야 하는 통로는 이동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루나의 환경에 익숙한 케이든도 어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마치 손에 갈고리라도 단 것처럼 빠르게 통로를 이동했다.
눈보라를 헤쳐 나갈 때.
케이든은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특별한 기술을 익혔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아르카디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병사들에게 ‘북해빙궁의 기술’을 알려 주었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설천(雪天)에 대해서 알려 주겠다.”
설천.
눈이 내리는 하늘.
북해빙궁의 사람들이 극한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만든 무공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수법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설천 검법, 설천 보법, 설천 단검술, 설천 경공술 등등.
설천의 묘리를 접목한 다양한 방법을 만들어 냈다.
로만 드미트리가 가르친 것은 그중 기본적인 부분들이었고,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병사들의 단전에 조금이나마 설천의 기운이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추위에 적응할 수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처럼 추위를 완전히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천의 기운이 몸을 순환하면서 한기가 파고드는 것을 억제해 주었다.
일반 사람들이 아르카디아의 환경에 얼어 죽을 것 같은 추위를 느낀다면.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겨울 정도의 추위를 느낄 뿐, 그 이상은 느끼지 않았다.
지금도 똑같았다.
눈보라를 헤쳐 나갈 때도.
얼음길을 이동할 때도.
설천의 방법을 행했다.
루나와는 방식이 달랐다.
루나 왕국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방법을 만들었다면, 북해빙궁은 수천 년의 역사가 쌓여 가는 동안 목숨을 걸고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한 노력은 극한의 추위를 북해빙궁만의 무기로 만들었다.
비록 천마 백중혁에 의해 멸문의 길을 걸었지만, 무림을 정벌할 만큼의 괴물이 탄생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세력은 지금도 건재했을 것이다.
케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열심히 따라붙는데도, 먼저 앞서 나가는 드미트리의 병사들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너무나 빨랐다.
그때였다.
얼음 창고에 진입했다.
경계를 서고 있는 오크들을 발견하자마자, 케이든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콰득.
푹.
한 명의 오크는 머리를 비틀고.
또 다른 오크는 입을 막은 채, 목을 그어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서로 수신호를 주고받은 것이 아닌데도, 마치 서로 의사소통이 되는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없이 빠르게 처리해 버렸다.
그게 전음이라는 기술임을 케이든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케이든이었는데,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돌파하는 모습에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게 드미트리의 저력이란 말인가.’
처음에는.
겨우 30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 30명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것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정예를 선별했다.
루나와 조건을 조율하는 과정에서는 분명히 드미트리를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을 밝혔지만, 그렇다고 어중간하게 이번 일에 임한 것은 아니었다.
안으로 이동할수록 맞닥트리는 오크들의 숫자는 많아졌다.
처음에는 두세 명, 다음에는 열댓 명, 그러다가 수백으로 늘어났는데도, 그들은 드미트리의 병사들과 맞닥트리는 족족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했다.
아레스, 프레드, 로건.
얼굴을 기억했던 존재들의 활약이 아니다.
그들도 분명 발군의 무력을 보였지만, 무명(無名)의 병사들도 오크 여러 마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했다.
그제야 알았다.
루나가 어떤 나라와 손을 잡았는지를.
‘신이시여. 루나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정말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3명.
단 3명이다.
한낱 인간들을 처리하는 데 얼마 걸리지 않으리라 믿었던 칼로트는, 눈앞의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꾸에엑.”
“취익, 괴, 괴물이다!”
오크들이 혼란에 빠졌다.
처음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달려들던 그들이, 일방적인 살육에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였다.
아르카디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르카디아는 평화가 보장되는 세상이고, 그렇기에 인간들을 비롯한 많은 종족이 강해지는 일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태생의 차이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오크와 설인 같은 처음부터 강인한 육체를 타고난 존재들이, 다른 종족을 압도하는 무력을 갖추었다.
칼로트가 생각하는 인간은 나약한 족속들이었다.
왕실 기사단장인 레오의 무력은 인정하지만, 대부분이 이사벨의 축복을 받지 않으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약골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락사르의 계획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르카디아를 점령해 다른 종족을 식량화하겠다는 계획은, 압도적인 전투력과 머릿수를 갖춘 오크들에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끝없는 산맥 너머의 인간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주는 압도적인 무력에, 오크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취익, 큰일 났습니다! 후방에도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칼로트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적들이 어떻게 후방에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다면 포로들을 풀어 주고 그들과 같이 공격해 올 것이 분명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칼로트는 그리 현명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그에게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그락사르의 지침이 있었다.
그락사르는.
1만의 병력을 남겼다.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경계한 판단이었고, 그것으로도 역부족이라면 ‘그’를 동원하라고 말했다.
“취익, 미안하다.”
콰직!
상황을 보고한 오크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오크들을 추가로 죽이더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체를 한데 모았다.
“취익. 주술사(呪術師)! 의식을 행하라.”
오크 주술사.
십만의 오크가 태어나면 그중 하나만 타고나는 특별한 존재로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의 기운을 활용해 주술을 사용할 수 있다.
칼로트의 명령에 오크 주술사가 나섰다.
그가 시체에 고인 핏물을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더니,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취익, 버서커(berserker).”
상황을 반전시킬.
금단의 주술을 사용했다.
* * *
주술사로부터 빨간 기운이 일렁였다.
그것은 주변으로 퍼져 나갔고, 기운을 빨아들인 오크들은 눈이 새빨갛게 물들면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륵.”
“크악!”
버서커.
생명체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대신, 광기로 물들여 강해지게 만드는 주술이었다.
버서커의 효과로 오크는 이전보다 2배 이상의 괴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단순히 육체적인 강함뿐만 아니라, 고통을 잊고 미친 듯이 달려드는 모습은 체감상으로는 그 이상의 공포를 선사했다.
바로 지금처럼.
푸확.
피가 튀었다.
오크는 팔이 날아갔지만,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얼굴을 들이밀며 로만 드미트리의 육체를 물어뜯으려 했다.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로만 드미트리가 오크의 머리마저 날려 버렸지만, 몸만 남은 육체는 생전의 명령을 기억하고 로만 드미트리를 덮쳤다.
그런 오크가 무려 수천이 넘었다.
버서커는 수명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리스크가 있기에 웬만해서는 사용하지 않지만, 칼로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칼로트가 살면서 경험한 것 중, 저런 괴물 같은 무력을 보여 주는 존재는 그락사르가 유일했다.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광기에 물든 오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크악!”
서걱.
크리스는 침착했다.
오크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리를 베어 버렸고,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모양새에 얼굴을 짓밟아 버렸다.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방에서 살기를 드러내며 오크들이 밀려드는데도, 크리스는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하나씩 확실히 처리했다.
그에 반해.
케빈은 난전이었다.
얼굴이 피로 흠뻑 물들었다.
적들을 베고, 베고, 또 베면서 나아갔고, 자신에게 안기듯 덮치는 오크의 모습에 귀를 물어뜯었다.
콰득.
“퉷.”
살점을 뱉어 냈다.
역겨운 피 내음이 코를 자극했지만, 케빈은 오크보다도 더한 광기를 보였다.
일련의 상황.
칼로트는 걱정하지 않았다.
저 인간들은 상식을 초월하는 무력을 보여 주고 있지만, 언젠가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건 머릿수의 싸움이다.
무한한 체력을 공급하는 버서커의 힘은, 세 명의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뭔가 이상했다.
점점.
로만 드미트리와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무려 수천의 오크가 목숨을 버리면서 달려드는데도,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말이 되지 않았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은 태어나서 이십 년은 지나야 성인의 역할을 해내는 나약한 존재건만,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은 아르카디아의 상식과는 달랐다.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경악한 얼굴로, 주술사를 향해 소리쳤다.
“취익, 주술사! 더 강한 주술로…….”
그 순간.
퍽.
피가 튀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주술사의 머리가 박살이 나며, 칼로트는 시야를 가득 메우는 존재를 발견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어느새 코앞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