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30명의 지원군 (3)
주술사의 피는 특별했다.
강력한 저주가 걸려 있는 그것은, 오크 주술사의 머리가 박살 나면서 검붉은 핏방울 형태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주의 효과는 일순간 구속력(拘束力)을 발휘하는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코앞에 도달한 지금, 칼로트는 지금이야말로 그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임을 알았다.
찰나의 순간.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이성은 분명히 전력을 다해 공격하라고 소리쳤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는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공격했다간 죽는다.’
본능이었다.
칼로트.
그는 살면서 이런 기분을 딱 한 번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상대는 그락사르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락사르는 일반 오크에 불과했는데, 오크 전사였던 칼로트는 상대를 깔보는 얼굴로 도전을 받아 주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악에 받쳐서 대검을 휘두르고 처절하게 발악했는데도, 그 어떠한 공격도 먹히지 않았다.
피를 토해 냈다. 팔이 부러지고 얼굴이 짓밟혔을 때, 칼로트는 뼛속 깊이 공포가 각인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체감했다.
그날과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는 순간, 오히려 오크들을 도륙했던 저 검에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세상에 이런 인간이 있다니.’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맹수였다.
그것도 먹이사슬 최상위에 있는 사나운 포식자였고, 같은 맹수기에 칼로트가 느끼는 공포는 더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홀로 수백 마리의 초식 동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륙해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에게 자신이라는 존재는, 득실거리는 오크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주술사의 머리가 박살이 나고, 로만 드미트리가 피를 뒤집어쓰는 일련의 상황에 그는 걸음을 돌렸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뛰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붙잡혔다간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리라는 사실에, 부하들에게는 끝까지 싸우라고 소리치며 빠르게 도망쳐 버렸다.
전사의 자긍심은 바닥에 내던졌다.
그락사르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던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상식으로 논할 존재가 아니었다.
문제는.
퇴로가 없었다.
성문은 로만 드미트리가 버티고 있었고, 그렇다고 후방으로 도망치기에는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얼음 동굴을 통해 침투한 상태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했다.
통로라고 할 만한 것들은 완벽히 막힌 상황에, 칼로트는 다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
매우 위험한 것이지만, 인간들의 습성을 생각하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다.
“……취익, 반드시 살아남는다.”
빠르게 뛰어가는 칼로트.
그가 도망치는 방향에는, 축사로 정한 건물 중 하나가 있었다.
* * *
계획대로였다.
후방 침투조는 얼음 동굴을 점령, 경계를 서는 오크들을 처리한 뒤에 축사에 감금되어 있었던 포로들을 풀어 주었다.
일련의 과정에 고비는 없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신속하고 확실하게 적들을 처리한 것도 있지만, 로만 드미트리로 인해 오크들 대부분이 성문으로 향했다.
“1조는 계속해서 포로들을 찾는 것에 집중하고, 2조는 나와 같이 포로들을 동원해 성문으로 향한다.”
“알겠습니다.”
지휘는 맥버니가 맡았다.
그간의 능력을 인정받기 때문이었고, 맥버니의 명령에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상황이 변했다.
포로였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더니, 각자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을 하나씩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격하라!”
“오크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자!”
오크들이 당황했다.
로만 드미트리 하나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그들의 후방에서 악에 받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오크 주술사의 죽음으로 버서커는 이미 풀린 상태였다.
오크들은 황급히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섰지만, 처음 맞닥트렸을 때와는 다르게 사람들의 독기(毒氣)가 폭발했다.
“죽어!”
퍽!
한 사내가 망치를 휘둘러 오크의 머리를 내리쳤다.
기습적인 공격에 오크는 다리를 비틀거렸지만, 분노에 차오른 눈빛으로 사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푹푹푹!
“죽어, 죽으라고!”
“너희가 내 동료들을 죽였어!”
다른 사람들이 달라붙어 몸에 칼을 쑤셔 넣었다.
오크가 피를 뿜어내고 바닥에 쓰러지는데도, 독기로 번들거리는 그들의 눈빛은 진정할 줄을 몰랐다.
남녀를 가릴 것 없었다.
오크들의 반격에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피를 흩뿌리며 죽어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지만, 그들은 마치 버서커에 걸린 사람들처럼 뒤가 없이 달려들었다.
포로로 지낸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방금까지 옆에서 살아 숨 쉬던 사람이 살점이 발라지며 죽어 가는 모습은, 사람들의 가슴에 엄청난 분노를 남겼다.
일반적인 전쟁은 상대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런데 오크들은 단순히 승리하는 것을 넘어서 생명체를 식량으로 전락시켰고, 사람들은 기회만 있다면 어떻게든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 판을 만들어 주었다.
악에 받친 사람들이 달려드는 상황에, 오크들은 머릿수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로만 드미트리를 포함한 세 사내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후방에서는 루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아레스와 같은 강자들이 날뛰었고, 기세등등하던 오크들로서는 어느 순간부터 궁지에 몰렸다.
그제야 알았다. 자신들의 지휘관인 칼로트가 사라졌다는 것을.
몇몇은 그가 도망친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오크들은 이미 패배한 싸움임을 알았다.
그렇다고 항복할 수는 없었다.
인간들을 식량으로 만들어 버린 그 순간부터, 이 전쟁의 끝은 어느 한쪽의 멸망으로 끝나야 했다.
번뜩.
푸확.
케이든이 오크의 목을 베었다.
피가 끓었다.
이번 전쟁.
패배한 줄만 알았다.
세바스찬으로부터 루나의 요새가 함락당했다는 말을 들을 때만 하더라도, 루나의 요새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기어코 상황을 역전시켰다.
겨우 30명을 대동하고서, 이 말도 안 되는 전쟁을 루나의 승리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를 의심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르카디아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기적을 당연하게 행하는 사내였다.
푸확.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케이든이 피로 물든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폭발하는 감정을 표출했다.
“드미트리를 따르라!”
검을 치켜들었다.
달려드는 오크를 베어 버리더니, 다시 한번 검을 치켜들며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악에 받쳐 소리쳤다.
“드미트리를 따르라!”
그 순간.
케이든의 감정이 전염되었다.
바닥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던 사람도.
오크들과 치열하게 싸우던 사람도.
이를 악물며, 케이든의 의지에 반응했다.
“드미트리를 따르라!”
“드미트리를 따르라!”
지금부터는.
스스로의 의지로, 평화를 쟁취할 것이다.
* * *
서로가 알았다.
투항이 허락되지 않는 싸움임을.
오크들은 끝까지 발악했고, 결국은 그들을 모조리 학살해 버리고서야 전투의 종지부를 찍었다.
“후욱, 후욱.”
“후우.”
시체 위.
크리스와 케빈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며 수많은 전장을 전전했지만, 이처럼 시야를 가득 메우는 병력을 끝도 없이 상대하는 경험은 흔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면 죽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끝까지 살아남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에 대한 기쁨 같은 것이 보였다.
항상.
로만 드미트리는 무모한 작전은 홀로 나섰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방해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는데, 이번만큼은 크리스와 케빈을 대동했다.
기뻤다.
자신들을 믿는다는 의미이기에.
어떤 이들에게는 사지(死地)로 들어서는 일이 두려울지 모르겠지만, 각자의 목표가 있는 두 사내에게는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더는 살아 있는 오크가 보이지 않았다.
무려 일만에 달하는 오크를 모조리 도륙했기에, 루나의 요새는 그야말로 피와 시체로 가득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맥버니가 로만 드미트리에게 다가갔다.
“주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지?”
“오크들을 이끌었던 ‘칼로트’라는 이름의 오크가, 포로들을 감금하고 있던 건물 하나를 점거하고 그들을 인질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포로들이 모두 죽을지도 모릅니다.”
기억이 났다.
오크 주술사를 죽이고 난 직후.
꼬리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헐레벌떡 도망치던 오크의 얼굴이.
로만 드미트리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 건물로 안내해.”
* * *
건물에 도착했다.
맥버니의 보고처럼, 칼로트는 포로들을 가둔 문 앞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댔다.
“취익, 로만 드미트리! 내 조건은 간단하다! 내 목숨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이 마법 폭탄을 터트려서 포로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다. 취익, 고민할 시간은 10분 주겠다. 그 안에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방안을 마련해라!”
로만 드미트리를 발견하고.
그가 살기등등한 기세를 보였다.
미리 확보해 둔 마법 폭탄의 스위치를 치켜들며, 그는 언제든 누를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칼로트는 인간들의 습성을 잘 알았다.
그들은 매우 나약한 종족이기에, 포로와 같은 동족들이 희생되는 부분에서 결단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칼로트는 그러한 부분을 공략했다.
특히 인간들은 정치적인 요소 때문에라도 포로들을 함부로 버릴 수 없을 테고, 그건 로만 드미트리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인간이지 않은가.
끝없는 산맥 너머에서 넘어왔다고 한들, 인간 특유의 습성까지 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나와 거래를 하겠다는 건가.”
“취익, 그래! 나는 거래를 원한다!”
“재밌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칼로트.
그는 진실을 몰랐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본능에 의한 판단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왜 널 죽이지 않았는지 아나.”
“취익, 무슨 헛소리냐!”
주술사의 저주.
그것은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아무런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주술과 마법.
마법은 천마 백중혁에게 생소한 세계였을지 몰라도, 주술 형태의 기술들은 익히 경험해 보았다.
악명을 떨치던 주술사들이 백중혁의 목숨을 노렸다.
그들이 저주하고 악담을 퍼붓는 상황에서, 백중혁은 그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오로지 힘으로 정점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기에.
주술은 통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칼로트를 쫓지 못한 게 아니라, 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네게 그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수하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나약한 지휘관. 네 존재 여부는 전쟁과 무관하다. 그래서, 겁에 질려 도망치는 너를 굳이 쫓지 않았다.”
칼로트는 착각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와의 거리를 좁힌 이유는.
지휘관을 처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크 주술사가 버서커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칼로트의 목숨을 원했다면.
오크 주술사의 머리가 날아갔을 때, 칼로트 또한 의식이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너는 겨우 그 정도의 존재일 뿐이다. 네가 발악한들,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취익, 이 새끼가!”
칼로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명백한 무시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따위 대우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이성을 잃었다.
칼로트는 가슴을 활짝 펴며, 보란 듯이 스위치를 보여 주었다.
“취익, 네 녀석의 망언이 사람들을 죽…… 크악?!”
번뜩.
순간.
피가 튀었다.
스위치에 갖다 댄 손가락이 날아갔고, 당황한 얼굴로 스위치를 움켜쥐려고 하자 손목마저 날아가 버렸다.
스위치가 바닥에 떨어졌다.
칼로트는 저것이 유일한 무기임을 알기에, 다른 손을 뻗어서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다.
다른 손도 잘려 나가는 상황에, 칼로트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그와 자신의 거리.
멀었다.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데, 대체 어떻게 공격했단 말인가.
“내가 말했잖아.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 * *
침묵에 빠졌다.
루나의 사람들.
드미트리의 병사들.
그들이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두 팔을 모두 잃고 버둥거리는 칼로트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가 다가가 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콱.
“취익, 놔, 놔라!”
바둥거렸다.
질질 끌려가는 상황에, 칼로트가 발악했다.
“칼로트. 네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다.”
길이 열렸다.
밖으로 나갔다.
전투를 끝내고 숨을 고르던 사람들이, 칼로트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살기 어린 눈빛을 보였다.
칼로트!
모두가 그를 기억했다.
사람들의 살점을 발라 낼 때, 칼로트는 그 칼을 쥔 채로 낄낄낄 웃어 댔다.
“지금부터 나는 너를, 가족을 잃은 루나 왕국 사람들의 선물로 줄 것이다.”
그 말에.
발악하던 칼로트가, 공포에 물든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간 경험했던 인간들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