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30명의 지원군 (5)
30분 뒤.
루나의 병사들이 집결했다.
하루 만에 전쟁의 피로를 모두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에 다들 망설이지 않았다.
루나의 안위를 위한 일이다.
당장에라도 전장에 나갈 수 있도록 무장을 갖춘 사람 중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칼로트를 처리했던 스미스와 같은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스미스.”
“예.”
“루나 왕국의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눈에서 싸우는 방법을 터득한다고 들었다. 맞나?”
“맞습니다.”
“그게 어떤 방법이지?”
스미스가 케이든의 눈치를 살폈다.
루나의 기술을 함부로 말해 줄 수 없기 때문이었는데,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이자 입을 열었다.
“루나의 기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눈에서 기동하는 방법인데, 이를 위해 특수한 신발을 사용합니다. 보통 눈에 발이 빠지는 이유는 좁은 면적에 사람의 무게가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루나의 신발은 이를 분산시켜 주고, 만약 오라 검사라면 마나를 발밑에 퍼트려서 효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신발을 착용했다고 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움직임을 터득해야만 합니다.”
설명은 계속되었다.
두 번째는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
세 번째는 추위를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나름대로 체계적이었다.
아르카디아가 극한의 환경으로 변하면서, 루나 왕국은 살아남기 위해서 추위에 적응해야만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최근에 추위가 더욱 심해지면서 위기가 찾아왔을 때는 이사벨의 탄생으로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이전에는 오로지 인간들의 힘으로만 문제를 해결했다.
스미스가 말한 방법들.
노력의 산물이었다.
루나의 사람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로만 드미트리의 기준에는 허점이 많았다.
하늘 위.
눈이 내리고 있었다.
루나의 요새는 그래도 제설(除雪) 마법으로 무릎까지 쌓이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요새 밖은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직 낮이기에 그나마 이 정도였다.
해가 저물고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면, 무릎 위를 넘어서 가슴까지도 눈이 차오르는 세상이 바로 아르카디아였다.
루나의 방식.
그것은 치명적인 부분이 결여되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케이든을 보았다.
“케이든. 루나의 방식에, 폭설이 내릴 때 싸우는 방법도 있나?”
“없습니다.”
“왜지?”
“……그와 같은 상황을 대비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르카디아는 평화가 보장되는 세상이었습니다. 폭설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루나의 안위를 위해 필요하지만, 폭설을 뚫고 전쟁을 치르는 상황을 대비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믿음도 있었고, 오늘과 같이 폭설이 내리는 상황에서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는 것은 루나 왕국만이 아닙니다.”
똑같았다.
아무리 오크들이 화이트 울프를 다룬다고 한들.
폭설을 뚫고 루나의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너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너희는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살아가며, 극심한 추위를 극복하는 방법을 몸으로 직접 터득했다. 아무리 폭설에 대한 매뉴얼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한들, 너희가 유리한 상황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부터 루나의 병사 중 100명을 선별, 드미트리의 병사 단 한 명을 제압하라. 대결은 요새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진행할 것이다.”
예상 밖의 전개였다.
단 1명.
신호를 보내자 무명의 병사가 나섰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병은 분명한데, 특별히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았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개개인이 모두 뛰어난 오라 검사다. 루나의 일반 병사들 백 명으로는, 환경적인 요인을 떠나서 애초에 쉽지 않은 승부겠지.’
그때였다.
“케이든. 너와 오라 검사들을 포함해 백 명을 구성해도 좋다. 만약 너희가 드미트리의 병사를 제압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드미트리의 명예를 걸고, 너희가 원하는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
오라 검사를 포함한 승부.
케이든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 * *
일 대 백.
크리스, 케빈, 아레스와 같은 독보적인 존재도 아니고, 맹한 얼굴의 사내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다.
이름은 몬슨이었다.
드미트리의 사병 중 하나였고, 특별한 직책은 없었으며, 설명을 듣기로는 직업을 전향하기 전에 시장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던 평범한 사내라고 했다.
하지만.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침투 작전.
얼음 동굴의 오크들을 제압할 때,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아마 만만치 않은 존재겠지. 그리고 내가 아는 로만 드미트리는, 불가능한 싸움을 걸 사람이 아니야.’
걸음을 옮기며.
케이든은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처럼, 자신과 오라 검사들을 포함해 백 명을 구성했다.
“상대가 한 명이라고 해서 절대 방심하지 마라. 요새 밖은 지금 폭설로 인해서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다. 서로 등을 맡긴 상태에서 거리를 좁히고, 적이 먼저 공격해 들어왔을 때 빠르게 공간을 차단해서 수적 우위를 살리면 무조건 승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큰 은혜를 받았다. 승리한다고 해도 감히 그분에게 소원을 바라지는 않겠지만, 루나 왕국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눈에서의 싸움만큼은 승리해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다들 의지를 보였다.
끼익.
성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가자, 마법의 보호를 조금도 받지 못하는 세상이 펼쳐졌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한기가 뼛속을 파고들었고, 펑펑 내리는 눈이 시야를 가득 메울 만큼 쌓여 있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어떻게 백 명을 제압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내기는 시작되었고, 케이든을 포함한 병사들이 대열을 갖추자 먼발치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신호를 보냈다.
“시작.”
탓.
몬슨이 눈 속으로 사라졌다.
겨우 몇 발자국.
몬슨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케이든은 마나를 일으키며, 주변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폈다.
“주변을 경계하라!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에게 유리한 싸움이다.”
화악.
감각이 예민하게 변했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감각에 포착되는 순간, 케이든이 경고하기도 전에 싸움이 벌어졌다.
퍽!
빠악.
“커억.”
“악!”
순식간이었다.
눈을 뚫고 나타난 몬슨이 선두에 있던 병사를 제압하더니, 날이 없는 부분으로 급소를 가격해 세 명의 병사를 단번에 쓰러트렸다.
어떻게 반항할 새도 없었다.
오라 검사인 케이든도 몬슨의 존재를 간신히 파악했기에, 일반 병사들로서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몬슨의 존재에 반응하지 못했다.
“이런.”
콰릉.
콰르르르릉.
땅을 박찼다.
황급히 몬슨을 공격하려 했는데, 몬슨은 케이든을 놀리는 것처럼 눈 속으로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당황스러웠다.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눈보라가 심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몬슨이 사라진 공간에는 흔적 같은 것이 없었다.
루나의 기술을 극도로 연마해도 발자국 없이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폭설로 인해 눈이 수북하게 쌓인 상황. 자신조차도 발목까지 눈이 푹푹 박히는데, 몬슨은 마치 귀신처럼 사라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하나씩, 하나씩.
몬슨이 병사들을 제압했다.
“이쪽이다!”
“막…… 컥.”
빡!
“빌어먹을.”
혼란에 빠졌다.
눈 위.
루나의 홈그라운드였다.
승리할 자신이 있었건만, 몬슨은 마치 귀신처럼 신출귀몰(神出鬼沒)하며 루나의 병사들을 농락해 버렸다.
오라 검사들이라고 해서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루나의 방식을 사용해서 몬슨의 위치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기척을 느꼈을 때는 이미 공격을 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퍽-
비틀거렸다.
무릎을 꿇는 기사의 모습에, 백색의 날다람쥐라고 불리는 케이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느렸다.
루나 왕국 제일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자신이.
몬슨을 따라잡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나둘.
쓰러지는 병사들의 숫자가 절망감을 선사했다.
처음에는 의지를 가지고 싸우던 케이든이, 어느 순간부터는 압도적인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나의 방식이 틀렸다는 건가.’
결국.
모두 쓰러졌다.
케이든이 마지막으로 남았을 때,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님. 이제 끝났습니다.”
뒤를 점한 몬슨.
확실했다.
루나 왕국의 완벽한 패배였다.
* * *
내기는 끝났다.
압도적인 패배.
케이든은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어째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루나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고자 발악했다.
그간 갈고닦은 기술은, 사계절이 존재하는 드미트리의 기술에 제압당할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루나의 병사들.
패잔병(敗殘兵)의 몰골을 한 그들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루나는 아르카디아의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노력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크들의 공격을 받은 지금, 너희의 노력에는 간절함이 배제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저희가 간절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루나와 북해빙궁.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평화가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루나는 굳이 처절하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들이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 추위가 시작되었을 때의 루나는 간절했을 것이다. 추위를 극복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기에 여러 기술을 만들었지만, 이사벨 여왕이 탄생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보장되는 평화와 온기를 부여하는 신의 축복. 살 만했겠지. 극한의 환경에서 어떤 상황들이 벌어질지 대비하지 못한 채, 너희는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그게 문제였다. 아르카디아에서 폭설은 변수라고도 할 수 없는 문제다. 시시때때로 폭설로 인한 어려움을 겪었으면서도, 너희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에서만 싸우는 방법을 훈련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강해지고자 노력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에, 편견을 이겨 내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스스로가 충분히 노력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비틀렸다.
누군가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요소들이, 지금의 루나를 만들었다.
“너희는 자립성(自立性)을 잃었다. 이사벨 여왕 한 명이 실종되었다고 해서, 혼란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없다. 몬슨이 너희를 상대로 보여 준 것은 투쟁을 통해 얻어 낸 산물이다. 평화롭게 추위를 이겨 낼 방법을 연마한 것이 아니라, 악착같이 목숨을 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에 극한의 환경을 극도로 활용하는 방법을 만들었다.”
병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비참하고 쪽팔렸지만,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루나는 드미트리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할 것이다.”
만약.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루나는 드미트리가 생각하는 미래에서 배제될 것이다.
“내가 가르치려는 것의 이름은 ‘설천(雪天)의 무공’이라고 한다.”
* * *
그날 저녁.
다들 넋을 잃었다.
훈련을 끝낸 루나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일이 현실인지 의심이 들었다.
“……말도 안 돼.”
“드미트리에서 어떻게 이런 기술들을 만들어낸 거지?”
설천의 무공.
경악스러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했다.
북해빙궁의 역사는 단순히 눈 위를 빠르게 이동하는 방법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눈 위를 이동하면서 자신의 기척을 어떻게 숨기는지,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지, 시각적인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적들의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는지 등 세세한 요소들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로만 드미트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루나의 기술은 적의 존재가 배제되었다면, 북해빙궁의 무공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다.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 님은 신의 사자가 아닐까요.”
한 병사의 말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상식 밖의 존재였다.
겨우 30명의 지원군을 데려와 일만의 오크를 토벌했으며, 루나조차도 갖추지 못한 해박한 지식으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지금은 폭설이 문제가 되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였다. 행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다.
케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분은 신의 사자가 아니다. 스스로가, 초월(超越)의 영역에 들어섰을 뿐이다.”
신을 믿었다.
그분을 따르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삶은, 로만 드미트리의 말처럼 루나의 미래를 위해 자립성을 갖출 것이다.
계획은 이틀 뒤.
충분한 훈련을 진행하고 길을 떠난다고 했다.
엘프의 존재는 중요하다.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도와줄 필요는 있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조급한 마음에 일을 서두를 필요성은 없다고 말했다.
엘프의 존재는 승산을 높여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겨우 며칠도 버티지 못한다면 애초에 그 정도의 전력일 뿐이기에, 일단 루나의 전력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루나 또한.
드미트리의 영역에 들어섰다.
아군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판단에, 처음 도움을 청했을 때와는 다르게 맹목적인 믿음이 생겼다.
아군일 때의 드미트리와 아닐 때의 드미트리.
체감이 완전히 달랐다.
그로부터 이틀 뒤.
끼익.
요새의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서는 병사들.
그들의 눈빛에, 더는 승리에 대한 의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