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그락사르 (1)
꼬리를 잡았다.
오크들의 후미(後尾)를 발견한 로만 드미트리는, 눈보라를 뚫고 나아가며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계획대로 움직인다.”
“예.”
콰릉.
콰르르르르릉.
망설임은 없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명령을 받음과 동시에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푹.
“크악!”
선두는 케빈이었다.
가장 빠르게 달려든 케빈이 오크의 뒤를 공격하더니, 비명을 지르는 오크의 머리를 비틀어 버렸다.
그때만 해도 오크들은 케빈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시야와 소리가 모두 차단되었기 때문이었는데, 바닥에 쓰러지는 오크의 모습에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들이 대열을 갖추기도 전에,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뒤이어 들이닥쳤다.
“취익, 적이다!”
“취익, 적이 나타났다!”
오크들이 혼란에 빠졌다.
정예 병력은 대부분 최전방으로 빠진 상태였기에, 일반 병사들로는 드미트리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케빈이 공간을 파고들며 수십 마리의 오크를 도륙해 버렸고, 크리스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핏물이 눈 위로 흩뿌려졌다.
아르카디아 대륙에서는 오크를 전투의 민족이라고 표현했다.
태생부터 타고난 신체적인 이점이 전투에 특화되었기 때문인데, 오크들의 발악은 드미트리의 병사들을 상대로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카앙!
힘의 대결에서 밀렸다.
오크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을 때, 로건은 그의 몸통을 그대로 갈라 버렸다.
콰득.
푸슈슈슉.
피가 튀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
그들은 일당백(一當百)이었다.
세상 그 어떤 군대를 상대로도, 홀로 일백의 병사를 상대할 만큼의 전력.
그것이 드미트리의 수준이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병사들도 일당백의 무력을 보였고, 새로이 합류한 프레드와 로건, 아레스와 같은 사람들은 크리스와 케빈 못지않은 활약상을 펼쳤다.
막아서는 족족 적들이 쓰러져갔다.
뒤따라서 전장에 합류하는 루나의 병사들은, 눈앞의 상황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와.’
‘이게 드미트리구나.’
‘끝없는 산맥 너머의 사람들이 이렇게 강하다니.’
요새에서의 전투.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온전한 정신으로 드미트리의 무력을 확인하니, 비정상적인 무력에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자신들도 같은 병사들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병사의 신분으로 오라를 사용하는지를, 일반 병사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드미트리가 루나의 아군이라는 것이었다.
적으로 만났다면 악마와도 같았을 그들의 활약에, 루나의 병사들은 힘을 냈다.
“드미트리를 따르라!”
“극악무도한 오크들을 모조리 처단하라!”
첫 번째 작전.
무력을 내세운 학살(虐殺)이었다.
그락사르가 보여 준 그간의 행보를 보았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의 후미가 약할 것을 예상했다.
당연했다.
루나는 함락당한 상황.
오크에 대항할 만한 이종족이 엘프밖에 없으니, 그락사르로서는 정예를 내세워 엘프를 공격하는 것이 옳았다.
그게 바로 그들의 약점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갖춘 병력은 사병들 29명에 루나의 병사 수천 명뿐이었지만, 후방으로부터 번지는 학살이 수만의 오크들을 압도했다.
비명이 퍼져 나갔다.
핏물이 눈을 물들였다.
그러자.
예상대로, 오크들의 진영에 변화가 생겼다.
“취익, 일단 후방부터 제압하라!”
“취익, 인간들을 처단하라!”
그락사르의 명령이 떨어졌다.
전방에는 엘프, 후방에는 인간.
자칫 잘못했다간 전력이 분산될 수도 있는 상황에, 그락사르는 빠르게 후방을 처단할 것을 명령했다.
영리했다.
판단도 빨랐다.
그락사르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지만, 그것은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는 바였다.
“두 번째 작전을 실행하라.”
그 말에.
전투를 치르던 병사들이,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 * *
휘잉.
눈보라가 불었다.
악에 받친 오크들이 눈보라를 뚫고 따라붙는 순간, 수북이 쌓인 눈에서 일단의 병력이 튀어나왔다.
팍.
“취익, 조심…… 컥!”
“크악!”
푹푹푹푹.
루나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창을 찔러 넣어, 달려들던 오크들을 단번에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루나의 병사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오크들을 빠르게 공격했다.
한 명의 힘으로 부족하다면 두 명이, 두 명으로도 부족하면 세 명이 협공했다.
딱 그 정도.
오크들이 정신을 차리고 대열을 갖추자, 루나의 병사들은 망설임 없이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취익, 이런 쥐새끼들이!”
“취익, 쫓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인간들의 공격 자체도 갑작스러웠는데, 눈 밑에 숨어서 기습 공격을 시도하다니. 아르카디아의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크들은 단순히 기습 공격 자체를 당했다는 사실에 눈을 붉히며 따라붙었고, 조금만 앞서가도 뒤에 따라붙던 오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발이 심했다.
그때였다.
확.
콰직.
눈보라를 뚫고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로만 드미트리였다.
정면 대결로도 쓰러트릴 수 없는 괴물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오크 서너 마리를 단번에 죽였다.
머리가 꺾이고.
몸통이 날아갔다.
로만 드미트리는 오크들을 순식간에 처리하고는, 루나의 병사들이 사라진 것처럼 다시 눈보라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뒤늦게 도착한 오크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을 처리하겠다고 앞서 나간 동족들이, 어느 순간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두 번째 작전.
엘프들의 영역을 활용했다.
세계수는 미약하게나마 생명력(生命力)을 주변에 퍼트리는데, 그로 인해 폭설이 내린다고 할지라도 엘프들의 영역에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는 적의 후미를 공격, 적들을 유인해 세계수의 영향력에서 멀어졌다.
폭설은 엄청난 눈보라를 동반하기에, 오크들로서는 수적 우위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퍽.
“크악!”
오크가 비명을 질렀다.
화이트 울프를 타고 빠르게 달려들던 오크는,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가슴팍이 길게 찢겨 나갔다.
벌써 수백이 당했다.
그락사르의 명령이 오크들을 사지로 밀어 넣었다.
이번 전쟁.
로만 드미트리 개인의 무력으로 밀어붙여도 승산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정면 대결을 유도하지는 않았다.
그락사르의 힘은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오크들은 무려 수만의 오크 전사를 보유하고 있기에, 개인을 맹신한 정면 대결은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고로.
전략을 짰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피해를 줄 수 있는.
북해빙궁의 무공은 그걸 가능하게 했다.
팍.
“죽어!”
푹푹푹푹!
눈에서 튀어나오는 병사들.
루나의 병사들은 지난 이틀 동안, 북해빙궁의 은신술에 대해서 터득했다.
절반은 드미트리의 병사들을 따라 후미를 공격했고, 나머지 절반은 눈 속에 숨어 적들을 유인할 때를 기다렸다.
무력의 차이를 고려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처럼 적들 사이를 날뛸 만큼 강하지 않다면, 그들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했다.
‘우리가 이긴다.’
‘이길 수 있어.’
그간의 훈련.
루나의 병사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무력에 감탄한 것도 있지만, 설천의 무공을 가르치며 설명해 주었던 앞으로의 계획에 믿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신들이 오크의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당할 것 같았다.
북해빙궁의 무공은 눈보라 속에서도 적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흔적 없이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오히려 폭설이 내리는 환경은 루나 왕국에 너무나도 유리한 이점이었다.
시체가 쌓여 갔다.
빠르게 줄어드는 오크들.
그러한 상황에, 그락사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일련의 상황.
그락사르는 함정에 빠졌음을 알았다.
‘적들의 지휘관은 예사 인물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
끝없는 산맥 너머에서 나타난 존재였다.
그는 분명히 30명의 병력으로 루나의 요새를 탈환했을 것이고, 눈보라를 역으로 활용하는 인간들의 움직임은 그로부터 비롯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건 단순한 가설이 아니다.
이번 전쟁을 준비하면서 인간들의 전력을 파악했었기에, 이 상황은 루나의 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엘프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던 그들이, 인간들의 공격에 기회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끝없는 산맥 너머의 이방인(異邦人)들이 문제다. 루나 왕국은 우리에게 대항할 힘이 없지만, 로만 드미트리라는 녀석과 그의 병사들은 강하다. 그들의 존재를 간과했다간 패배할지도 모른다.’
사태 파악이 빨랐다.
그락사르가, 마나를 실어 외쳤다.
“취익, 모두 뒤로 물러나라! 적들이 원하는 대로 빨려 들어가지 마라!”
그리고는.
팟.
콰르르르르릉.
땅을 박찼다.
적들의 선두.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며 오크들을 공격했다.
그중에는 자신에 버금가는 강력한 존재들이 있었지만, 그락사르는 과감하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꽈악.
도끼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마나가 폭발할 듯이 일어나며, 그의 근육이 크게 부풀었다.
“취익, 죽어라!”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엄청난 격돌이 일었다.
공격한 상대.
그는 바로 아레스였다.
아레스는 오크들을 처리한 뒤에 재빠르게 검을 회수했고, 강력한 충격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예상을 넘어서는 파괴력이었다.
그락사르는 마치 아레스가 공격을 막을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거대한 도끼를 연속해서 휘두르며 아레스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콰앙!
쾅! 쾅! 쾅! 쾅!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그락사르로부터 일어나는 오라의 파동에, 눈보라가 밀려나며 그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인간과 오크.
태생부터 다르다.
오크는 태어났을 때부터 전사로서의 핏줄을 타고났기에, 아르카디아는 그들을 포식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오라의 기원은 알렉산드르로부터 비롯되었고, 아무리 인간과 비슷한 종족이라고 할지라도 오크들에게 오라는 그렇게 익숙한 힘이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며 오라를 사용하는 오크 전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강력한 이유는 오라 검사로서 뛰어난 것이 아니라, 태생부터 신체적으로 타고난 이들이 오라를 사용하기에 같은 경지여도 인간 오라 검사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생각해 보라.
오크의 육체를 타고난 존재가 오라의 재능마저 갖추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런 존재가 바로 그락사르였다.
회색 황무지 일족.
그들은 그락사르에 굴복했다.
그가 발현하는 찬란한 오라를 바라보며, 그야말로 역대 최강의 오크라는 사실에 고개를 조아렸다.
파지지지직.
오라가 일그러졌다.
빨갛게 타오르는 오라가, 아레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일격.
엄청난 파동이 일었다.
아레스가 뒤로 밀려났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살짝 떨리는 손은, 방금의 일격이 만만치 않았음을 증명했다.
“이거, 제대로 하지 않으면 지겠는데.”
웃었다.
그때였다.
그락사르가 도끼를 어깨에 짊어지며, 사나운 이빨을 보였다.
“취익, 인간들의 지도자는 들어라! 나와 승부를 보자. 네가 나를 쓰러트린다면, 회색 황무지 일족은 패배를 시인하겠다.”
아레스와의 대결.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그락사르는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해 보이고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택했다.
그러자.
휘이이이잉.
눈보라 너머로.
“재밌는 제안을 하는구나.”
로만 드미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그락사르.
대단한 존재였다.
아레스는 샐러맨더 대륙 최상위의 실력자건만, 그락사르는 일순간 아레스를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아레스는 전력을 발휘하지 않았고, 그락사르 또한 전력이 아니었다.
정말 재밌는 건.
그락사르의 판단이었다.
‘수적으로 우위인데도 소모전이 불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우리가 폭설이 내리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상황에, 머릿수로는 대세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거겠지. 그락사르는 일반적인 오크가 아니다. 강력한 무력과 지휘관으로서의 지혜와 지도력을 모두 갖추었다.’
루나의 패배.
이해가 되었다.
그락사르가 압도적인 무력과 지도력으로 전쟁을 이끌었으니, 오크들은 승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전쟁을 일으킨 시기였다.
드미트리와 루나의 연결고리가 생긴 시점부터, 그락사르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겨났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내가 이기거나, 혹은 네가 이겼을 때. 패자(敗者)를 따르던 이들은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나.”
“취익, 그거야 승자의 마음이지.”
“그래, 그게 문제야.”
웃었다.
검을 늘어트리고는, 그락사르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락사르. 이번 전쟁은 단순한 정벌 전쟁이 아니다. 너희는 인간들을 식량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드러냈고, 실제로 군량을 전쟁 포로로 대체했다. 그때부터 이미 끝난 관계였다. 내가 패배하든, 네가 패배하든. 패자를 따르던 이들은, 단 한 명도 패배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번 전쟁은.
종족의 명운이 걸렸다.
백기를 내건다고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전쟁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락사르는 오만했다.
인간들의 전력을 파악하고 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그는, 전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계산하지 않았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마. 그리고 미리 말해 두지.”
검을 들었다.
상대를 바라보며,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내가 승리한다면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오크를 멸족(滅族)시킬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날 막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