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8화 (338/615)

338화 그락사르 (2)

그락사르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보라 너머.

압도적인 존재감을 느꼈다.

방금 공격을 주고받은 아레스도 만만치 않은 존재였지만, 아레스를 상대로 힘을 뺐다가는 눈보라 너머의 존재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승부수를 걸었다.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로만 드미트리를 불러들인 것은, 그게 오크들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아서였다.

웃긴 일이었다.

인간은 하찮고 나약하다.

그런데 수적으로 우위를 보유하고도, 겨우 단 한 명의 인간 때문에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취익, 나 또한 약속하지. 내가 승리한다면. 아르카디아를 점령하고, 끝없는 산맥 너머 네 녀석의 나라도 짓밟아 주마.”

더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락사르가 도끼를 강하게 움켜쥐더니, 오라를 폭발시키며 달려들었다.

팟.

콰르르르르릉.

빨랐다.

거대한 체구와는 다르게 순식간에 공간을 파고들었고, 그락사르의 근육이 크게 부풀며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도끼를 거세게 휘둘렀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장면이었다.

빨갛게 일어나는 오라가 소용돌이치듯 도끼를 휘감는 모습은, 인간의 몸으로 막을 수 없는 공격처럼 보였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강렬한 충격이 일었다.

공격은 막혔다.

아무렇지도 않게 막혀 버린 상황에, 그락사르는 기세를 이어 나가겠다는 듯이 연계 공격을 펼쳤다.

콰앙!

쾅! 쾅! 쾅! 쾅!

아레스를 몰아붙인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그런데.

공격할수록 그락사르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아레스를 상대할 때는 그래도 상대를 밀어붙인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로만 드미트리와의 공방에서는 엄청난 반발력을 느꼈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차원이 다른 강자였다.

적당한 수법으로는 쓰러트릴 수 없다는 판단에, 공격하던 도중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확.

오른쪽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상대의 방어를 유도한 직후, 몸을 뒤로 회전시키며 반대 방향을 공격했다.

퍼엉-

마나가 폭발했다.

회전에 폭발력을 더해, 상대가 미처 반응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번뜩.

비틀.

몸의 균형이 흔들렸다.

분명히 상대의 허를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팔이 튕겨 나가며 얼굴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간발의 차이로 머리가 날아가는 것은 피했다.

그런데 얼마나 빠르고 기습적이었는지, 그락사르의 눈썹부터 입 부근까지 붉은 선이 그려졌다.

‘이런 미친.’

균열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강하다는 사실은 예상했다.

하지만.

방금은 논외였다.

아르카디아에서 최강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조차도 공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비틀거리는 몸을 재정비할 시간도 없이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을 막아야만 했다.

콰앙!

쾅! 쾅! 쾅! 쾅!

눈이 팽팽 돌았다.

똑같은 수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락사르가 몰아붙인 것처럼 위에서 내리찍는 연계 공격을 펼쳤고, 그락사르는 한없이 밀려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건 생소한 경험이었다. 오크는 태어났을 때부터 인간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괴력을 타고난다.

태생적인 강점에 오라를 각성하면서부터 그락사르는 단 한 번도 힘에서 밀린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단순한 격돌이었다.

막아 보라는 듯이 뻔하게 휘두르는 검에, 그락사르의 존재감이 뭉개졌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뒤로 밀려났다.

그락사르가 이를 악물었다.

아직 전력이 아니라는 듯이, 천천히 걸어오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일이 틀어졌음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패배한다.’

로만 드미트리는.

괴물이었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유형의 인간.

자신이 오크 중에서 돌연변이이듯, 그 또한 인간의 한계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신체적인 한계를 이겨 내고 인간이 이렇게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다.

자신에게 오크 종족의 명운이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상대를 쓰러트려야만 했다.

“취익, 주술사! 내게 주술을 걸어라!”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락사르의 외침에 주술사가 황급히 마력을 일으켰다.

외부의 개입.

반칙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로만 드미트리의 사병들은 조금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루나의 병사들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직계 병사들이 가만히 있으니 어떻게 개입할 수가 없었다.

화악-

마나가 퍼져 나갔다.

주술사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눈을 뒤집어 깠다.

“아아아아아아아-.”

기괴한 소리였다.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마력이 그락사르에게 흡수되었고, 그락사르의 눈빛이 새빨갛게 변했다.

버서커와는 다른 유형의 주술이었다.

주술사의 마력을 영구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힘을 부여하는.

최상위 주술의 발현에, 그락사르는 내부에서부터 마나가 폭발적으로 들끓음을 느꼈다.

탓.

콰르르르르릉.

땅을 박찼다.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그락사르의 얼굴에서 혈관들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오며, 살의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였다.

“취익, 죽어라!”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바람이 갈라졌다.

쇄도하는 움직임에 따라 땅이 들썩였다.

빨갛게 폭발하는 오라.

로만 드미트리를 단번에 베어 버리겠다는 듯, 그락사르는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워 일격에 담았다.

그 순간.

푸확.

피가 튀었다.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고개를 젖히며 뒤로 쓰러지는 그락사르.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빨갛게 타오르는 오라를 가르며 그대로 그락사르의 오른팔을 베어 버렸다.

* * *

끝났다.

압도적인 승리.

그락사르가 무너지는 모습에, 뒤에서 지켜보던 오크 중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취익, 그락사르 님을 지켜라!”

“취익, 공격하라!”

수만의 오크들.

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일부는 그락사르를 챙겼고, 나머지는 눈에 불을 켜며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살의를 분출했다.

장관이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도 대응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내가 처리하겠다.”

하지만 명령 한 번에.

병사들은 무기를 거두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오크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에게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오크들을 향해 검을 뻗었다.

‘천마검법 중반부 일초식.’

번뜩.

콰르르르르르릉.

오라가 전방을 휩쓸었다.

황급히 무기를 들어 막아서려던 오크들은 그대로 찢겨 나갔고, 오라를 사용하는 오크 전사들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계속해서 나아갔다.

방금까지 살아 있었던 오크들의 시체가 발밑에 밟혔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평온했다.

자신을 향해 들이닥치는 오크들을 마주하며, 그저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서걱.

푸확!

학살이 시작되었다.

선두에서 달려들던 오크들을 차례로 베어 버렸고, 필요하다면 오라를 분출해 공간을 휩쓸어 버렸다.

적들의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마치 죽음의 영역에 들어선 것처럼, 오크들은 로만 드미트리와 맞닥트리자마자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맞이했다.

머리가 날아가든, 가슴팍이 찢기든,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든.

단 한 마리의 오크도 유의미한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훅.

공격을 피했다.

정신없이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흘려보냈을 때는, 어김없이 가혹한 죽음이 오크들을 찾아갔다.

피가 튀었다.

계속해서 죽였다.

나아가는 길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오크들의 얼굴도 공포로 질려 갔다.

그들로서는 생소한 상황이었다.

그락사르가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부정한 것처럼, 이렇게 강한 인간은 그들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수백의 오크가 단 몇 초 만에 죽어 버렸다.

보통은 머릿수가 소수를 압도하는 법인데, 아무리 들이받아도 상처 하나 입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달려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해 내는 그락사르의 모습에, 자신들의 지도자를 지켜야만 했다.

“내가 말했지. 패배의 대가로 오크를 멸족시키겠다고.”

허언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오크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취익, 그만! 모두 물러나라!”

바닥에 쓰러진 그락사르.

그가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 * *

그락사르의 모습은 참담했다.

안색은 창백했고, 자꾸만 피를 토해 내는 모습은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락사르가 숨을 헐떡였다.

겨우 숨을 한번 삼켜 내고는,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보았다.

“취익, 그 녀석의 말대로였어. 끝없는 산맥 너머에는 괴물이 존재하고 있었어.”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점점.

호흡이 안정을 되찾아 갔다.

마치 회광반조(回光返照)가 일어나는 것처럼, 그락사르는 또렷한 정신으로 말을 이어갔다.

“취익, 몇 개월 전. 나를 찾아온 녀석이 있었다. 그 녀석은 아르카디아를 정벌하겠다는 내 계획을 알고 있었고, 내 모든 것을 바친다면 그만한 힘을 부여하겠다고 제안했었지. 취익, 내가 거절하자 그 녀석은 재밌는 말을 하더군. 끝없는 산맥 너머에는 괴물이 있다고.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후일 오크들이 아르카디아를 점령한다고 한들 끝없는 산맥 너머는 감히 넘보지 못하게 만들 괴물이.”

괴물.

그게 로만 드미트리였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하며 그 존재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취익, 나는 끝까지 거절했다. 그 녀석이 악마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내 존재를 팔아 치울 수 없었다.”

비틀.

몸을 일으켰다.

피가 쏟아졌다.

오른팔 부위는 휑했고, 고개를 치켜들었는데도 이전과 같은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웃었다.

죽음을 앞둔 지금, 그락사르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취익, 아르카디아의 정벌은 자의에 의한 선택이었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화가 없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우리가 벌인 일을 잔인하다고 말하겠지만, 우리로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 * *

인간과 같은 이족보행.

도구를 사용하고.

잡식을 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오크는, 분명히 근본은 다를지라도 인간과 비슷한 종족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비슷하다는 말은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크와 인간은 달랐다.

태생부터 괴력을 타고나는 것처럼,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였다.

그중.

오크들을 난관에 빠트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다산(多産)이었다.

인간은 8개월 이상을 배 속에 품어 한 명의 아이를 낳는다면, 오크는 3개월 만에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네다섯의 아이를 낳았다.

인간들이 간혹 쌍둥이를 낳는 것처럼. 두 배가 넘는 아이를 낳는 일도 있었다.

과거에 다산은 축복이었다.

하지만 아르카디아가 추위로 뒤덮이면서부터, 다산은 오크 종족의 발목을 붙잡는 저주가 되었다.

땅이 얼어붙고.

동물들이 죽어 나갔다.

먹을거리가 귀해지면서, 아이 오크들을 먹일 식량이 떨어졌다.

오크들은 변화가 필요했다.

태생적으로 다산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앞으로의 생명을 먹여 살릴 방법을 고민해야만 했다.

그락사르가 어렸을 때.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오크 종족이 아르카디아의 추위에 많이 적응한 상태였는데, 그는 매장(埋葬)이라는 전통이 있음을 들었다.

처음에 그의 부모는 그것이 병들고 늙은 오크들을 평안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목숨을 끊고 땅속에 묻음으로써, 현세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진실은 달랐다.

병들고 늙은 오크들.

그들은 식량만 축내는 존재였고, 오크들은 종족의 생존을 위해서 그들을 식량으로 삼았다.

충격적이었다.

오크들의 생존 방법은 너무나도 잔인했다.

병들고 늙어 가는 오크들은 자신들의 최후에 절망했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참담한 얼굴로 매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을 거절하는 존재는 없었다.

본인들 또한 매장을 통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렇게라도 종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락사르의 마음속에 욕망이 들끓었다.

저 멀리.

인간들은 저장고를 만들어 풍요롭게 산다고 들었다.

적은 숫자를 낳는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게 사는데, 오크들은 도저히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정벌을 꿈꾸었다.

같은 동족을 먹어 치울 바에는 다른 종족을 굴복시켜 그들을 식량으로 삼는 것이 어떨까.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러던 어느 날.

욕망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냥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는데, 그락사르를 낳은 어미가 아직 어린 동생들에게 물어뜯기고 있었다.

“취익, 아가야. 분노하지 마라. 이게, 우리의 운명이란다.”

어미의 선택이었다.

추위가 심해지고.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다.

매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영양실조가 걸려 죽어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어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미는 아이들에게 젖을 물렸다.

자신이 물어뜯기고 피가 튀는데도, 아직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게 옳은 일이라면서 그들의 행동을 부추겼다.

그날.

세상이 무너졌다.

그락사르는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신이 있다면.

오크들을 왜 이렇게 만들었던 말인가.

가혹한 추위와 다산이라는 저주로 인해, 어미가 죽어 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결심했다.

기존의 권력자들을 무너트리고.

권력을 쟁취했다.

그 누구의 의도도 아닌, 스스로가 그렇게 행하기를 바랐다.

악마의 계약은 거절했다.

종족의 생존을 위한 선택을, 더러운 계약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락사르는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보았다.

피로 물든 얼굴로 내려다보는 그는, 오크를 멸족시키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내였다.

공방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를 알았다.

“취익, 이 빌어먹을 악마야.”

하늘을 보았다.

설령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그락사르는, 오크가 이대로 멸족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내 모든 것을 가져가는 대신, 내게 힘을 다오. 내 종족을 지킬 수 있는 그런 강력한 힘을.”

그 순간.

공간이 일그러졌다.

비틀려지면서 무저갱(無底坑) 같은 구멍이 드러나더니, 그곳에서부터 보랏빛 기운이 울컥 쏟아졌다.

그리고.

그 기운이, 그락사르의 몸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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