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9화 (339/615)

339화 그락사르 (3)

기괴한 장면이었다.

보랏빛 기운에 뒤덮인 그락사르의 몸이 들썩이며, 보랏빛으로 변할수록 점점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떴다.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이 빨갛게 물들었고, 얼굴 곳곳에서 핏줄이 울긋불긋하게 도드라졌다.

엄청난 고통에 신음을 삼켜 냈다.

점점 확장되는 기운이 절단된 오른팔에 닿았을 때,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뒤엉키며 새로운 팔을 만들어 갔다.

일련의 과정.

위험해 보였다.

괴물이 탄생하는 그 과정을, 로만 드미트리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익숙한 힘이다.’

보랏빛 기운.

경험해 본 기억이 있었다.

셰피르를 상대했을 때, 그는 로만 드미트리를 보랏빛 공간으로 끌고 갔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했다.

인간의 세상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종류의 힘이었고, 그렇기에 크로노스 제국의 배후에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생각했다.

그 말인즉. 그락사르에게 힘을 부여한 존재는 크로노스 제국과 연관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샐러맨더 대륙 곳곳에 자신들의 마수를 뻗친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르카디아에서도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일부러 공격하지 않았다.

방관했다.

악마의 힘을 받아들인 그락사르가, 얼마나 강해지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알렉산드르는 드미트리와의 전쟁 이후 안식에 들어갔다. 대외적으로는 평화를 내세우며 휴전 협상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전쟁 포로 사건 때도.

크로노스 제국은 침묵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분노하며 전쟁을 언급하던 그들이,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나가길 바랐다.

그 이면에는.

분명히 음모가 있었다.

알렉산드르가 안식에 들어가고, 크로노스 제국의 계획을 방해하던 이사벨이 실종되고, 그락사르가 악마의 속삭임을 들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있었다.

드미트리의 정보력으로도 알 수 없는 진실이라면, 그락사르를 통해 그 일부라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만약.

그락사르가 일찍 악마의 유혹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루나 왕국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루나의 요새를 무너트리고 아르카디아를 완전히 정벌해 버렸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소규모로 상황을 해결할 수도 없었다.

크로노스 제국이 끝없는 산맥 너머에 드미트리를 공격할 세력을 형성하려는 의도였다면.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예상치도 못했던 존재들이 끝없는 산맥을 넘어와 드미트리를 위험에 빠트렸을 것이다.

크로노스는 건재했다.

몸을 웅크렸을 뿐.

언제고, 대륙 정벌의 야망을 다시 드러내고자 힘을 키웠다.

마침내.

“크아아아아악.”

그락사르가 괴성을 질렀다.

보랏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하는 순간, 그의 존재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팟.

콰르르르르르릉.

* * *

그락사르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더니, 분명히 잘려 나갔던 팔로 도끼를 그대로 휘둘렀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로만 드미트리가 밀렸다.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막았는데도 충격이 전달될 정도로, 그락사르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보였다.

“크악!”

콰앙!

콰콰콰쾅!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들어서 막으면 반대편 손을 휘둘렀고, 한 발 물러나자 곧바로 따라붙으며 도끼를 연속해서 내리찍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몸이 들썩였다.

정상적으로 방어하는데도 그락사르의 파괴력은 그 이상의 충격을 부여했다.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로서는, 로만 드미트리가 언제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팟.

콰르르르르릉.

그락사르가 높이 뛰어올랐다.

거대한 도끼를 두 손으로 치켜들자, 붉은빛 기운과 보랏빛 기운이 뒤얽히며 엄청난 존재감을 풍겼다.

콰앙!

콰콰콰콰콰쾅!

사람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도끼를 내리찍는 순간, 아레스와 같은 고수들조차도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아레스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상대였건만, 지금 로만 드미트리를 밀어붙이는 존재는 완전히 달랐다.

2배? 3배? 단순히 숫자로는 그락사르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파괴적인 기운은, 로만 드미트리의 오라를 상대로도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였다.

콰직.

바닥이 움푹 파였다.

이미 주변으로 퍼진 기운으로 바닥에 쌓인 눈은 날아간 상태였고, 오라의 폭풍에 눈보라도 둘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했다.

천외(天外)의 싸움이었다. 그락사르의 강력함에 루나의 병사들은 말을 잃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없었다면, 루나의 힘으로 저 괴물을 쓰러트릴 방법은 없었다.

“……너만 죽이면…… 우리는 산다.”

탁한 음성이었다.

오크 특유의 숨소리도.

평소 그락사르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탁하게 일그러진 목소리는 무저갱 바닥에서나 들릴 법했고, 자아를 잃은 상태에서도 오크들을 살리겠다는 강한 열망을 보였다.

이대로 죽어도 좋았다.

악마가 자신의 영혼을 앗아 가 무슨 일을 벌이든, 그락사르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오크들이 동족의 육신으로 생명을 연명하지 않는 것이었다.

빠악!

왼손을 휘둘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막아 내자, 오른팔로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콰앙!

콰콰콰쾅!

필살(必殺).

반드시 죽일 것이다.

열망이 들끓었다.

일반인들의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도 없을 만큼, 공간을 빠르게 쇄도하며 로만 드미트리를 몰아붙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렇게 당할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악마의 힘을 빌려 수배 강해졌다고 할지라도, 일격에 팔을 날려 버렸던 로만 드미트리의 무력은 그락사르를 완전히 압도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락사르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양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도 반격할 기회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이상함을 느낄 만큼 수비적으로 대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락사르가 다시 한번 오라를 일으켜 공격을 감행하려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번뜩였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크악.”

그락사르가 밀렸다.

힘과 힘의 대결.

보랏빛 기운을 폭발시켰건만, 로만 드미트리의 일격에 그가 명백하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이런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

경악으로 물든 시선에, 로만 드미트리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락사르를 보았다.

“이것이 네 최선인가.”

툭 내뱉은 말.

그것이, 사람들에게 진실을 보여 주었다.

* * *

의도적이었다.

일부러 수비적으로 움직였고, 그락사르의 전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강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락사르는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괴물이었고, 이와 같은 괴물들이 한둘이 아니라면 드미트리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크로노스의 야망은 그만한 힘이 뒷받침되었다.

오델리아의 수도를 단번에 날려 버렸던 마법사와 이와 같은 괴물들이 동반된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그들 모두를 막아 내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순간.

웃음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 상황에, 진심으로 즐겁다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나.”

그락사르는 답하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기회를 살필 뿐, 틈이 나면 언제든지 달려들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발이 땅바닥에 붙은 것처럼, 상대에게서 틈이 보이지 않았다.

“더는 적수(敵手)가 존재하지 않는 삶이다.”

전생.

백중혁은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천의 경지도 아니고 겨우 지의 경지에 달성한 목표였고, 이후 백중혁의 삶은 너무나도 따분했다.

아무리 강해져도 힘을 시험할 상대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은 점점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데, 그 힘의 의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백중혁의 악명이 사람들을 짓눌렀다.

무림에서 대단한 명성을 떨치던 존재들도, 백중혁의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었다.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어렸을 때의 백중혁은 그저 군림하는 것만을 원했다면.

전생과 뒤섞인 현생의 로만 드미트리는, 군림하는 과정이 최대한 험난하고 적수가 많기를 바랐다.

그래야.

의미가 있었다.

하늘의 경지에 오르고도, 적수가 없다는 그 고독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르가 어떤 존재이든, 그의 배후에 누가 있든.

이 정도가 끝이 아니기를 바랐다.

전생의 경지도 오르지 못한 자신조차도 상대할 적수가 없다는 것은, 전생보다도 더한 무력감을 부여할 것이다.

아직 30대도 되지 않았다. 살아갈 날이 많았기에 투쟁심이 속에서 들끓었다.

그리고 지금.

확신이 들었다.

크로노스의 배후.

그는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기운을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그락사르를 이렇게 만들 정도면,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가 분명했다.

그러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직은 자신이 쓰러트려야 하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금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은,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나는 너희가 더 많은 것을 준비하기를 바란다. 내가 나의 전력을, 나의 모든 것을 분출할 수 있도록.”

슥.

검을 들었다.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락사르를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천마신공의 힘을 끌어올렸다.

“보아라. 이것이, 앞으로 너희가 감당해야 할 힘이다.”

탁.

천마군림보, 여덟 번째 걸음.

오라가 폭발했다.

단전에서부터 분출하는 오라가, 마치 활화산이라도 폭발하는 것처럼 엄청난 폭발력을 보였다.

‘천마검법 후반부 이초식.’

번뜩.

단 일격.

그락사르의 육체가.

그대로 오라의 폭풍에 휩싸였다.

* * *

소멸(消滅).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

눈과 귀가 멀었다.

오라의 폭풍에 그락사르의 육체가 찢겨 나갔고, 멀어 버린 시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그의 존재를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가 알았다. 눈앞에 존재하고 있던 그가 죽어 버렸다는 것을.

회색 황무지 역사상 최고의 오크가,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넋을 잃었다.

아직도 오크들의 숫자는 많았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을 확인한 지금, 오크들은 무기를 떨구며 백기를 내걸 수밖에 없었다.

“취익, 사, 살려 주십시오!”

“취익, 앞으로 드미트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제발, 저희를 멸족시키지만 말아 주십시오.”

투투툭.

다들 무기를 버렸다.

전의를 상실했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그들은 전쟁이 끝났음을 받아들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너희에게도 너희만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아르카디아의 추위에, 오크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종족을 희생시키는 방법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패배를 고려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서는 안 되었다. 너희가 인간들을 식량으로 취급하며 그들의 살점을 발라 먹은 그 순간부터, 아르카디아의 인간들과 너희는 한 하늘 아래에서 살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취익, 제, 제발……!”

“취익,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공포가 번졌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로만 드미트리의 마음을 되돌리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임을 알았다.

하지만.

“특별한 악감정은 없다. 다만, 너희와 같은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선례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

서걱.

푸확.

목숨을 구걸하던 오크의 머리를 날렸다.

피가 튀었다.

공포와 당황으로 얼룩진 시선이 로만 드미트리를 향하는 순간,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모조리 죽여라.”

멸족.

단호한 명령에, 학살이 시작되었다.

* * *

그 시각.

케이든과 자이로는 걸음을 서둘렀다.

로만 드미트리가 수만의 오크를 상대한다는 계획에, 그들은 가만히 결과를 기다릴 수 없었다.

‘나로 인한 결과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그 책임을 모두 떠안도록 둘 수는 없다. 오크들을 상대하다 전장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루나를 위해서 죽을 것이다.’

자이로였다.

몸은 아직 성치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걸음을 독촉했다.

걸을 때마다 몸이 비틀거렸다.

자이로의 육체는 제발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라며 비명을 질렀지만, 독기로 차오른 눈빛은 이를 악물며 꾸역꾸역 고통을 참아 냈다.

아직도 머릿속에 그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설인들과 연합하여 오크들을 함정으로 몰아넣었을 때, 뒤로 나타난 그락사르의 존재는 엄청난 절망감을 선사했다.

그때.

병사들은 자이로를 보았다.

눈앞의 현실을 해결해 주길 바랐지만, 자이로는 그들의 목숨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열심히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보통 폭설이 내리는 날에는 야간 행군을 자제하는데, 일부 낙오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잠을 줄여 가면서까지 엘프들의 영역으로 향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과연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몇 번 교전을 치르고, 서로 소강상태로 경계하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수만 대 수천.

단시간에 끝날 전쟁이 아니었다.

케이든은 로만 드미트리를 믿으라고 말했지만, 자이로의 죄책감은 안일한 생각을 허락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엘프들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검을 움켜쥐었다.

전장에 들어서면 힘을 보탤 생각이었는데, 이동할수록 자이로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눈앞에.

울퉁불퉁한 설원이 펼쳐졌다.

설원의 굴곡은 쌓인 눈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시체로 인한 광경이었다.

시야를 가득 메운 시체들.

자이로는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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