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그락사르 (4)
뽀득.
눈 위를 밟았다.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발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차갑게 얼어붙은 무언가가 딱딱하게 발이 파고드는 것을 막았다.
시체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래도 발을 내디딜 공간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눈 위로 튀어나온 신체 부위들은 쌓이고 쌓인 시체 위에 존재하는 일부일 뿐이었다.
엘프들의 영역으로 들어갈수록 자이로를 비롯한 병사들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였다.
주변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쌓인 시체의 숫자가 수천의 규모가 아니라 수만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마른침을 삼켰다.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의 군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패배했다면, 이 눈 밑에 그들의 시체가 쌓여 있을지도 몰랐다.
자이로는 앞으로 나아가며 시체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폈다.
처음에는 수많은 숫자에 압도되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시체가 인간인지 오크인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인간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툭 튀어나온 팔과 다리는 오크 특유의 피부 색깔을 보였고, 눈 위로 뒤덮여 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는 들창코를 드러내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시야에 수백의 오크가 확인되면 겨우 한 명 정도 인간의 시체가 보이는 상황에, 자이로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일었다.
“설마.”
확실했다.
이 자리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군대가 오크들을 도륙했다.
일방적인 승부에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차곡차곡 쌓인 시체들 위로 눈이 내리면서 지금과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눈보라를 뚫고 이동하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혹시라도 자신으로 인해 루나 왕국이 멸망의 길을 걷는다면, 오크들 몇 놈을 죽이고 죽는 것만으로는 루나의 사람들에게 사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속이 새까매졌다.
수도 없이 후회했다.
자신의 멍청함을, 자신의 섣부름을, 그리고 자신의 무능력함을.
툭.
무릎을 꿇었다.
흐르는 눈물에 얼굴을 감싸며, 옆으로 다가온 사내에게 물었다.
“……케이든. 로만 드미트리 님은 대체 어떤 사람이지?”
툭.
걸음을 멈추었다.
케이든은 자이로를 내려다보며, 본인이 경험했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해 주었다.
“선이 명확한 사람이야. 자신의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며, 본인이 행하는 일에 조금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아. 루나는 드미트리의 속국이 되기로 했기에 그의 사람으로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함락당했던 루나의 요새는 겨우 30명의 힘으로 탈환하는 것에 성공했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기적이었다.
루나는 기적을 만났다.
“그런 사람이 앞으로 우리가 모실 분이야.”
자이로가 고개를 떨구었다.
기뻤다.
루나에 아직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꽉 막힌 것만 같았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 기도를 드렸다.
두 손을 모으고.
자이로는 한참 동안, 시체가 널브러진 설원을 바라보며 그렇게 수도 없이 감사한 마음을 말했다.
그는 더는.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감사함을 표현할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가 유일했다.
* * *
전쟁이 끝났을 그때.
로만 드미트리와 그의 수하들은 피로 흠뻑 물들었다.
궁지에 몰린 오크들의 반항은 격렬했으나, 지휘관을 잃은 그들에게 살아남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크리스.”
“예.”
“오크들의 소재를 파악해, 나머지 오크들도 모조리 몰살시켜라. 이번 전쟁은 후환(後患)을 남겨서는 안 된다. 아르카디아의 사람들이 오크를 저주하는 것처럼, 오크의 가족들에게도 우리는 악마로 남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잔인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어쭙잖은 자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락사르는 오크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생명체를 죽였다.
일부는 아예 멸족했고, 루나 왕국의 사람들은 가족들이 잡아먹히는 끔찍한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발작을 일으켰다.
그것이 전쟁의 실체였다.
그락사르는 오크들에게 종족을 구원할 지도자였을지 몰라도,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잔인한 악마였다.
패자는 죽음으로 책임을 받아들인다면.
승자는 마냥 기뻐할 것이 아니라, 후환의 싹을 없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설령.
힘없는 존재들을 죽일지라도.
그들이 커서, 자신의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때였다.
일단의 존재들이 로만 드미트리에게 다가왔다.
“엘프 일족의 테르샤, 은인에게 인사드립니다.”
“은인에게 인사드립니다.”
새하얀 피부와 뾰족한 귀.
엘프들이었다.
자신을 테르샤라고 밝힌 금발의 미남자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은인을 향한 예의를 갖추었다.
“은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엘프들은 모두 죽었을 겁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의 목적이 부합했을 뿐입니다. 루나 왕국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사람을 보내 엘프들을 초대하는 자리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오크들로 인해 아르카디아의 질서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각 종족의 대표들을 초대해,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지 논의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그 자리에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로만 드미트리도 예를 갖추었다.
루나와는 달리.
엘프는 드미트리의 소속이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이유가 무엇이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테르샤는 조심스럽게 목적을 말했다.
“사실 오크들이 처음 전쟁을 시작했을 때. 저희는 세계수의 지혜를 빌려 앞으로 벌어질 미래의 일부를 확인했습니다. 수많은 이종족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한 인간이 나타나 오크들을 도륙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끝까지 세계수의 영역을 지켰습니다. 예언의 인간이 나타나, 저희를 도와주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이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락사르가 사용한 힘. 그것은 세상의 근간을 뒤흔드는 매우 위험한 힘입니다. 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마더(mother) 엘프님이 따로 만나 뵙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악마의 힘.
마더 엘프.
필요한 정보들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거두며, 테르샤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저도 마침,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 * *
엘프는 보통 늙지 않는다.
죽는 그 순간까지 20대 초반의 외모를 유지하는데, 마더 엘프는 특이하게도 노인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분위기를 풍겼다.
차분하고 온화한 눈빛의 그녀는, 로만 드미트리와 마주하는 상황에 본론을 말했다.
“혹시 마계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천계, 마계, 지상계. 세상을 구성하는 세 개의 차원 중 하나로서, 악마들이 사는 세상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마계는 악마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주신의 법칙에 따라 천계와 마계, 지상계는 서로를 간섭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전, 분리되어 왔던 공간에 균열이 생겨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세하게 생겨난 차원의 균열을 통해 세상의 균형을 어그러트리는 존재가 샐러맨더 대륙에 떨어졌습니다. 그 존재로 인해 균열은 메워질 수 없었고, 차원의 틈으로부터 비롯되는 한기가 아르카디아 대륙을 얼어붙게 했습니다.”
익숙한 이야기였다.
차원의 미아.
알렉산드르를 의미했다.
무림에서 살았어야 할 그가 샐러맨더 대륙에 떨어진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모르는 재앙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존재로 인해 차원의 균열은 더욱 심해졌고, 지금은 차원을 분리하던 벽이 매우 약해진 상태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그락사르가 사용한 힘입니다. 보랏빛을 나타내는 마계의 힘은 지상계에는 발현되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그락사르는 마계의 힘을 받아들여 악마로 변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음 미래를 보았을 때.
마더 엘프는 경악했다.
단 한 번의 변화였지만, 그러한 선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상계를 재앙에 빠트릴 전조였다.
“마계의 악마들이 지상계를 노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직 마계의 힘을 동화시키는 정도의 영향력을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더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 세상의 균형을 어그러트리는 존재. 차원의 미아를 한시라도 빨리 처리해야만 합니다. 그가 존재하는 한, 언젠가는 차원의 벽이 붕괴되어 마계의 악마들이 지상계에 들이닥칠 겁니다. 그락사르가 발현한 힘은 그들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마계의 왕은 신(神)의 반열에 들어선 존재고, 그의 밑에는 그락사르와 같은 수족들이 수도 없이 존재합니다. 주신의 법칙으로 인해 지금은 그들이 지상계에서 온전한 힘을 발현하지 못하지만. 완벽한 강림(降臨)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때는 마계의 침공을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크로노스의 배후.
그것의 진실이었다.
그락사르가 악마의 힘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알렉산드르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마계와 손을 잡았다.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이해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보랏빛 공간.
그리고, 크로노스가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휴전을 선언하고 무엇을 노리는지를.
‘아마도 차원의 벽이 약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마더 엘프의 말대로 그락사르가 마계의 왕을 따르는 수족에 불과한 수준이라면.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알렉산드르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이유는, 애초에 전제가 인간의 수준으로 논할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알렉산드르가 차원의 균열을 부추기는 존재라면.
로만 드미트리 자신은.
어떤 존재일까.
김판석이 차원의 균열을 넘어 알렉산드르가 되었던 것처럼, 백중혁 또한 로만 드미트리가 되었다.
‘내가 이 세상에 로만 드미트리로서 존재하는 것은 우연일 수도, 필연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스스로의 목숨을 끊지 않는 이상 마더 엘프가 걱정하는 상황은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웃겼다.
알렉산드르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애초에, 마계라는 세상을 확인하면서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무림의 인간들은 지의 경지조차 감당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천의 경지를 발현할 기회가 없었지.’
물은 엎질러졌다.
적들의 정체를 알았다면.
지금부터는 그들을 쓰러트릴 방법을 고민할 차례였다.
적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마더 엘프님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끼익.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보는 충분히 얻었다.
“그들이 제 앞을 가로막는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 * *
마더 엘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진실을 말할 뿐이고, 이미 마계의 계획은 막을 수 없을 만큼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은 단순히 군림하기를 바랐다면.
지금부터는 크로노스 제국을 넘어, 그 배후와의 싸움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괜찮은 수확이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차이는 컸다.
알렉산드르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분명히 마계를 등에 업고 나타날 것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계획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드미트리의 영역을 지키고 절대자로서 군림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어떠한 상황이 벌어진다고 한들, 드미트리의 철옹성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걸음을 옮겼다.
이만 엘프들의 영역을 떠나려고 하는데, 테르샤가 다가와 말했다.
“마더 엘프님이 은인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세계수의 지혜를 빌려드리겠습니다. 세계수와 교감한다면, 로만 드미트리 님이 바라는 바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먼 미래일지, 오래된 과거일지, 아니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수는 분명히 엘프들의 영역을 지켜준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필요한 정보를 말해 줄 것입니다.”
“세계수는 마더 엘프님만이 만질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엘프들을 구해 준, 그리고 아르카디아의 영웅인 로만 드미트리 님은 예외입니다.”
좋은 기회였다.
세계수.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어떻게 나무 따위가, 이 세상의 근간(根幹)이라고 불리는지를 말이다.
테르샤를 따라갔다.
이윽고.
로만 드미트리의 앞에, 시야를 가득 메울 만큼의 거대한 나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컸다.
전생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크기였고, 거대한 나무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세계수는 시들어서 상당히 앙상한 모습을 보였다.
과거에는 생명력이 넘치는 빛깔을 보이며 엘프들의 영역을 수호해 주었다면, 지금은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만 있었다.
사람들의 말처럼.
세계수는 죽어 가고 있었다.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는, 이 세상의 미래를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세계수를 향해 다가갔다.
테르샤가 말하길.
세계수와의 공감을 위해서는, 손을 갖다 대고 의지를 집중하라고 했다.
툭.
나무에 손을 댔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차분하게 때를 기다렸다.
의지를 집중하며, 단전에서부터 일어나는 기운을 세계수와 교감시켰다.
그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화마의 덩어리.
그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열기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화륵.
화르르르르르르륵.
폭발하는 불길!
강력한 화염이, 그대로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