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1화 (341/615)

341화 그락사르 (5)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는 불길이 세계수를 휘어 감는 모습에, 테르샤는 화들짝 놀라며 말리려고 했다.

그런데.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이상했다.

“……이게 무슨.”

화륵.

화르르르르륵.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테르샤는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몸이 녹아 버릴 것만 같은 열기를 느꼈는데, 로만 드미트리와 세계수는 불에 타오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였다.

눈을 수차례 깜빡였다.

분명히 불길 한복판에 존재하면서도 뜨거움을 느끼지도, 그렇다고 어디 한 군데 타들어 가는 모습도 없었다.

비현실적이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상황에, 테르샤는 넋을 잃고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뚝, 뚝.

세계수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뒤늦게 고개를 들어 윗부분을 바라보자, 하얗게 얼어 있던 부분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며 물방울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엘프들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세계수는 목(木)의 기운을 기반으로 하는 실체를 가진 존재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아는 일반적인 현상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수가 얼어붙은 이유는 단순히 추위 때문만이 아니다.

차원의 균열로부터 일어나는 한기가 생명력을 갉아먹었고, 그로 인해 세계수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고로.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에 타오르지 않는 것도, 불이 얼어붙은 부위를 녹여 내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점차 세계수가 본래의 빛깔을 되찾아가자, 그에 동화되듯 주변이 변했다.

사르르르.

빛이 퍼져 나갔다.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푸르른 잎사귀가 자라났고, 눈으로 수북했던 땅이 녹아내리면서 땅 밑에 숨어 있던 잔디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세차게 불던 바람도 줄었다. 펑펑 내리던 눈도, 엘프들의 영역에서만큼은 잦아드는 모습을 보였다.

테르샤로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수의 영향력이었다.

겨우 일부의 생명력을 되찾았을 뿐인데, 세계수로부터 비롯되는 힘이 주변을 변화시켰다.

말릴 수 없었다.

아니, 말릴 이유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엘프들이 간절하게 바라던 세계수의 재생을 이루어 내고 있었다.

그 어떠한 신탁(神託)도, 그 어떠한 예언도. 이러한 상황을 말해 준 적은 없었다.

눈앞에 발현되는 기적에, 테르샤가 할 수 있는 일은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 순간.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로만 드미트리의 의식이, 화염 속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 * *

이상한 느낌이었다.

어느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로만 드미트리는 의식만 존재한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을 보고하라.”

어두컴컴한 공간.

상석에 앉은 존재가 말했다.

그 앞에는 두 명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어둠으로 인해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이 먼저 나섰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건을 기점으로, 비에토 공작을 비롯한 과거의 권력자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발할라의 낭만입니다. 한때는 전사로서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발할라가 대놓고 비겁한 행위를 일삼는 상황에, 비에토 공작이 전면으로 나서 사람들을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대중은 그들의 편입니다. 조금만 더 상황을 부추긴다면, 내란으로 번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의 말처럼.

발할라는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발할라 전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이, 발할라 황제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발할라 황제는 이 상황을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병력을 집결시키고 힘으로 그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발할라의 힘은 대부분 황제의 통제를 따릅니다. 그가 반란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발할라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맞이할 것입니다.”

“푸핫.”

상석의 존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었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살짝 드러난 그의 얼굴은, 로만 드미트리가 기억하는 ‘알렉산드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계획은 단 한 번의 어긋남도 없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드미트리로 인한 변수는, 우리가 바라는 바를 이루었을 때 변수라고 표현할 가치도 없는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오래전부터 계획하던 일을 앞당길 기회를 얻었지. 사람들을 선동하라. 사람들을 자극하라. 발할라가 전란에 휩싸이는 순간, 우리가 바라던 순간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끼익.

몸을 기댔다.

알렉산드르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찌지지직.

상황이 변했다.

이번에는 다른 공간이었다.

처참한 몰골의 한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더니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크윽.”

옆구리에 피가 흥건했다.

손을 갖다 대 신성력을 일으키자, 마치 짐승에게 당한 것 같은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녀는 이사벨이었다.

그녀의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여왕 폐하. 이만 루나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크로노스의 악귀들은 이미 저희의 계획을 간파했습니다. 병사들을 모두 잃은 시점에서, 더 싸우는 것은 여왕 폐하를 위험에 빠트릴 뿐입니다. 제발, 간곡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말을 한 번만 따라 주십시오.”

툭.

무릎을 꿇었다.

루나의 왕실기사단장.

레오가 절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건 안 돼.”

고개를 저었다.

둘만 있기에.

이사벨은, 조금은 편한 모습을 보였다.

“레오. 난 태어났을 때부터 삶의 목적이 정해져 있었어. 신탁을 받은 존재이기에, 항상 신의 뜻을 행하며 살았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분의 뜻을 배반할 수 있겠어. 나를 믿고 따라 준 사람들을 모두 사지로 밀어 넣고, 나 혼자만의 안위를 챙기겠다고 이곳에서 도망칠 수는 없어.”

목소리가 떨렸다.

크로노스의 악귀들.

그들에 의해 병사들이 죽었다.

이사벨이 선봉에 서고 축복을 일으켰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들로 인해 병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때의 상황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병사들은 사지가 찢겨 나가는 순간에도 신의 이름을 외치며 무기를 박아 넣었지만,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이사벨은 알았다.

적들은 무한하다.

인간은 한계가 있지만, 적들에게는 한계가 없었다.

이사벨이 몸을 일으켰다.

신성력으로 겉은 회복했을지 몰라도, 고된 여정으로 그녀의 몸은 이곳저곳에서 고통을 호소했다.

표정이 바뀌었다.

이사벨이, 평소와는 다른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루나의 여왕으로서, 신의 뜻을 받드는 사람으로서 타고난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왕실 기사단장. 너는 이만 루나로 돌아가라. 가혹한 운명을 짊어지는 것은 나 하나로도 족하다.”

걸음을 옮겼다.

검을 끌었다.

어둠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에, 레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절망스러웠다.

이사벨과 레오.

둘 다 눈앞에 닥친 미래를 모르지 않았다.

병사들 또한 크로노스의 악귀들과 싸우는 일이 죽음으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누구도 현실을 말하며 도망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여왕 이사벨과 그녀를 따르는 존재들.

신을 위해 희생하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은, 죽을지라도 신의 뜻을 행하고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레오는 달랐다.

그는 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사벨을 따랐다.

신을 원망했다.

신의 의무를 행할수록.

진실에 다가갈수록.

이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인간의 수명이 백 년인 것에 감사하며, 제발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절망이 찾아오지 않기를 비는 것이 오히려 현명할 수도 있었다.

레오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크로노스의 악귀들과 싸우며 현실에 수차례 굴복했지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이사벨의 뒷모습에 그는 검을 들었다.

‘신이시여. 저희를 제발 구원하소서.’

걸음을 옮겼다.

이사벨을 따라.

그 또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자신은 이 선택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 * *

눈을 떴다.

세계수와의 연결 고리가 끊겼다.

묘한 기분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일 수도, 현재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는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뒤얽혔다.

‘알렉산드르와 이사벨이라.’

첫 번째.

알렉산드르의 대화로 그가 발할라의 분란을 유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발할라는 크로노스 제국과 내통했다.

하지만 그들도 거대한 세력을 갖춘 제국이기에, 크로노스로서는 발할라가 내란으로 자멸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였다.

그렇기에 비에토 공작의 반란을 전면에 내세웠다.

카이로의 중앙 정부, 헥토르의 흉작, 레드포드의 론돈 백작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각 나라를 안에서 갉아먹었던 크로노스가, 이번에는 발할라 제국을 목표로 삼았다.

만약.

발할라가 크나큰 타격을 입는다면 대륙의 균형이 무너질 것이다.

그들이 중립을 표방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존재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현재 대륙은 삼강의 구도다.

크로노스와 발할라,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왕국 연합.

괜한 전쟁으로 두 세력이 서로를 물고 뜯으면, 나머지 한 세력이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두 번째.

이사벨의 실종은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가 어떠한 진실에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사벨은 크로노스가 계획하고 있는 모종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아마도 그것은 마더 엘프의 말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마더 엘프는 그락사르의 사례로 마계와의 연관성을 말했기에, 이것에 대해서는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이사벨의 행적을 따라가면 진실의 일부를 알 수 있겠지.’

할 일이 많았다.

드미트리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뒤늦게 주변의 환경이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의식이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그는 자신으로 인해 어떠한 변화가 생겼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자.

“아르카디아의 구원자시여. 저희 엘프 일족의 충성을 받아 주십시오!”

“충성을 받아 주십시오!”

수천의 엘프들.

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 * *

로만 드미트리가 세계수와 연결된 그때.

엘프들은 난리가 났다.

세계수로 인한 엄청난 변화에, 그들이 일제히 몰려들며 테르샤에게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은인께서 세계수에 손을 갖다 대는 순간, 그로부터 엄청난 불길이 일어나더니 세계수가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은인으로 인한 변화라는 것입니다.”

경악했다.

세계수의 재생.

엘프들이 간절하게 바라던 염원이었다.

그들이 어떻게든 이루고자 했던 일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람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이윽고.

마더 엘프가 도착했다.

그녀는 불길에 타오르는 세계수와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더니,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화마의 불길을 통제하다니.”

분명했다.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는 불길.

바로 화마(火魔)의 덩어리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지하 세계에서 드워프들을 만났고, 그들을 이끄는 갈색 바위는 화마의 덩어리가 세계수를 녹일 실마리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열기에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화마의 덩어리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는데, 그 강렬한 힘이 지금 눈앞에서 발현되었다.

문득.

마더 엘프는 세계수와 연결되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처음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 그녀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아아.”

전율이 일었다.

확실했다.

오크들을 도륙하던 존재.

그는 구원자(救援者)였다.

단순히 오크들을 무찌르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을 해낼 존재.

상황이 변했다.

마더 엘프가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모든 엘프들은 들어라! 우리의 은인이신 로만 드미트리 님은, 잔악한 오크들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고 세계수마저 소생시켰다. 그분은 스스로가 이 세상을 구원할 존재임을 증명해 냈다. 너희들의 어머니인 나 가이아르는,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엘프들의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목소리를 높였다.

마더 엘프의 말에, 엘프들이 몰려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르라! 그분을 위해 헌신하라! 그분의 뜻이, 우리가 바라는 미래일 것이다!”

경배했다.

모두가 한뜻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렀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느끼기에는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해가 저물고 다시 떠오르며 세상을 밝혔다.

그렇게 다음 날이 돼서야.

로만 드미트리가 눈을 떴다.

그 순간.

마더 엘프가 먼저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아르카디아의 구원자시여. 저희 엘프 일족의 충성을 받아 주십시오!”

“충성을 받아 주십시오!”

그녀를 따라 차례로 경배하는 수천의 엘프들.

순결(純潔)의 일족.

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뜻도 따르지 않는 존재들이, 한 인간을 향해 충성을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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