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그락사르 (6)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생기를 되찾은 세계수.
그리고 마더 엘프를 비롯해 충성을 맹세하는 엘프들.
찰나의 시간에 뒤바뀐 광경에, 로만 드미트리는 갈색 바위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약 수십 년 전. 우리는 지하 깊숙이에서 화마의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을 불태울 수 있을 만큼 위험한 힘이지만, 역으로 잘만 활용한다면 세계수를 녹일 유일한 희망이기도 합니다.”
얼추 상황이 그려졌다.
세계수와 정신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화마의 불길이 일어났을 테고, 갈색 바위의 말처럼 통제되는 불길은 얼어붙은 세계수를 녹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엘프들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수를 신처럼 떠받드는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충성 맹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엘프들은 활용성이 높은 종족이나, 로만 드미트리는 명확한 대가를 지급하는 관계를 선호했다.
“나는 대가 없는 충성을 바라지 않는다. 루나는 내게 국가의 안위를 보장받길 바랐고, 그들과의 거래를 이행하기 위해 아르카디아로 왔다. 너희는 충성의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
태도가 바뀌었다.
상대가 고개를 숙인 순간부터.
존대할 이유는 없었다.
상대가 마더 엘프라고 한들, 로만 드미트리는 떠받들어지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마더 엘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얼굴을 숙인 상태로, 목소리를 높여 진심을 말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화마의 불길이 세계수를 되살린 그 순간부터, 아르카디아는 회생(回生)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이 기회를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차원 너머로 악의 무리가 세상에 들이닥친다고 한들, 로만 드미트리 님께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면 저희는 위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맥락의 말이었다.
루나 왕국이 말했던 것처럼, 엘프 일족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서 안전을 보장받길 바랐다.
“이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들은 반드시 로만 드미트리 님과 맞닥트릴 수밖에 없습니다. 강해지십시오. 엘프 일족이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릴 테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세력을 갖추십시오. 그 하나만 약속해 주신다면, 이 가이아르는 목숨을 바쳐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헌신할 것입니다.”
“헌신할 것입니다.”
다들 고개를 숙였다.
마더 엘프는 엘프 전체를 대변했다.
세계수가 살아나고, 마더 엘프가 지지하는 상황에, 일반 엘프들은 하나가 되는 입장을 보였다.
그중에는 테르샤도 있었다.
간단한 문제였다.
안전을 바라기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약육강식의 삶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형태의 거래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약속하지. 너희는 충성의 대가로, 앞으로 드미트리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엘프 일족.
그들이, 드미트리에 완전히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 * *
상황이 정리되었다.
이만 엘프들의 영역을 떠나려는데, 뒤늦은 손님이 찾아왔다.
“신(臣) 자이로. 루나 왕국의 영웅을 뵙습니다!”
쿵.
익숙한 광경이었다.
마더 엘프와 엘프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자이로는 로만 드미트리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루나 왕국과 영웅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은, 모두 제가 멍청한 탓입니다. 분명히 기다리라 말했는데도 병력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고, 루나 왕국의 병력을 모두 잃었습니다. 한심하고 어리석은 인간 하나가 저지른 실수로 모두가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웅께서 저희를 구원해 주지 않았다면, 루나는 그대로 멸망했을 것입니다.”
절절한 외침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루나의 요새를 되찾고, 오크들을 토벌했다.
엘프들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시체를 밟으며, 그와 만날 순간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루나의 영웅.
보자마자 알았다.
홀로 도드라지는 존재감을 보이는 사내의 모습에, 자이로는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었다면 루나는 끝났을 것이다.
자신의 실수가 그로 인해 모두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고도 감사한 마음을 모두 전달할 수 없었다.
울먹였다.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이, 자이로의 진심을 대변했다.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보잘것없는 저라도 영웅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죽으라고 하면 죽겠습니다. 뛰어내리라고 하면 낭떠러지에 몸을 날리겠습니다. 루나의 병사를 모두 죽게 만든 날. 자이로라는 사람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앞으로는 사사로운 감정을 위해서가 아닌, 루나를 위해.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그 뒤로.
루나의 병사들도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인 케이든도 있었다.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재밌는 상황이었다.
불과 조금 전에 엘프들이 충성을 맹세했는데, 그것과 똑같은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자이로는 어리석은 존재였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드미트리의 사람이었다면, 패배의 책임에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때의 자이로는 어리석었을 뿐, 루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드미트리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그 이전의 일을 가져와 그를 처벌할 이유는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케이든. 우리의 계약 조건이 무엇이었지?”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람들 틈에서 같이 소리치던 케이든은,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루나를 도와주는 대신, 드미트리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래. 드미트리는 계약을 이행했다.”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그 순간.
“일어나라. 너희는 이미 드미트리의 사람들이다.”
* * *
며칠 뒤.
종족 회의는 일찍 결론이 났다.
사전에 드미트리를 제외하고 회의를 진행했는데, 두 존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상황을 주도했다.
그중 하나는 자이로였다.
“이건 생각할 것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락사르가 압도적인 기세로 몰아붙일 때, 로만 드미트리 님은 겨우 30명의 병력으로 상황을 역전시켰습니다. 그런 대단한 일을 해내고도 그분이 이 척박한 땅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은혜를 아는 존재라면, 적어도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그분에게 감사한 마음을 보답해야만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테르샤였다.
“저도 자이로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은 그락사르를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세계수를 되살리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마더 엘프님은 그분을 구원자라고 표현하였고,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던 제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세계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세계수를 살려 낸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아갈 의무가 있습니다.”
둘의 주장은 강력했다.
결국.
뜻이 모였다.
사실 그들이 주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르카디아의 위기를 해결해 준 로만 드미트리는 충분히 충성을 맹세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인간과 엘프를 제외한 다른 종족들.
설인과 수인, 트롤 등등, 전쟁통에서 살아남은 그들은 모두 뜻을 합쳐서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했다.
충성을 맹세하는 각 종족의 대표들을 내려다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앞으로의 미래를 말했다.
“아르카디아의 최우선 과제는 자력으로 생존하는 것이다. 생명력을 되찾은 엘프들의 영역에 경작(耕作)을 진행하고, 그에 관한 노동은 각 종족이 분담할 것이다. 아르카디아 내에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는 드미트리가 도와주겠다. 세계수의 힘을 빌려 아르카디아와 드미트리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워프 게이트를 설치할 것이고, 아르카디아는 기본적인 지원을 떠나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형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맹목적인 지원이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아르카디아의 기반을 마련해 줌으로써, 스스로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갖추길 바랐다.
북해빙궁.
그들도 똑같았다.
그들은 모두가 버린 땅에서, 그들만이 살아가는 방식을 만들었다.
“명심하라. 스스로가 살아갈 자립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르카디아는 결국 퇴보할 수밖에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그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이제는 정말.
드미트리로 돌아갈 차례였다.
다음 날.
로만 드미트리는 수많은 이종족의 환호를 받으며, 병력을 이끌고 다시 끝없는 산맥 너머로 향했다.
* * *
끝없는 산맥을 넘어가는 동안.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로부터 몇 통의 연락을 받았다.
[오델리아 무법지대(無法地帶)의 상황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통제할 왕실이 사라지면서, 힘을 가진 자들이 권력을 틀어쥐고 오델리아 각 지역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상황입니다. 그동안은 전쟁의 여파를 수습하느라고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지만, 오델리아의 상황이 다른 국가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전에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에 보고받았던 사항이었다.
일단 오델리아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정보 길드가 파악하기로는 한계에 봉착한 것 같았다.
크로노스 남부의 삼국.
움베르토, 레드포드, 프랑크는 이 문제로 회의를 진행하길 바랐다.
그리고 다음 연락.
[이사벨의 행적을 조사한 결과, 움베르토 왕국에서 마지막 흔적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병사들의 무장을 재정비한 뒤 어딘가로 떠난 것은 확인했습니다만, 그 이상의 행적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앞선 두 개의 보고 모두.
드미트리를 떠나기 전에 명령했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이사벨은 분명히 크로노스 제국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움직인다고 들었는데, 대체 왜 크로노스가 아닌 움베르토 왕국에서 발견됐단 말인가.
이에 대해서도 충분한 조사가 필요했다.
루카스가 이끄는 하오문은 상당한 세력을 갖추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정보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연락.
이번에는 루카스가 아닌, 조나단 기사단장의 보고였다.
[발할라에서 두 명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한 명은 산체스라는 이름의 사내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브라간 백작입니다. 둘 다 발할라 제국의 손님으로 찾아왔습니다만, 용건은 다른 것 같습니다.]
산체스.
브라간 백작.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산체스는 모랄레스의 제자로, 로만 드미트리의 조언에 따라 비에토 공작을 찾아간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현재 반란군의 핵심 인물이었다. 반대로 브라간 백작은 발할라 황제의 사람이었다.
발할라 황제는 로만 드미트리와 좋은 관계가 아니었는데, 예상외로 사람을 보냈다.
할 일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는 상황.
드미트리는.
아니, 샐러맨더 대륙은 로만 드미트리가 필요했다.
* * *
조나단 기사단장의 보고처럼.
드미트리에 방문한 브라간 백작은, 상당히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후. 하필이면 이런 임무를 맡다니.”
최근.
발할라는 전운에 휩싸였다.
발할라의 상황을 비난하는 비에토 공작과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발할라 황제가 극심한 대립을 이루었는데, 황당하게도 이번 전쟁의 중요한 인물로 거론된 존재가 바로 로만 드미트리였다.
과거와 현재.
상황이 많이 변했다.
그때의 로만 드미트리는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을 받는 위태로운 존재였지만, 현재의 로만 드미트리는 왕국 연합의 수장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 한 번에 드미트리, 카이로, 헥토르, 움베르토, 레드포드, 프랑크가 나선다는 사실은, 발할라도 경계할 수밖에 없는 변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산체스는 로만 드미트리와 연이 있다.
발할라가 선을 넘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는 로만 드미트리의 편에 있지 않았던가.
그런 이유로 브라간 백작은 명령을 받았다.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의 마음을 회유하라. 최소한 그가 비에토 공작 편에 붙는 것은 막아야만 한다.”
벨피르 후작의 명령이었다.
어려운 임무였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브라간 백작은 협상의 달인이었고, 이번 임무를 위해서 전권을 일임받았다.
로만 드미트리도 권력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발할라의 제안을 무조건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은 비에토 공작의 반란이 성공할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님을 권력자들은 알았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도착했습니다.”
호위 기사의 보고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로만 드미트리를 만날 생각이었는데,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일단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만남을 청했는데, 이미 예정된 선약이 있다고 당장은 만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순간.
표정이 일그러졌다.
드미트리를 찾은 손님은 두 명밖에 없었다.
자신과 산체스.
아무래도, 이번 협상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