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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화 (343/615)

343화 낭만을 잃은 나라 (1)

그 시각.

드미트리로 복귀한 로만 드미트리는, 브라간 백작의 예상대로 산체스를 만났다.

“소문으로 들었다. 비에토 공작파에 합류해서 반란을 주도하고 있다고.”

“예. 로만 드미트리 님이 조언해 주신 덕분입니다. 발할라 황제의 만행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비에토 공작님과 같은 거물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분은 기꺼이 제 제안을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용건은?”

산체스가 웃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때도 로만 드미트리는 선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발할라가 대놓고 위협하는 상황에도 도움을 바라지 않았고, 오히려 비에토 공작을 찾아가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로 인해 산체스의 미래는 크게 변했다.

모랄레스의 제자로서 강함만을 추구하던 그가, 지금은 정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비에토를 따라 반란 세력의 핵심이 되었다.

고로.

로만 드미트리와의 만남은 중요했다.

과거의 연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상대는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 사람이 아니었다.

산체스가 말했다.

“……일단 간략하게 발할라의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현재 발할라 제국은 발할라 황제의 세력과 비에토 공작님을 따르는 반란 세력으로 나누어진 상황입니다. 저희 반란 세력이 추구하는 바는 발할라의 근본을 되찾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본래 발할라는 순수하게 강함을 겨루는 전사의 나라였고, 그 의미를 퇴색시킨 발할라 황제의 행보를 비난하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발할라 황제를 쓰러트릴 수 없다는 겁니다.”

반란 세력들.

그들이 넓게 퍼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환호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승리를 확신했건만, 막상 눈앞에 벌어진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황제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반란군에 가담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렸고, 방금까지 발할라의 근본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공포에 물든 얼굴로 바닥에 쓰러졌다.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모두가 반란 세력의 명분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이제껏 침묵한 이유는 황실의 압도적인 무력 때문이었다.

학살.

모조리 죽었다.

말이 반란 세력이지, 지금까지는 황제의 권력에 일방적으로 굴복하는 형세였다.

“현재로서는 저희에게 승산이 없습니다. 발할라 최상위 랭커들은 황제가 후계자로 거론되지 않았던 시절부터 그를 따르던 존재였고, 발할라 군부(軍部)는 황제를 향해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미트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반란 세력만으로는 절대 황제를 쓰러트릴 수 없기에, 그 차이를 메울 해결책이 저희로서는 간절합니다.”

현재.

발할라의 권력자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주목했다.

발할라의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 준 행보와 발할라 내부에서의 인지도는 압도적이었다.

“발할라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 님을 진정한 전사라고 표현합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 대륙의 양대산맥이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도 발할라의 축제에 참여했고, 바르보사를 단숨에 쓰러트리고 드미트리로 돌아갔던 일은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반란 세력에 합류하는 것은 단순히 전력의 상승을 떠나, 그 상징성만으로도 엄청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만약 저희를 도와 발할라 황제를 무너트린다면. 발할라는 드미트리의 우방국으로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일거양득(一擧兩得)이었다.

상징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발할라의 최상위 랭커들을 도륙해 버릴 수 있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강력한 존재도 얻는 거래였다.

무조건 성사시켜야만 했다.

산체스는 단어 하나하나, 간절한 마음을 담아 내뱉었다.

그런데.

“발할라의 반란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제안이라면,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로만 드미트리는, 당황하는 산체스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정확히는 내가 발할라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 * *

당혹스러운 대답이었다.

무조건 도와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라.

발할라 황제는 로만 드미트리와 악연(惡緣)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죽일 작정으로 발할라 축제에 초대했고, 바르보사가 패배하자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을 방관했다.

그 순간 관계는 정리되었다.

그간의 행보로 적대적인 세력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증명한 로만 드미트리라면, 분명히 발할라 황제에게 복수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최근 발할라는 크로노스와 내통하는 기미를 보였다.

간단한 문제였다.

크로노스는 드미트리와 적대적인 관계이기에, 크로노스와 연합할 가능성이 있는 발할라 황제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반란 세력과의 연합은 그야말로 로만 드미트리에게 전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

발할라라는 위험성을 오히려 우방국으로 확보한다면, 이보다 이상적인 결과는 없었다.

의문스러운 점은 로만 드미트리의 뉘앙스였다.

완벽한 거절이라기보다는, 반문의 여지를 남겼다.

산체스가 물었다.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방금 들은 그대로다. 내가 발할라의 내란에 가담해서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면, 너희가 내세우는 명분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발할라는 순혈주의(純血主義) 나라다. 아무리 내가 발할라에서 좋은 평판을 듣는다고 한들, 발할라인이 아닌 사람이 발할라 황제에게 검을 들이대는 순간 백성들은 돌아서게 될 것이다. 네게 묻겠다. 반란 세력이 백성들의 지지마저 잃어버린다면, 너희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나.”

“……없습니다.”

“그래. 그렇기에 황제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오로지 발할라만의 힘으로 해야 한다.”

복잡한 상황이었다.

발할라의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단순히 권력의 교체가 아닌, 발할라의 근본을 찾는 일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외부인이 주도한다면.

그것보다 우스운 일은 없었다.

전력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반란 세력으로서는, 백성들의 지지마저 잃어버린다면 사실상 승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산체스로서는 딜레마에 빠졌다.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을 받아 내야만 전력 차이를 메울 수 있을 텐데,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당하고 나니 앞날이 깜깜했다.

물은 엎질러졌다.

여기에서 뒤로 물러난다면.

발할라 황제는 반란 세력에 가담했던 모든 이들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처형할 것이 분명했다.

문득.

직접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는 의미는, 반대로 간접적으로는 도와줄 수 있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가능하다. 너희와는 무관한 드미트리와 발할라만의 문제로. 너희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이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나 또한 그만한 대가를 받아 내야겠지. 내가 바라는 조건은 간단하다.”

“……그게 무엇입니까?”

웃었다.

상대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산체스를 만난 처음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답을 정해 두었다.

“크로노스를 쓰러트릴 때까지 유효한 일시적인 연합. 나는 발할라가, 내 앞날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 * *

같은 말도 뉘앙스에 따라 의미가 달랐다.

산체스.

로만 드미트리.

서로 제시한 바는 똑같았다.

둘 다 발할라 황제를 끌어내리고 드미트리와 발할라의 연합을 형성하자고 말했지만, 산체스가 바라는 것이 공존(共存)이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일시적인 이해관계를 요구했다.

서로의 목적을 이루고 나면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완벽한 아군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그런 관계.

산체스는 한참을 고민했다.

훗날 적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드미트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산체스는 자리를 떠났다.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기로 했고, 일시적이지만 반란 세력과 드미트리는 손을 맞잡았다.

홀로 남은 공간.

로만 드미트리는 차를 마시며 앞으로의 미래를 떠올렸다.

“알렉산드르. 너는 내가 내란에 가담하길 원하겠지.”

세계수를 통해 보았던 장면.

알렉산드르는 발할라의 내란을 주도하며,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도 반란에 휘말리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크로노스로서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시나리오였다.

발할라 황제와 반란 세력이 서로 치고받으면서 발할라의 전력을 갉아먹고,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도 타격을 입을 테니 말이다.

고민하지 않았다.

발을 빼고 힘을 비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건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방관.

먼발치에서 몸을 사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만약 발할라 황제가 반란을 제압한다면, 그때는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연합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걱정해야만 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미래를 하늘에게 맡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발할라의 내란을 주도할 것이고,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원하는 결말을 쟁취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산체스에게 일시적인 연합을 제안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왕국 연합을 받아들였다.

루나와 카이로, 헥토르는 신하의 나라가 되겠다고 말했지만, 아직 다른 나라들은 연합의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로는 명확하게 선을 긋지 않았다.

처음부터 강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 익숙한 나라들은 자연스럽게 드미트리를 받아들이겠지만, 발할라 제국은 전제 조건이 달랐다.

그들은 포식자다.

굴복할 줄 모르는 존재들.

크로노스가 무너진다고 한들 발할라는 이전처럼 드미트리와 양대산맥으로 존재할 수는 있어도, 신하의 나라로서 머리를 숙이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선을 그었다. 일시적인 연합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혔다.

반란 세력에 가담하여 발할라의 전력을 갉아먹고 크로노스와의 전쟁을 대비하겠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바라는 목적은 그 이상에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산체스가 당황한 이유였다.

엄청난 포부에 그는 한동안 말을 잃었지만, 처음부터 그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는 제안이었다.

상황을 주도했다.

전쟁을 부추기는 크로노스.

도움을 바라는 발할라.

모두가 드미트리를 끌어들이길 바라지만, 결국은 로만 드미트리의 뜻대로 행했다.

탁.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스.”

“예, 부르셨습니까.”

지금부터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 *

그날 저녁.

게스트룸을 배회하며, 브라간 백작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날 아예 만나 주지 않겠다는 건가.”

산체스가 떠나고.

곧바로 만남을 청했다.

이제는 만나 주리라고 생각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를 모시는 하인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다.

“지금 도련님께서는 개인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계십니다. 게스트룸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시간이 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짜증이 일었다.

발할라 황제에게 악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발할라의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올바른 대응이 아니었다.

만약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손을 잡기라도 한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두 제국을 감당할 방법은 없다.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한 나라를 짊어지고 있는 결정권자라면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 참았다.

재촉했다간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브라간 백작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억누르며,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찾아 주기를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삼 일째 해가 밝는 날, 브라간 백작은 폭발했다.

“이런 빌어먹을 드미트리.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빌리!”

“예.”

빌리는 호위 기사였다.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에,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당장 만나지 않아도 좋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든 약속 일자를 잡아라. 우리는 이따위 대우를 받을 사람들이 아니다. 그 사실을 보여 준다면, 로만 드미트리도 더는 만남을 미루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협상은 무조건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협상 테이블에 앉더라도 주도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테니, 자신의 위치를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발할라의 대표.

무시당할 위치가 아니다.

발할라 황제를 등에 업는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털썩.

소파에 앉았다.

지금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제는 좋은 소식이 도착하리라는 생각에, 브라간 백작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차의 향기를 즐겼다.

그런데 30분 뒤.

끼익.

“……배, 백작님.”

빌리가 들어왔다.

명령을 받을 때만 하더라도 의기양양했던 그의 얼굴이, 한 번에 못 알아볼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체 30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빌리는 공포에 물든 음성으로 말했다.

“……케빈. 드미트리의 악귀가, 절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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