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4화 (344/615)

344화 낭만을 잃은 나라 (2)

30분 전.

빌리는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갔다.

브라간 백작의 명령대로 약속 일자를 잡기 위함이었는데,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만날 수 없습니다.”

한스였다.

애초에 만남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 상황에, 빌리는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로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도 로만 드미트리 님이 바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브라간 백작님은 발할라 제국을 대표해서 찾아온 것이고, 그분도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겠나. 지금 당장 시간을 내어 달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루면 하루, 이틀이면 이틀. 그 이상이 걸릴지라도 언제 만나 주겠다는 약속 일자만 말해 준다면, 나는 군말 없이 돌아가 그 사실을 브라간 백작님에게 전달하겠다.”

“불가능합니다. 도련님께서는, 개인적인 일정이 끝날 때까지 그 누구의 출입도 불허하셨습니다.”

“하지만…….”

연속되는 거절.

빌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건만, 하인의 태도가 그의 심기를 툭툭 건드렸다.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지 말고. 그래도 브라간 백작님의 의사는 전달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에 가시가 있었다.

상대는 하인에 불과하다.

브라간 백작을 떠나, 기사인 자신을 상대로도 저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말을 또박또박 내뱉을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살짝 위협적인 기세를 풍겼다.

브라간 백작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적을 이행하라고 했기에, 빌리로서도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한스가 말했다.

“기사님. 몇 번을 되물으셔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번 만남은 애초에 예정되어 있던 것이 아닙니다. 조급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일방적인 약속을 강요하시는 것은 매우 곤란합니다.”

“이 새끼가 진짜.”

확.

자신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건방졌다.

발할라에서 하인 따위가 자신을 이렇게 대했다면, 장담컨대 단칼에 목을 날려 버렸을 것이다.

그때였다.

“그 손 내려.”

바로 옆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빌리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사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처음에는 케빈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드미트리의 악귀.

발할라에서도 그의 명성은 대단했지만, 그렇다고 외형마저 자세하게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한스의 시선이 케빈을 향했다.

“케빈 님. 저는 괜찮습니다.”

‘케빈?’

빌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스와 케빈을 번갈아 바라본 그는, 의문의 사내가 소문으로 들었던 드미트리의 악귀임을 알았다.

순간 어색하게 웃었다.

한스를 때리려던 모양새가,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하하, 오해하지 마십시오. 로만 드미트리 님을 찾아왔다가…….”

“같잖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네가 뭔데 드미트리의 영역에서 한스 씨를 때리려고 하는 거지?”

살벌한 목소리였다.

문제는.

케빈의 발언이 빌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는 대단한 존재도 아니고 겨우 하인에 불과했다.

“같잖은 소리라니요.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닙니까?”

“난 분명히 네 행동을 설명하라고 말했을 텐데.”

“제게 명령하듯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드미트리가 아닌, 발할라 제국의 기사입니다. 당신에게 이따위 대우를 받을 이유도 없거니와, 설령 하인을 건드렸다고 한들 뭐 어쩌겠다는 겁니까?”

브라간 백작은 말했다.

발할라의 위치를 보여 주라고.

빌리가 강하게 나오자, 케빈은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자신보다 큰 빌리를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뭐라고?”

“씨발, 진짜 가지가지 하네. 네가 드미트리의 악귀면 다야? 기사인 내가 때린 것도 아니고, 하인을 상대로 손을 든 것 가지고 왜 이렇게 난리야. 애초에 너희가 우리를 무시하지만 않았어도…… 악!”

짜악!

고개가 홱 돌아갔다.

강렬한 충격에 뺨을 맞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빌리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았다.

“감히 내 뺨을 때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오라를 일으켰다.

번개같이 검을 뽑으며,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일단 케빈을 제압하려고 했다.

그런데.

훅.

공격을 피했다.

케빈은 똑같이 검을 뽑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움직임으로 공격을 흘려보내더니 재차 빌리의 뺨을 날려 버렸다.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당황으로 얼룩진 빌리가 황급히 반격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검을 휘둘렀을 때는 어김없이 그의 고개가 돌아가 버렸다.

연속해서 충격이 작렬했다.

강렬했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릎을 꿇고 머리채를 잡힌 상태였다.

짜악.

짜악, 짜악.

뺨을 계속해서 날렸다.

빌리는 애처로운 손길로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우악스러운 손길은 머리채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빌리의 행동.

드미트리에서 폭력을 행사하려는 것만으로도 심기를 자극했다.

게다가 상대는 한스였다.

한스가 누구인가.

로만 드미트리가 진심으로 아끼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한스는 케빈에게도 매우 각별한 존재였다.

처음 빈민가를 전전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성에 입성한 케빈은, 한스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냈었다.

그때 받았던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사회적인 위치가 상승해서 하인을 상대로 명령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지만, 한스를 만날 때면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로 인해.

드미트리에서는 그 누구도 한스를 건드리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와 케빈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기에, 하인의 신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존재가.

외부인에 의해 맞을 뻔한 상황이었다.

머리채를 잡고 끌고 와 수차례 뺨을 날리자, 빌리는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 ……가, 감당할 수 있겠어? ……나, 나는 발할라의 기사야.”

그의 말처럼.

빌리는 일반 기사가 아니다.

브라간 백작을 모시는 발할라의 기사.

제국의 위상을 등에 업었기에, 그는 드미트리의 악귀를 마주하고도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히죽 웃었다.

자신의 협박이 먹혔다는 생각에, 그가 재차 말했다.

“……너, 큰일 났어.”

우뚝.

행동을 멈추었다.

머리채를 잡은 채로 빌리를 바라보며, 케빈이 묘한 표정을 보였다.

“내가 재밌는 얘기를 하나 해 줄까?”

“……미친 새끼.”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던 시절, 난 주군을 따라서 바르코의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었어. 그때의 나는 드미트리를 모욕하는 녀석들의 말을 듣고도 그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지. 그날. 주군은 날 대신해서 그 녀석들을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어. 그리고 내게 말하더군. 앞으로는 상대를 판단하는 안목을 기르라고.”

꽉.

머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상대가 고통을 호소하자, 케빈은 잔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은 마치 로만 드미트리를 연상시켰다.

“지금의 내 기준에서, 너는 건드려도 되는 녀석이야.”

그 말에.

빌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제야, 그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 * *

“……이렇게 된 상황입니다.”

빌리가 힘겹게 설명을 끝냈다.

일련의 상황.

브라간 백작으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남의 영역에서 폭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그래도 빌리는 발할라의 기사이지 않은가.

“드미트리, 이 빌어먹을 새끼들.”

선을 넘었다.

한스든, 케빈이든.

그들은 발할라를 조금도 대우해 주지 않았다.

한스는 약속 일자 하나 잡아 주지 못해서 또박또박 말대답하는 모습을 보였고, 케빈은 발할라의 소속임을 알면서도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가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한바탕 엎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목이 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로만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파국(破局)으로 끝내기에는, 발할라 황실이 그에게 바라는 점이 많았다.

털썩.

“로만 드미트리. 애 같은 면이 있었네.”

소파에 앉았다.

한스와 케빈의 행동.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일 것이다.

발할라 황실과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로만 드미트리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을 확률이 높았다.

소문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당히 과격한 인물이라고 했는데, 크로노스 제국을 적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할라 제국마저도 이렇게 자극할 줄은 몰랐다.

“……이번 한 번만 참아 주지.”

분노를 억눌렀다.

딱 한 번.

어떻게든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서, 발할라 제국과의 관계를 이렇게 끌고 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말해 줄 것이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이나 보자고.”

이를 악물었다.

복수는 인내로부터 시작된다.

차갑게 변한 브라간 백작의 눈빛.

그는 소파에 몸을 눕히며, 로만 드미트리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로만 드미트리는 마법 통신기를 통해, 크로노스 남부 삼국의 국왕들과 화상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화면 너머.

움베르토 국왕이 말했다.

[오델리아의 난민(難民)을 받아들이는 것도 더는 불가능합니다. 그들로 인해서 국경지대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으며, 문제는 그들을 처벌한다고 한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중범죄를 저지른 난민은 곧바로 오델리아의 무법지대로 도망쳐 버립니다. 그들의 행동을 책임지고 처벌할 정부가 존재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범죄자들에게 무법지대는 면죄부의 땅이나 다름없습니다.]

[맞습니다. 프랑크의 범죄자들도, 수배가 걸리는 순간 오델리아의 국경을 넘어가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델리아의 멸망.

그것은 예상치 못한 문제를 낳았다.

왕실을 잃은 오델리아의 영주들은 각자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고, 수십 개로 쪼개진 영지들 바깥에는 무법지대가 형성되었다.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폐허가 되어 버린 수도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범죄를 일삼았지만, 오델리아의 영주들은 그들을 처벌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였다.

오델리아의 그 누구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바로잡기보다는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동안은 오델리아를 방관했다.

정확히는 언제 크로노스와의 전쟁이 다시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델리아에 병력을 분산시킬 수가 없었다.

크로노스는 오델리아의 수도를 날리면서 명확한 경고를 보냈다.

휴전 협상을 받아들였다고 한들, 크로노스 제국의 존재를 간과했다간 똑같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더는 오델리아를 방관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은 복합적인 문제로 오델리아의 상황을 뒤로 미루었지만, 지금은 상황을 정리할 때입니다. 크로노스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남서쪽 끝에 존재하는 오델리아를 반드시 안정시켜야만 합니다. 그들의 존재가 분란의 요소로 남는다면, 분명히 남부 삼국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남부 삼국.

그들의 최후방에 오델리아가 있었다.

시기의 문제였지,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레드포드 국왕이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오델리아를 정리하는 과정은 절대 만만하지 않을 겁니다. 무법지대를 정리하는 것도 문제지만, 기존의 권력자들이 납득할 만한 체계를 제시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크로노스가 휴전으로 한발 물러나고, 발할라가 내란에 휩싸인 지금이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델리아의 권력자들을 배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따르던 왕실이 멸망했다고 한들, 오델리아가 크로노스의 편에 붙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이었다.

오델리아를 위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그들을 적절하게 병합(倂合)할 필요성이 있었다.

“드미트리의 병력을 일부 파견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문제는 후방의 불안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법지대의 사람들과 기존의 권력자들이 반발한다면, 그들을 적으로 분류해도 무방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화상 회의를 끝냈다.

오델리아의 문제.

남부의 삼국이 주도적으로 처리할 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병력의 파견과 가이드를 제시할 뿐, 한발 물러나 발할라의 문제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계획을 어느 정도 실행한 후에야, 로만 드미트리는 한스를 불러 명령했다.

“한스. 브라간 백작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브라간 백작.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