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낭만을 잃은 나라 (3)
브라간 백작이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많이 바쁘셨던 모양입니다.”
웃는 얼굴로 내뱉은 말이지만, 그 안에는 가시가 있었다.
일주일.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빌리는 엉망이 된 얼굴로 치료를 받아야 했고, 브라간 백작은 발할라에서 대체 언제 일을 마무리하냐는 재촉 연락을 애써 진정시켰다.
여러모로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런 상황에서 편안해 보이는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을 마주하니, 불쑥 억눌렀던 화가 다시 치밀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예, 바빴습니다. 선약을 잡았다면 기다리는 일이 없었을 텐데, 다음부터는 미리 연락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을 달래 주는 변명이라도 말할 줄 알았는데, 목석 같은 반응에 심술이 났다.
“본론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일단 빌리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사실 웬만해서는 그냥 넘어가고 싶습니다만, 발할라의 대표로 따라나선 기사가 처참한 몰골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이번 일을 아무런 조치도 없이 처리해 버린다면, 이는 발할라의 명예를 짓밟아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리의 사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빌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앞으로 진행할 협상 테이블에서, 발할라의 위치를 인지시켜야만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사건이었다.
게스트룸에서 생각을 거듭하며, 어떻게 상대를 압박할지에 대한 계산을 끝냈다.
로만 드미트리가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더니, 담담함 얼굴로 브라간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먼저 한스를 건드렸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인과 기사는 명백히 신분이 다릅니다. 또한, 건드리려는 시늉만 했을 뿐 실질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시나리오였다.
뻔한 대답을 하면서, 브라간 백작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한스는 평범한 하인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를 보살펴 주었고, 케빈에게도 그는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한스에게 다른 직책을 맡기려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그간의 공을 인정해 작위를 하사하려 했으나, 한스는 하인의 직책에 만족한다면서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빌리는 그런 사람을 건드렸습니다. 드미트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를, 소리치며 협박하고 손을 들어 때리려 했습니다.”
“그렇다고 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케빈의 행동은, 발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동의합니다. 이번 사건은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벌어져서는 안 될 일입니다.”
툭.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상대를 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이, 상대를 해칠 듯 사나운 기세를 보였다.
“우리가 왜, 발할라의 사람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겁니까?”
* * *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이번 사건의 문제를 뭉그러트리는 ‘왜’라는 대답은, 발할라와의 관계를 포기했다는 뜻과 같았다.
눈가가 살짝 떨렸다.
브라간 백작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왜.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변명해도 모자랄 판에, 로만 드미트리는 선을 넘어 버렸다.
“한스가 드미트리에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거야 우리가 몰랐던 부분이고, 일반적으로 하인이라는 존재는 그리 대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원인 제공을 우리에게 찾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에 반해 빌리는 발할라의 기사입니다. 손님의 자격으로 드미트리를 방문했고, 발할라를 대표해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그런 존재를 일방적으로 구타한 것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겠습니까? 섣부르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말 한마디가, 발할라와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브라간 백작은 준비했던 멘트를 내뱉었다.
상식적인 영역의 발언이었고, 실제로 그의 말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걸 듣는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라는 것이다.
케빈이 사건을 저지르고 그에 대해서 보고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조금도 질책하지 않았다.
“브라간 백작. 너야말로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태도가 돌변했다.
다리를 꼬며 싸늘하게 내뱉는 발언에, 브라간 백작이 얼굴을 붉혔다.
“예의를 지키십시오!”
“드미트리와 발할라는 예의를 지킬 사이가 아니지 않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할라를 방문했을 때, 발할라는 축제를 빌미로 삼아 나를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막상 바르보사를 쓰러트리자 발할라의 황제는 어떻게 반응했지? 그와 관련한 자를 대놓고 처형하고, 크로노스가 나를 공격하도록 판을 깔아 주었다. 발할라의 영토가 아무리 넓다고 한들 제국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을 텐데, 크로노스의 병력이 마음껏 날뛰면서 국경을 넘는 그 순간까지 따라붙었다.”
툭툭,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만약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발할라 축제의 일은, 서로가 묻었어야 할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런데, 발할라의 황제는 단 한 번이라도 그에 대해 사과를 한 적이 있었나? 아니.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지.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사건을 흐지부지 넘겨 버렸고, 그렇게 오늘이 되었다. 브라간 백작. 대답해 봐. 내가 너희를 적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겨우 기사 하나를 건드렸다고 내게 책임을 묻는 네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할까.”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다.
발할라와의 관계.
적대국(敵對國)이었다.
어쩌면 휴전을 선언한 크로노스보다도, 발할라가 드미트리와 대화하는 것을 더 조심했어야 했다.
브라간 백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말을 툭 내뱉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날 설득해 봐. 드미트리를 찾아온 너를,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야 하는 이유를.”
* * *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였고, 기어코 로만 드미트리는 화합보다는 복수를 택했다.
‘소문처럼 극단적인 녀석이구나.’
상대는 목숨을 위협했다.
소문대로라면, 내뱉은 말을 실행에 옮길 존재였다.
그렇다고 한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벨피르 후작의 명령은 로만 드미트리가 반란 세력에 가담하지 않는 것이다.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더라도 최악의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와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설령 문제의 시발점이 발할라 황제로부터 비롯되었을지라도. 잘못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개를 당당히 들었다.
“상황을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제의 적이, 꼭 오늘도 적이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침착하게 말했다.
상대가 거칠게 나와도, 굳이 그에 휘말리지 않았다.
“발할라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드미트리는 크로노스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지금 당장은 휴전 협약이라는 명목으로 서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언제 다시 전쟁의 불길이 타오를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때 발할라가 크로노스의 편을 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거의 일을 붙잡고 계속해서 이렇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드미트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의 연합.
끔찍한 일이었다.
대륙의 양대산맥이 힘을 합친다는 것은, 드미트리와 왕국 연합만으로는 저지할 수 없는 세력을 의미했다.
유의미한 협박이었다.
상한 마음을 달래 주는 것보다, 확실한 현실 직시가 효과적이었다.
“제가 드미트리를 찾은 이유는 과거의 일로 싸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과 저는, 드미트리와 발할라는 눈앞에 벌어지는 일만 생각하는 멍청한 부류들과는 다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발할라가 원하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발할라의 내란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저를 만나기 전에 산체스와 이번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겠지만, 그들과 손을 잡는 것은 드미트리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반란 세력의 전력은 초라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그들에 가담한다고 한들, 반란 세력의 힘으로는 애초에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달콤한 당근을 내밀었다.
“만약 발할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발할라는 크로노스와 드미트리의 싸움에 절대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도와드리겠습니다. 발할라가 내란을 빠르게 제압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신다면, 발할라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드미트리와의 관계 개선에 힘을 쓰겠습니다.”
적절한 제안이었다.
과도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반란 세력을 외면하거나.
혹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발할라 황실을 도와주는 것만으로, 드미트리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크로노스와의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발할라의 제안은 상식적으로 거절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물론 과거의 사건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브라간 백작의 머리를 날려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브라간 백작은 드미트리로 떠나면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낼 자신이 있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타협을 택할 수밖에 없다.
발할라와 관계가 틀어졌다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크로노스가 전적으로 이득을 보게 될 것이다.
삼국의 관계.
브라간 백작은, 그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허점을 공략했다.
그런데.
“그게 끝인가.”
이상했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에, 브라간 백작은 재차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게 끝이라면 살려 둘 이유가 없을 것 같군.”
“……?!”
순간.
눈을 부릅떴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콱.
“앉아.”
케빈이었다.
뒤늦게 뒤를 확인하자, 피로 물든 케빈의 얼굴과 바닥에 널브러진 호위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알았다.
어떤 말을 내뱉든,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 * *
벨피르 후작의 집무실.
벨피르 후작은, 수하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비에토 공작이 본격적으로 반란 세력을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부름에 응한 발할라의 귀족은 총 열여덟 명이고, 병력의 숫자는 얼추 20만 내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따르는 최상위 랭커로는 랭킹 10위의 발데라스가 유일하고, 나머지는 10위 밖의 인물들이라 크게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일을 저지르는구나.”
반란 세력의 집결.
내란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20만의 병력.
엄청난 숫자였다.
겨우 귀족 열여덟이 동원했다기에는 입이 떡 벌어지는 규모였지만, 이곳은 왕국이 아닌 제국이었다.
제국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그나마 한때 권력의 중추였던 비에토 공작이기에 20만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지, 그들이 상대하는 발할라 황제의 세력은 그보다 열 배는 많았다.
게다가 최상위 랭커들이 전부 발할라 황제를 따르고 있는 상황.
민심은 비에토 공작의 편이었으나, 권력자들이 발할라 황제의 승리를 확신하는 이유였다.
아무리 일반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발할라의 낭만을 부르짖는다고 한들, 질적으로 양적으로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황제군을 쓰러트릴 방법은 없었다.
벨피르 후작이 말했다.
“헤르나드의 상황은?”
“반란 세력의 공격을 대비해 병력을 집결시킨 상황입니다.”
“일단 상황을 주시하며 대기하라고 명하라. 비에토 공작은 거석(巨石)이라는 별명처럼, 신중하고 섣부르게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대신, 한번 몰아칠 때는 결단에 망설임이 없지. 현재 그들의 전력으로는 황제군을 쓰러트릴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민심을 확보하기 위해서 액션을 보여 주는 것일 테니, 헤르나드의 방비를 제대로 하는 것만으로도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헤르나드.
후방의 영지였다.
비에토 공작이 수도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었고, 단단한 요새를 자랑하는 그곳에 황제군을 집결시켜 놓았다.
비에토 공작의 수는 뻔히 보였다.
전력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그는 백성들이 봉기(蜂起)를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수밖에 없었다.
“쯧쯧, 멍청한 비에토. 현실에 계속 안주했다면 평안한 노후를 보냈을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혀를 찼다.
반란의 성공 확률은 낮았다.
변수가 발생한다고 한들, 발할라 황실은 그를 압도할 전력을 갖추었다.
수하를 내보냈다.
반란군의 문제는 잠시 잊고 다른 문제들을 처리하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하가 다시 찾아왔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수하가 들어섰다.
그런데, 이전과는 다르게 그의 손에는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마법 우편을 통해 도착한 것입니다. 마법으로 밀봉되어 있는 상자에 위험한 요소가 없다는 사실은 확인했고, 브라간 백작의 직인(職印)으로 벨피르 후작님에게 곧바로 전달하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브라간 백작이?”
오늘 아침.
브라간 백작은 로만 드미트리를 만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좋은 소식을 전달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벨피르 후작은 웃는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그 순간.
툭.
데구루루.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니는 무언가.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벨피르 후작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로만 드미트리, 이 찢어 죽일 새끼가! 지금 당장 마차를 준비하라! 수뇌부들을 소집하고, 황제 폐하를 만날 것이다!”
그것의 정체.
그것은 바로, 브라간 백작의 머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