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낭만을 잃은 나라 (4)
발할라 황실.
긴급으로 수뇌부들이 소집되었다.
나른한 표정의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벨피르 후작이 탁자 위에 머리가 담긴 상자를 올려놓았다.
툭.
“이걸 보십시오. 발할라를 대표해 찾아간 브라간 백작을, 로만 드미트리는 머리만 잘라 제게 보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명백한 선전 포고입니다. 반란 세력에 가담해, 발할라 제국을 공격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다들 표정을 찌푸렸다.
상자 안으로 보이는 참담한 광경과 비릿한 냄새에, 수뇌부 대부분이 동조하는 반응을 보였다.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타협이 불가한 녀석이었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전령들은 죽이지 않는 것이 대륙의 법도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선을 넘었습니다. 당장 전쟁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일단 병력을 집결시켜 비에토 공작의 반란 세력을 쓸어 버리고, 크로노스 제국과 연합해 드미트리를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분노가 들끓었다.
전령을 죽이는 행위.
사실 발할라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기에 할 말이 없는 상황이지만, 제국이라는 나라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였다.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발할라 제국이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도, 그것을 맞잡지 않고 뿌리친 로만 드미트리의 태도에 있었다.
그때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보수파의 고메스 백작이, 새로운 의견을 내세웠다.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좋은 의견이라도 있으십니까?”
“로만 드미트리가 브라간 백작을 죽이고, 그 이전에 반란 세력의 산체스를 만났다는 정황을 보았을 때, 그는 높은 확률로 반란 세력에 가담한 것이 분명합니다. 비에토 공작은 전력의 열세를 외부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속셈인 것이죠. 우리는 바로 그것을 공략하는 겁니다. 발할라의 순혈주의를 내세운다면, 현재 비에토 공작을 따르는 민심을 단번에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만약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민심을 잃은 반란 세력은,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하고 단번에 쓸려 나갈 것이다.
고메스 백작이 말을 덧붙였다.
“발할라의 순혈주의는 매우 폐쇄적입니다. 많은 인종을 받아들이는 크로노스와는 다르게, 발할라는 발할라 출신만을 고집합니다. 이는 이번 반란의 맥락과 직결됩니다. 발할라의 백성들은 발할라가 전사의 나라라는 근본을 되찾길 바라는데, 그 과정을 외부의 세력이 주도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반란 세력의 딜레마입니다. 근본을 되찾는 과정이기에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들의 주장을 활용하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
브라간 백작의 머리를 잘라서 보냄으로써, 발할라 황실이 꼬투리를 잡을 빌미를 내주었다.
고메스 백작이 황제를 보았다.
“황제 폐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에게 연락해, 민심을 뒤흔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겠습니다.”
“저 또한 고메스 백작의 계획을 지지합니다.”
벨피르 후작도 힘을 실었다.
최근.
진보파와 보수파는 같은 입장을 보였다.
처음에는 크로노스와 타협하는 진보파의 행보에 고메스 백작이 분노했었지만, 발할라 황제의 광기(狂氣)가 심해질수록 수하들은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다.
발할라 황제의 시선이 고메스 백작을 향했다.
고메스 백작이 살짝 움츠러드는 반응을 보이자, 그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알아서 하거라.”
귀찮다는 말투.
발할라 황제가 물러나자, 고메스 백작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한숨 돌리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통신병을 불렀다.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는 거미처럼, 고메스 백작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 * *
마법 통신이 연결되었다.
화면 너머.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나타나자, 이번 계획을 주도한 고메스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우리는 대화를 위해 발할라의 귀족을 보냈는데, 이렇게 머리만 잘라 돌려보내는 것이 드미트리의 방식이었습니까? 아무래도 실수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 선택 한 번으로, 발할라와 드미트리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너희가 날 대놓고 죽이려고 한 순간부터, 나는 발할라와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나온다면야, 나도 예의를 버리는 수밖에.”
고메스 백작이 웃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브라간 백작의 머리를 보낼 정도라면, 순순히 대화를 받아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 덴버 백작이 네게 손을 내밀었을 때, 네가 그 손을 맞잡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 발할라 제국이라는 날개를 달고 벌써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지금의 너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겨우 카이로 출신 주제에 왕국 연합의 수장으로 거듭난 너는, 분명히 우리의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
카이로의 내란.
덴버 백작이 죽었다.
그날의 일로,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런데 나대는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크로노스와의 전쟁에서 한번 승리했다고, 벌써 이 세상이 네 것처럼 느껴지는 건가?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대륙의 양대산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그만한 자격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너는 크로노스든, 발할라든. 어느 하나는 등을 돌려서는 안 되었다. 비에토 공작이 반란을 도모하는 지금, 비에토 공작의 편에 붙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의미지.”
대화를 자연스럽게 끌고 갔다.
마법 통신.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화를 기록했다.
그가 비에토 공작과 결탁했다는 증거를 확보한다면, 그것을 기반으로 민심을 빼앗아 올 생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설마 네가 비에토 공작을 도와준다고 해서, 발할라 제국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미끼를 던졌다.
더는 말하지 않고.
상대의 반응을 주시했다.
먹이를 노리는 날카로운 눈빛은, 예상한 반응을 보이자마자 목덜미를 콱 물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고메스 백작. 이번 일은 비에토 공작과 무관하다.]
“……뭐?”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부정할 줄은 몰랐다.
브라간 백작의 머리를 잘라서 보낸 그 순간부터, 상대가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너희가 날 대놓고 죽이려고 한 순간부터, 나는 발할라와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고. 그것이 브라간 백작의 머리를 잘라서 보낸 이유다. 나는 너희를 적대국이라 생각하기에, 브라간 백작을 통해 내 의지를 증명했을 뿐이다.]
명백한 적의.
그것은 판을 뒤엎는 발언이었다.
* * *
발할라의 마법 통신.
의도는 뻔했다.
발할라의 귀족이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보다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거대한 세력 간의 문제는 그만큼 잔인한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발할라의 의도에 순순히 따라 줄 생각은 없었다.
브라간 백작.
그의 목을 잘랐다.
산체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로만 드미트리는 일주일 전부터 그렇게 행할 것을 미리 말해 두었다.
[너희가 내란에 휩싸이고 말고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발할라 축제 직후. 그때는 크로노스와의 전쟁으로 너희에게 죄를 물을 여력이 없었지만, 드미트리를 아직 대화의 상대로 생각하는 너희의 같잖은 태도에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너희의 진심을 인정하고 발할라와의 관계를 개선해 보도록 노력하지.]
고메스 백작은 말문이 막혔다.
개인적인 복수.
그 말 한마디에, 논점이 완전히 흩트려졌다.
함정이 의미를 잃었다.
발할라 제국은 실제로 로만 드미트리를 살해하려는 의도를 보였고, 그와 관련한 사건들로 인해서 발할라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축제에 참여한 위대한 전사를 왜 죽도록 방관하느냐고 말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비난한 사건이었기에, 그 사건에 대한 복수라고 주장한다면 브라간 백작의 죽음은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오히려 발할라 제국이 딜레마에 빠졌다.
[관계를 되돌릴 방법은 유일하다. 발할라 황제가 직접 찾아와, 내게 용서를 구하라.]
“이 새끼가 감히!”
“어디서 그런 망발을 내뱉는 것이냐!”
순간.
귀족들이 분노를 토해 냈다.
발할라 황제가 직접 사과하는 것.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발할라 황제는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인물도 아니고, 만약 사과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발할라 제국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크로노스의 휴전 협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백히 거절하라고 내뱉은 제안에, 고메스 백작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정녕 우리와 끝을 보겠다는 의미냐.”
[말했잖아.]
건방졌다.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발할라의 권력자들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너희와 타협할 생각은 없다고. 현 시간부로, 드미트리는 공식적으로 발할라 제국을 적대국으로 선포하겠다.]
협상 결렬.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은 일방적으로 끊겨 버렸다.
* * *
정적이 내려앉았다.
발할라의 한 귀족이, 당황스럽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발할라 제국을 상대로 선전 포고를 한 게 맞습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
예상을 넘어섰다.
크로노스 제국과 언제 다시 맞붙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발할라 제국마저 적으로 돌리는 악수(惡手)를 택할 줄은 몰랐다.
이건 명백히 드미트리에게 불리한 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건방진 태도에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손을 맞잡는다면, 드미트리를 밀어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한 말일 것이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다.”
황제가 떠난 지금.
벨피르 후작은, 이곳에서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도 황당했다.
방금 벌어진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준 행보는 그의 진심을 증명했다.
크로노스가 카이로의 내란에 가담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반격을 시도했다.
크로노스를 물리치는 것만으로도 카이로로서는 대단한 성과인데도, 그는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기어코 적들을 도륙했다.
그리고 발할라의 축제.
크로노스와의 전쟁.
최근 전쟁 포로까지.
단 한 번도 상식에 부합하지 않았다.
무모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실행에 옮기고, 승리라는 결과까지 쟁취하는 존재가 바로 로만 드미트리였다.
고메스 백작이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번 일을 발할라와 드미트리의 문제로 끌고 갈 생각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대놓고 발할라를 공격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지난날의 복수라는 명분이 있습니다. 정말 영악한 녀석입니다. 우리가 발할라의 순혈주의를 명분으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이번 일을 반란 세력과는 별개의 문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적이지만 대단했다.
이로 인해.
발할라 제국은 딜레마에 빠졌다.
내란을 주도하고 있는 비에토 공작을 제외하고도, 밖에서 위협할 로만 드미트리도 경계해야만 했다.
벨피르 후작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선전 포고의 의미로 병력을 움직일 것이 분명하다. 헥토르는 드미트리의 우방국이니, 발할라와 맞닿아 있는 북부의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도록 길을 내주겠지. 드미트리가 실제로 발할라와의 전쟁을 바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비에토 공작의 반란이 성공하길 바란다고 한들, 그만한 희생을 감수했다가는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일종의 액션이었다.
국경으로 병력을 보내 위협하는 시늉만 하겠지만, 발할라 제국으로서는 대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병력 일부를 북부 전선으로 보내야 한다. 로만 드미트리가 얕보지 않을 만큼의 병력이면 충분하고, 나머지 병력은 남부에 집중해서 일단 비에토 공작의 반란군을 단번에 쓸어 버릴 것이다. 지금부터는 시간의 싸움이다.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렸다간, 우리는 반란군과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어떤 위기를 겪을지 모른다.”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
확실한 것은.
발할라 황실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반란군을 짓밟은 뒤에, 벨피르 후작은 반드시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대가를 치르겠다고 다짐했다.
“반란군을 모두 정리하고 나면. 크로노스 제국에 연락해서 그들과 결탁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드미트리를 대륙에서 지워 버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처리할 것이다. 일단 빠르게 움직여라.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알겠습니다.”
크로노스와의 결탁.
보수파가 반대하던 일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 보수파의 수장인 고메스 백작은 크게 토를 달지 않았다.
그때였다.
발할라의 수뇌부들이 해산하려는 그때, 황실 기사단의 기사가 황급히 달려와서는 소식을 전했다.
“급보(急報)입니다! 비에토 공작의 반란군이 헤르나드를 공격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군의 선제공격.
그것은 정말이지, 충격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