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낭만을 잃은 나라 (5)
헤르나드.
그곳이 불길에 휩싸였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공격에, 마침내 단단한 성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성벽이 무너졌다!”
“공격하라!”
혼란의 도가니였다.
헤르나드의 병사들은 황급히 길을 막아섰지만, 반란군의 선두에는 막을 수 없는 괴물이 있었다.
“비켜라!”
퍽.
콰직.
처음으로 맞닥트린 병사의 머리가 단번에 부서졌다.
흰 수염을 펄럭이며 구릿빛 피부를 드러낸 사내는, 자신의 몸보다 큰 할버드(halberd)를 빙글빙글 회전시키며 막아서는 적들을 쓸어 버렸다.
할버드에 걸린 상대는 연약한 육체와 단단한 갑옷을 가리지 않았다.
오라를 격정적으로 분출하지 않아도, 웬만한 것들은 처참히 찢겨나갔다.
“마, 막아라!”
“비에토 공작을 죽여라!”
사내의 정체.
비에토 공작이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였지만, 맹렬하게 뿜어내는 기세는 전성기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발할라 랭킹에 등재되지 않은 존재.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논외로 분류되었지만, 그는 5성의 검사로서 한때는 랭킹 10위 안에 들어갔을 정도로 대단한 전사였다.
그의 뒤로.
반란군이 밀려들었다.
헤르나드의 병사들은 만만치 않았지만, 20만의 반란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를 따르라!”
비에토 공작이 앞장섰다.
그와 발할라 랭킹 10위의 발데라스 같은 강자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길을 열었다.
며칠 전.
그들은 결단을 내렸다.
“발할라 황제의 군대가 헤르나드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일부일 뿐이지만, 그 이상의 병력이 집결한다면 그때는 헤르나드를 함락시킬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로만 드미트리의 거취가 정해지지 않은 지금, 발할라 황실은 아직 반란군만의 힘으로는 공격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기에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신다면, 헤르나드를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근거를 갖춘 판단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통해 앞으로의 계획을 들었고, 비에토 공작은 미리 병력을 집결시킨 후에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아직 그로서는 로만 드미트리를 완벽하게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란을 도모하는 지금,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도박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적들이 밀려들었다.
비에토 공작은 거칠게 달려들더니, 오라를 폭발시키며 적들을 휩쓸어 버렸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크악!”
“으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십의 병사들을 단번에 도륙해 버렸다.
이곳.
헤르나드에는 상위 랭커가 없었다.
황제의 병사들을 집결시키며 수성에 적합한 구색은 갖추었지만, 벨피르 후작을 비롯한 발할라의 수뇌부들은 비에토 공작이 이렇게 무모하게 공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안일한 판단이라기에는 조금 복잡한 문제였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 반란군으로서는 전쟁이 아니라 민심을 활용한 정치적인 공작을 내세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헤르나드의 병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목숨을 걸고 밀려드는 반란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성문이 완전히 뚫려 버렸다.
학살이 벌어졌고, 가장 최전방에서 싸우던 비에토 공작은 헤르나드의 지휘관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콰직.
머리를 박살 냈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피에, 비에토 공작이 짐승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적의 지휘관을 죽였다! 같은 발할라인으로서, 투항하는 자들의 목숨은 살려 주겠다!”
치열했던 공성전.
그 전투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 * *
헤르나드.
그곳 또한 일반 백성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이 함락되었다고 겁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반란군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한 상황에.
비에토 공작은 개선장군(凱旋將軍)처럼 걸어 나오며,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발할라의 백성들은 들어라! 발할라는 대대로 전사들의 나라였다. 정정당당하게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순수하게 강함을 겨루는 발할라의 전통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의 발할라는 어떠한가.”
벨피르 후작의 예상처럼.
민심은 중요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지금, 반란군의 행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반드시 휘어잡아야만 했다.
“진보를 부르짖는 매국노들이 발할라의 정통성을 없애 버렸다. 크로노스와 결탁하여, 그들은 더러운 권력에 눈이 먼 모습을 보였다. 그 예시가 바로 발할라의 축제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건만, 발할라는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 조금도 존중하지 않았다. 그가 죽기를 바랐다. 축제의 무대를 신성하게 여기지 않고,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기 위한 처형대로 활용했다.”
“더러운 매국노들!”
“그건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몇몇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은 전부를 전염시키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눈에서 강렬한 열망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승리했다. 진정한 전사로서,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더러운 매국노들의 의도를 보란 듯이 부숴 버렸다. 그런데도 발할라 황실은 크로노스 제국을 동원해 로만 드미트리를 죽이려 했다. 대체 발할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타락했단 말인가.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길 바랐다면, 발할라의 방식대로 정정당당하게 무대 위에서 힘으로 쓰러트려야만 했다. 그것이 발할라의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무기를 들었다. 발할라가 타락하는 꼴을 더는 지켜볼 수 없기에, 나 비에토는 결단을 내렸다.”
꽉.
할버드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힘껏 치켜들며 소리쳤다.
“나를 따르라. 이 비에토가, 발할라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다!”
“비에토! 비에토!”
“비에토! 비에토!”
몇몇 사람들.
그들이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강렬한 열망은 전염병처럼 번졌고,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모두 비에토 공작의 이름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민심이었다.
황제의 병력에 비해 무려 10배 이상이 밀리는 상황에서, 비에토 공작은 민심이 자신을 지지해 주리라는 사실 하나만을 믿고 반란을 결심했다.
열광적인 환호로 물든 거리.
반란군은 확신했다.
발할라의 근본을 되찾겠다는 열망들이, 발할라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라고 말이다.
* * *
상황이 정리되었다.
반란군의 수뇌부.
그들이 집결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들은 상황이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황은?”
“발할라 황실이 소집령을 선포했습니다. 일부는 북부로 보내고, 그 외 약 백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토벌군을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민심을 돌볼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단번에 이곳을 쓸어 버리고, 반란을 진압하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백만.
넓은 땅덩어리와 수도를 보호하는 병력을 생각한다면, 거의 동원할 수 있는 대부분을 보냈다.
반란군으로서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아직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백만 군대를 마주했다가는, 헤르나드의 성벽으로는 그들의 공격을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비에토 공작이, 산체스에게 물었다.
“산체스.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이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나.”
“예, 저는 확신합니다.”
산체스.
반란군의 핵심이었다.
이번 계획을 주도한 만큼, 그의 발언은 상당한 영향력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약속했던 대로 발할라 제국을 적대국으로 선포했습니다. 그 증거로, 발할라 황실은 일부 병력을 북부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병력을 끌고 와서 공격하는 것을 대비한 판단일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도 선동가들 덕분에, 손쉽게 민심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방금.
비에토 공작은 격정적으로 연설했다.
그 자리에.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오문의 일원들은 대륙 곳곳에 퍼져 있었고, 그들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비에토 공작을 지지하는 발언을 툭툭 내뱉었다.
발할라 황제는 공포의 상징이다.
비에토 공작이 아무리 좋은 명분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발할라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람들을 선동했다.
거짓을 진실로 꾸미는 것이 아닌.
그들의 마음속에 피어오른 불길에 부채질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열망이 미친 듯이 타올랐다.
그때의 상황.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선동가들의 개입을 못마땅해했던 비에토 공작이지만, 산체스의 조언을 통해 전략적인 움직임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새삼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머나먼 타국에서 살아가는 존재건만, 대체 언제 발할라에 사람들을 심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소름 돋을 정도의 디테일이었다.
병력을 북부로 분산시키고 선동가들을 동원하는 상황은, 모두 로만 드미트리의 머리로부터 비롯되었다.
비에토 공작이 말했다.
“일단 지금까지는 우리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고 있다. 항상 명심하라. 결국, 반란을 이루어 내는 것은 우리의 힘이다. 발할라의 전통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가 피를 흘리고 싸우며 쟁취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의미가 있는 싸움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반란.
결단을 내릴 때까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반란군으로서 집결한 지금, 그들은 발할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었다.
“이곳 헤르나드에서 적들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라.”
“명을 받듭니다.”
일단 시작은.
수성(守城)으로 상황을 관망할 것이다.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가 말한 또 다른 계획들이 실행된다면, 그때는 진정으로 반란의 불길이 살아날 것이다.
* * *
토벌군(討伐軍).
반란군을 처단할 군대의 수장은 고메스 백작이었다.
그가 지휘관을 맡았고, 수하로부터 헤르나드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조금 전. 헤르나드가 함락당했습니다. 비에토 공작은 헤르나드를 점령한 상태고,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농성을 벌이려는 것 같습니다.”
“헤르나드가 벌써 무너지다니.”
표정을 찌푸렸다.
반란군의 움직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헤르나드에 병력을 집결시켰건만, 비에토 공작을 필두로 거칠게 밀려드는 반란군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확실히 거석이라는 명성에 어울렸다.
비에토 공작은 묵직한 존재감을 보이며 섣불리 움직이지 않지만, 결단을 내렸을 때는 내리막으로 거석이 굴러떨어지는 것처럼 막아서는 모든 것들을 짓밟아 버렸다.
그런 과감함에 한때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고, 발할라 황제가 권력을 거머쥐면서 비에토 공작은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다면, 반란은 장기화가 되어 발할라 제국을 갉아먹을 것이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총력을 다할 것이다. 세자르를 제외한 발할라 최상위 랭커들을 모두 소집하라. 적들이 내세울 실력자라고는 발데라스가 유일한 상황이다. 압도적인 병력과 최상위 랭커들을 동원한다면, 비에토 공작이 어떤 대비를 했든 간에 토벌군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자르.
랭킹 1위의 발할라 제일검이다.
그는 수도 방위를 맡았기에, 그를 제외한 나머지를 소집하라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벌어졌다.
고메스 백작을 다시 찾아온 수하가, 황당한 소리를 내뱉었다.
“고메스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최상위 랭커들이, 결정전(決定戰)에 소집되었습니다!”
“……결정전이라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정전.
그것은 지금 나와서는 안 될, 그리고 나올 수도 없는 그런 단어였다.
* * *
결정전이란 무엇인가.
랭킹 10위.
최상위 랭커라고 불리는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발할라 특유의 전통인데, 결정전의 권한을 사용할 경우 상대는 그 도전을 거절할 수 없다.
고메스 백작이 놀란 이유는 단순히 결정전이 진행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이 결정전의 경우에는, 상대의 항복이 아닌 한쪽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게 문제였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 중요한 시기에 결정전을 선언한단 말인가.
고메스 백작이 물었다.
“그게 대체 누구야?! 어떤 새끼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어?”
예상되는 인물은 없었다.
현재 발할라 최상위 랭킹은 대부분 발할라 황제를 따르는 사람들이었고, 그들로서는 질책을 받을 것이 뻔한 이런 결정을 내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서로 같은 편이지 않은가.
어느 한쪽을 죽임으로써 랭킹을 한 단계 올리는 것은, 상대에 대한 원한이 있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고메스 백작의 물음에, 수하는 몇 번이고 망설이는 반응을 보이더니 힘겹게 한 이름을 말했다.
“아레스. 랭킹 3위인 아레스가, 2위의 알바레즈를 상대로 결정전을 선포했습니다.”
아레스.
툭 튀어나온 한 이름에, 고메스 백작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